또 다른 길(6)
최기석은 슬쩍 병실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4인실에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 전부다.
[폭군의 강림 스킬을 사용합니다.]
[환자가 의사의 수술 권유, 기타 처치 지시에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일시적으로 근력과 민첩성이 상승합니다.]
"어르신. 실례지만 아파서 병원에 오신 거 아닙니까?"
"그······ 그거야 그렇지."
최기석의 기세가 바뀌자 유민식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기석이 거인처럼 크게 보였다.
"어르신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솔직히 말을 해 주셔야 병원에서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
"지금 많이 아프시죠?"
"입원한 이후로 이렇게 아픈 건 처음이야."
"그래서 말인데요. 제 생각에는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검사?"
"네. 그중에서도 CT를 찍으면 어르신이 어디가 아픈지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최기석은 일부러 CT라는 말을 강조했다.
[폭군의 강림, 경고 효과가 발동합니다.]
[환자에게 통증 전달의 중요성, CT의 필요성을 각인시켰습니다.]
경고 효과가 발동하면서 최기석에게서 뿜어진 붉은 빛이 유민식을 휘감았다.
"하긴 자네 말이 맞지.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무엇하러 혼자서 끙끙대고 있는 건지."
"제가 당직 선생님 불러 드릴게요."
최기석이 콜을 하자 당직의인 남지황이 병실에 도착했다.
"어르신. 많이 아프세요?"
남지황이 유민식을 보며 물었다.
"가슴부터 어깨까지가 찢어지는 것 같아. 지금은 배 위쪽도 아프고."
"언제부터 아프셨죠?"
"아침부터 조금씩 아팠는데 오후부터 심해졌어. 지금은 못 참을 정도야."
"흐음······."
남지황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지금으로써는 딱히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통증이 심하면 제가 약 좀 써 드릴게요."
"약? 약도 좋은데. 나 CT 한 번만 찍어 볼게."
"CT요?"
남지황이 놀란 토끼눈을 했다.
"아프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정확히 알아야지. 검사를 받아서 정상이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
유민식은 최기석이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따라 했다.
폭군의 강림 효과가 제대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선배. 그냥 CT 찍는 게 어떨까요?"
최기석이 바람을 잡았다.
"환자분이 고혈압도 있고 증상만 들어보면 언뜻 대동맥 박리 같기도 한데······."
"빨리 CT 찍어 줘!"
유민식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잠깐 전화 좀 해 보겠습니다."
남지황이 잠시 병실 바깥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담당 교수님하고 통화해 봤습니다. 환자분이 강력하게 원하시니까 일단 해 보라고 하시는 군요. 오더 내릴 테니까 응급으로 찍고 와."
"네!"
최기석은 환자의 침상을 끌고 영상의학과로 갔다.
유민식이 기계에 눕는 것을 도운 뒤 바깥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예상대로의 전개.
이번 일로 욕을 먹거나 불똥이 튈 염려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최기석이 고집을 피워서 CT를 찍은 게 아니라 환자가 원해서 CT를 찍은 것이니까 말이다.
인턴은 약하지만 환자는 강한 법.
유민식이 직접 검사를 받게 만든 것이 신의 한 수다.
어쩌면 이런 것도 일종의 정치 게임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검사가 끝난 후 최기석은 환자를 데리고 병실로 돌아왔다.
타다다다닥. 드르르륵.
남지황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병실 문을 열었다.
순간 최기석과 남지황의 시선이 정통으로 맞았다.
"응급 판독 결과 나왔다. 환자 대동맥 박리야. 그것도 상행대동맥."
"진짜요? 말도 안 돼."
최기석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연기를 했다.
"환자분.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지금 당장 수술을 받으셔야할 것 같습니다."
"수술?"
"네. 대동맥 박리라는 질환입니다. 이 질환은······."
남지황의 설명을 듣던 중 유민식이 얼굴을 찌푸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으으으윽!"
무거운 신음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환자 잘 보고 있어. 난 흉부외과에 연락해서 수술 스케줄 잡고 동의서 뽑을 테니까."
남지황이 바람처럼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을 먹으러 나갔던 보호자들이 병실로 돌아왔다.
"여보! 왜 그래요!"
양금순이 고통스러워하는 유민식을 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환자분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졌습니다."
최기석은 차분하게 대동맥 박리가 어떤 질병인지 설명했고 곧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사전에 그녀와 라포가 형성되어 있어서 그럴까.
양금순은 꼬투리를 잡거나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동의서는 내가 받을 테니까. 너는 하트만 달고 폴리 끼워."
"네."
스테이션으로 달려가서 필요한 물품을 받았다. 그리고 침상 주변에 천막을 친 뒤 소변줄을 꽂고 정맥라인을 잡았다.
"크으으으윽."
유민식이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몸을 들썩거렸다.
다른 인턴이라면 당황하거나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라서 처치에 실패했겠지만 최기석은 달랐다.
그는 얼어붙은 심장으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더불어 그동안 얻은 능력들로 빠르고 신속하게 처치를 해치웠다.
"선배 끝났어요.."
"벌써?"
남지황이 혀를 찼다.
설명을 끝내고 사인을 받기도 전에 최기석이 처치를 끝냈기 때문이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
"됐다. 가자."
"네!"
최기석과 남지황이 베드를 밀며 수술실로 달려갔다.
타다다닥.
두 사람의 발걸음은 갈수록 빨라졌다. 유민식의 상태가 악화되는 모습이 한 눈에 보였다.
"순환기내과에서도 스펙터클하네."
로젯 입구에 있던 장혁필이 최기석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기석이는 보통 인턴이 아니라니까."
"······아. 네."
"이제 우리한테 맡기고 가봐."
장혁필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베드를 끌고 C 로젯으로 들어갔다.
할 일이 끝났지만 최기석은 그 자리에서 서서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유민식이 제때에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수술 보조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대동맥 수술은 장기 임무인 최고를 향해서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동영상으로 수술 장면을 떠 놓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안 가고 뭐해?"
"지금 갑니다."
최기석은 앞서가는 남지황의 뒤를 따랐다.
* * *
내과에서의 세 번째 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최기석은 병동 일을 처리하며 내과 공부에 힘을 썼다.
환자 바라기 아이템으로 인해 제아무리 몸을 굴려도 체력이 7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퐁당당으로 뛴 다음 날에도 말이다.
항상 컨디션이 좋았기에 공부를 해도, 각종 처치를 해도 성과가 뛰어났다.
더불어 아이돌을 구했던 것이 뉴스로 나가면서 평판이 솟구쳤다.
다만 슬픈 것은 내과 레벨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는 것 뿐.
그렇게 시간은 흘러 오랜만에 주말이 찾아왔다.
* * *
일요일 아침.
오프임에도 불구하고 최기석은 평소대로 논문을 읽고 아지트에서 수술 연습까지 끝마쳤다.
지난 몇 달간 꾸준히 습관을 들였던 탓일까.
이 두 가지를 아침에 끝내지 않으면 화장실에서 밑을 닦지 않은 것처럼 찜찜했다.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사복을 챙겨 입었다.
최기석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가운을 걸치지 않은 모습이 어색하기만 했다.
외출준비를 끝내고 정설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비 다 됐어?"
[응. 지금 기숙사 나가는 중이야. 앞에서 보자.]
"오케이."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방을 나섰다.
기숙사 1층 로비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정설화가 보였다.
정설화는 여름 날씨에 잘 어울리는 산뜻한 원피스를 입었다.
로비를 지나가는 남자들은 그녀를 훔쳐보기 바빴다.
"완전 예쁜데?"
"고마워. 너도 멋있어."
정설화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병원을 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오늘은 꼭.'
정설화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최기석과 지금처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싫었다.
애매한 썸도 싫고 일방적인 짝사랑도 싫었다.
더 이상 최기석과의 관계로 속을 썩었다가는 가슴이 새까맣게 타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어제 큰 결심을 했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부를 보기로.
그와 연인 관계로 발전을 하던가, 아니면 냉정하게 친구 사이로 남을 것인가를.
데이트가 끝나면 둘 중 하나의 결론은 반드시 나오리라.
"피곤하지 않아? 어제 당직이었잖아."
"괜찮아. 끄떡없어."
정설화의 씩씩한 대답에 최기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택시는 경기도에 있는 워터파크를 향해 달렸다.
이른 아침이라서 차도 막히지 않았다.
최기석은 창밖을 응시하다가 그의 어깨에 기대 자고 있는 정설화를 내려다보았다.
말로만 괜찮다고 했을 뿐.
역시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다른 인턴에게는 없는 역환단의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해도 일에 치이고 고달픈 건 마찬가지니까.
사실 그도 환자 바라기를 얻은 후에야 비로소 체력의 부담을 떨쳐 낼 수 있었다.
최기석은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내과 서적이다.
용의 눈을 사용하고 줌 인 모드를 펼치자 작은 글씨도 편하게 읽혔다.
본래 스킬은 치료를 위해 존재하지만 일상에서도 꽤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펄럭. 펄럭.
조용한 택시 안에 페이지 넘기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흘렀다.
내과에서 일정이 일주일밖에 안 남은 시점, 쉴 때 쉬더라도 자리 시간을 활용하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택시가 워터파크 입구 앞에 멈췄다.
"설화야, 다 왔어."
"흐으으음······ 벌써?"
정설화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흐트러진 모습이 은근히 귀여웠다.
"가자."
두 사람은 택시에서 내려 워터파크의 실내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주말 아침임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워터파크를 찾았다. 젊은 남녀가 낀 일행과 가족 단위 이용객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옷 갈아입고 파도풀 앞에서 보자."
"좋아."
최기석은 로커 룸으로 들어가서 수영복을 입었다.
똥배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상체가 밋밋했다.
슬쩍 옆에서 옷을 갈아입는 남자를 보니 그는 잘 그을린 구릿빛 피부에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괜히 위축이 됐다.
'신경 쓰지 말자.'
최기석은 락카를 벗어나 파도풀 앞에 섰다.
사실 아직도 놀러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모든 게 꿈이고 사실은 기숙사 침대 위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병원의 존재는 그만큼이나 그의 마음과 정신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멀리서 정설화가 달려왔다.
정설화는 몸매가 드러나는 살구빛 비키니 수영복을 입었는데 몸매가 환상적이었다.
가슴은 풍만했으며 허리는 한 손으로 안으면 쏙 들어온 것처럼 잘록했다.
한 번 보면 눈을 떼기가 힘들 정도다.
"아······ 아니. 별로."
최기석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일부러 정설화를 외면했다.
환자와 처치밖에 모르고 지낸 지가 어언 6개월.
갑작스럽게 시각적인 자극을 받자 그곳이 부풀어 오를 것 같았다.
참아야 사느니라······.
이후 두 사람은 간단하게 몸을 풀고 물로 몸을 적셨다.
"꺄아아아악."
정설화가 신나는 비명을 지르며 풀장을 뛰어다녔다.
즐거워하는 모습의 그녀를 보니 최기석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받아라!"
정설화가 두 손을 움직이며 최기석에게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최기석은 더 이상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두 손을 적당한 간격으로 벌린 후 허리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 상태에서 다시 허리를 정면으로 돌리면서 두 손으로 물을 쳐냈다.
아도겐.
두 손에서 세찬 물줄기가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