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길(5)
환자 바라기 효과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환자를 처치하고 체력이 오른다면 그의 체력은 항상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게 될 테니까.
또한 체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날카로운 집중력을 유지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즉 아이템으로 두 가지 효과를 보는 셈이다.
"갑자기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닙니다. 푹 쉬세요."
최기석은 스테이션에서 처치물품을 정리하고 다음 병실로 이동했다.
아이템의 효과를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휴게실 소파에 앉아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아한테 절이라도 올려야겠는데?"
중얼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반나절 가까이 바쁘게 병동 일을 처리했다.
그럼에도 상태 창으로 본 체력은 7을 유지했다.
평소라면 아마 5 정도에서 머물렀지만 환자 바라기와 역환단의 체력회복 상승효과로 절반 이상의 체력을 지속 중이다.
그 때문인지 머리가 멍하거나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도 없었다.
최기석은 수술을 맡게 될 훗날을 떠올려봤다.
지금 같은 단순 처치만으로도 회복량이 상당하다.
그런데 집도 시에 회복력은 얼마나 될까.
밤샘 수술에도 끄떡없는 철인 의사가 되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졌다.
지이이이잉.
가운에 넣어둔 콜폰이 떨었다.
[초 인턴 쌤! 고지만 환자 ABGA요.]
통화를 연결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강 쌤. 저 순환기내과 인턴이잖아요."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
[근데 초 인턴 쌤 다음 달에는 흉부외과로 돌아올 거죠? 그렇죠?]
"글쎄요······."
[뭐예요!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 의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벌써 잊어버렸어요? 그러면 안 돼요! 피구왕 퉁키가 세계 최고의 피구왕이 된 것처럼 초 인턴 쌤도 꿈을 이뤄야죠.]
"제 라이벌이 언제부터 피구왕 퉁키가 됐나요?"
[하여간 돌아올 거죠?]
강하나의 대답에 최기석은 일부러 침묵을 지켰다.
오랜만의 통화라 놀려 주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다음 달에 바로 복귀할 거니까."
[예스! 돌아오면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요.]
통화를 끊은 최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확실히 강하나는 분위기 메이커다.
잠깐 통화를 했을 뿐인데도 그녀의 활력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위이이이잉.
가운 속에 넣어둔 휴대폰이 떨었다.
최기석은 번호를 확인하고 뒤늦게 약속을 떠올렸다.
"네, 기자님."
[안녕하세요, 최 선생님. 지금 1층 로비에 있는데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이야기하고 나갈게요."
통화를 끊은 뒤 스테이션에 말을 해 두고 1층으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KTB 방송국의 기자 박광수다.
박광수는 과거 최기석이 아동학대 피의자를 잡아냈을 때 인연을 맺었던 기자다.
어제 슈퍼 비너스의 교통사고가 났고 그 처치를 최기석이 했다는 소식에 또 기사를 내고 싶다는 뜻을 알려 왔다.
1층으로 내려가자 KTB 방송국 사람들이 한눈에 보였다.
그들 주변으로는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최기석과 박광수가 악수를 나눴다.
"저를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한데 이게 기사로 나갈 만한 건지는 모르겠네요."
최기석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앰뷸런스를 타고 가던 중 교통사고 현장을 발견했고 필요한 처치를 했다.
의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셈이다.
만약 그 자리에 다른 의사가 있더라도 그와 같은 처치를 했으리라.
"이런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기사의 가치는 최 선생님이 아니라 제가 판단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 직감에 따르면 이건 아주 좋은 건수예요."
박광수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건의 중심에 또 최 선생님이 있었던 데다가 치료 대상이 아이돌이니까요."
"······."
"저 아이들 보이시죠?"
박광수의 검지가 정문 근처에 있는 오십여 명의 어린 학생들을 가리켰다.
학생들은 강은하의 무사 쾌유를 비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병원에서 통제를 해서 저만한 친구들이 있는 거예요. 통제가 없었으면 훨씬 더 무시무시한 숫자가 진을 치고 있었겠죠."
"하고 싶은 말씀이······."
"얼굴이 알려지는 게 그만큼 중요한다는 겁니다. 기사가 나가면 최 선생님은 적어도 슈퍼 비너스 팬들에게는 엄청난 추앙을 받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최기석은 피켓을 든 학생들을 바라보며 답했다.
예전의 최기석이라면 이번 인터뷰를 거절했을 것이다. 환자를 무사히 치료했으면 그만이지 무엇하러 또 매체에 얼굴을 들이민단 말인가.
하지만 정치력 스탯을 파악하게 된 이후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의료 외적인 부분도 신경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더군다나 박광수의 정치력은 6으로 김철우와 동급이다.
처세나 성공에 관해서는 상당한 능력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제가 봤을 때는요."
"······."
"아직 시기상조지만 최 선생님이 닥터테이너의 폭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닥터테이너요?"
"네."
박광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닥터테이너란 연예인처럼 활발하게 방송 활동을 하는 의사들을 말한다.
주로 건강 프로그램에 나와서 건강지식을 알려주고 이름을 걸고 홈쇼핑 상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지금 TV에 출연하는 의사 분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거든요. 근데 최 선생님처럼 잘생기고 젊은 사람이 적당히 경력을 쌓아서 TV에 나와 봐요. 사람들 아주 난리가 날 걸요?"
"······."
"더군다나 과거에는 아이돌을 구하고 아동학대 피해자까지 잡아낸 정의로운 의사라는 것까지 알게 되면 게임 끝이에요. 아시겠죠?"
"전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생각이 없어도 해야 하는 날이 올지 몰라요. 그리고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고요."
박광수의 달변에 최기석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막간의 대화를 끝내고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과거에 한 번 해 봤던지라 긴장하지 않고 박광수가 묻는 말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인터뷰는 30분 만에 끝났다.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뭘요. 오늘 8시 뉴스에 나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최기석은 박광수와 헤어지고 곧바로 별관 강당으로 향했다.
10분 뒤에 인턴 연수 교육이 있었다.
연수 교육은 보통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교육이기에 빠질 수가 없었다.
강당에 들어가자 제법 많은 인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녕."
최기석은 정설화의 옆자리에 앉아 인사를 건넸고 그를 발견한 정설화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얼마 전에 친절사원 뽑혔다며? 축하해."
"고마워."
최기석의 칭찬에 정설화가 얼굴을 붉혔다.
"생각해 보면 이제 받았다는 게 신기하다. 원래 나보다 네가 먼저 받았어야 되는데."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최기석이 피식 웃었다.
응급실 근무를 같이 서 봐서 알았다.
정설화는 언제나 상냥하며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그녀처럼 친절한 인턴은 아마 다섯 손가락에 꼽기도 힘들 것이다.
"위장관외과는 할 만해?"
"응. 레지 선생님들도 좋고 간호사 선생님들도 좋더라. 그런데······."
"그런데?"
"헤이야······ 아니 정명운 교수님이 조금 무서워. 수술 보조 서는데 엄청 깐깐하시더라. 퍼스트도 막 갈구고 장난 아니야."
"원래 그런 분이니까 네가 이해해."
최기석은 정명운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약자멸시라는 패시브가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정설화를 살폈다.
정설화에게서 표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정명운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이송 복귀 중에 아이돌이 교통사고 난 거 처치했다며?"
"어."
"대단하다. 다친 사람 많았다고 들었는데 다들 무사히 치료받고 있다고 하던데."
"여러 사람이 도와줬으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정설화가 말을 이었다.
"아이돌은 확실히 예쁘지?"
갑작스런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대체 정설화는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원래 아이돌은 외모가 받쳐 주는 사람들이 하는 건데 말이다.
강하나에게 여자의 속뜻 퀴즈로 한 번 당한 적이 있기에 최기석은 신중하게 답하기로 했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정설화를 살폈다.
그녀의 심장은 어두운 노랑색을 띄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요새 잘나가는 슈퍼 비너스인데? 남자 의사들은 멤버들 얼굴 한 번 보려고 난리가 났더라."
"다른 사람은 그런지 몰라도 난 아니야. 난 걔네들보다 설화가 더 예쁜 것 같은데?"
최기석의 말에 정설화의 두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졌다.
부끄러운지 그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에이. 빈말하지 마."
"빈말이면 내 손에 장을 지져."
최기석이 당당하게 나가자 정설화의 귓불까지 빨개졌다.
"있잖아······ 저번에······ 나 대신 당직 서 줬잖아."
정설화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고마워서 그러는데 나랑 오프 맞춰서 워터파크 갈래?"
"워터파크?"
"응. 아는 사람한테 입장권 얻은 게 있어서······ 우리는 휴가도 없는데다가······ 여름이기도 하고 해서······ 같이 가면 어떨까 싶은데. 네 생각은 어때?"
"좋아."
최기석은 흔쾌하게 수락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이번 주말에 하루가 완전히 빠지는 오프가 겹쳤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교육을 진행할 의사가 단상에 섰다.
지루한 교육이 시작됐고 인턴들은 의사의 눈치를 보며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 * *
시간이 흘러 오후 6시가 됐다.
병원 일과가 마무리되는 시간이지만 최기석은 바쁘게 병동과 중환자실을 오갔다.
의사에게는 의사의 일이, 간호사에게는 간호사의 일이 있지만 인턴에게는 인턴의 일이 없다.
병원 내 모든 잡일을 맡아서 해야 하기에.
다행히 환자 바라기 아이템 덕분에 체력적인 부담은 없었다.
"이제 됐습니다. 편하게 쉬세요."
최기석은 환자의 소변줄을 제거한 후 병실을 나왔다.
겸사겸사 다른 병실을 훑으며 환자들을 살피는데 한 병실 앞에서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고정된 이는 바로 유민식.
아침부터 흉통으로 고생하던 환자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유민식을 살피는 최기석의 얼굴이 점점 구겨졌다.
체력: 3/10
주 증상: 호흡곤란 / 흉통
아픈 부위: 심장
진단명: 고혈압 / 동맥경화 / 급성 대동맥 박리(상행대동맥)
현재 상태: 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타다다다닥.
폴리 세트를 정리한 후 황급하게 유민식에게 달려갔다. 상행대동맥에 박리가 생겼다면 응급수술을 받아야 한다.
"어르신. 지금 많이 아프시죠? 가슴 앞쪽부터 날개뼈 사이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지 않아요?"
"그걸 어떻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프시면 이야기를 하고 치료를 받으셔야죠."
"됐어. 이 정도야. 뭐······."
"······."
"안 그래도 아까 낮에 담당 선생님이 엑스레이 찍자고 해서 찍어 봤는데 별 이상 없었어."
유민식이 태연한 척 손을 내저었다.
'하아······ 어쩐다?'
최기석은 유민식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엑스레이로는 대동맥 박리를 확진하기 어렵다.
CT 정도는 찍어야 확실한 진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
그것은 환자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인턴인 그가 억지로 검사를 시킬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당직의에게 노티 한다고 해도 그가 최기석의 말을 들을 리는 만무했다.
[환자에게서 대동맥 박리가 의심됩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병신 소리 듣기 딱 좋았다.
환자가 많이 아파하니 CT를 찍는 게 어떠냐고 말해도 별 차이는 없다.
병원에서 인턴은 그저 시키는 일을 하는 기계일 뿐.
함부로 판단을 내리는 일은 금기시되어 있다.
최기석은 초조하게 유민식을 내려다보던 중 묘안을 떠올렸다.
그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