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길(4)
"왜 그러세요?"
"아니.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최기석은 웃으며 그림을 가운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이정아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최기석의 손길이 싫지 않은지 이정아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있었다.
"푹 쉬고 내일 또 보자."
"네."
병실을 떠나 중환자실로 갔다.
지금쯤이면 응급수술이 끝났을 것이다. 상태가 어떨지 궁금했다.
드르르륵.
"최 선생님 오셨네요."
중환자실 간호사가 최기석을 반겼다.
"아 네. T.
A 환자 상태가 궁금해서요."
"안 그래도 그 아이돌 때문에 중환자실 문이 닳아 없어질 것 같아요. 남자 인턴이랑 레지들이 용무도 없으면서 얼쩡거린다니까요."
"환자가 아이돌이라서 그런가 봐요. 하하하."
최기석은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중환자실 스태프가 봤을 때는 최기석도 그런 의사들과 바를 바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최 선생님은 봐줄게요."
"······."
"최 선생님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간호사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본 최기석은 환자를 끔찍하게 아끼는 의사다.
인턴 일이 바쁠 텐데도 틈이 나면 자기 과 환자를 보러 내려왔다.
심지어 환자에게 처치가 떨어진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최기석은 아이돌을 보러 온 게 아니라 환자를 보러 왔음을 믿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평소에 잘하시니까 그런 거죠."
최기석은 간호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중환자실 끝에 있는 격리실로 이동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곤히 잠들어 있는 강은하가 보였다.
"휴우······."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상태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횡경막 수술은 무사히 잘 끝났고 다른 상처도 잘 치료 중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휴식과 몸 관리뿐이다.
최기석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강은하를 내려다보았다.
강은하와 인연을 맺은 것은 레지 1년 때다.
끔찍한 백일 당직을 서는 도중 강은하가 119에 실려 왔다.
병명은 급성 심근경색.
연습생 시절일 때라 못 먹고 연습만 하다가 과로로 심근경색이 온 것이다.
"선생님 감사해요. 그리고 저 데뷔하면 꼭 선생님 찾아뵐 게요."
퇴원하던 날 그녀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최기석이 중얼거렸다.
정해진일 때 인연을 맺고 최기석이 되어서도 그녀와 다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녀와 뗄 수 없는 무언가로 연결된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최기석은 강은하를 살핀 후 교통사고를 낸 피의자의 상태도 확인했다. 그는 강은하보다 상태가 좋아서 먼저 일반 병실로 들어갈 것 같았다.
그가 빨리 회복되기를, 강은하 쪽과 일을 잘 마무리하기를 기원하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중환자실 대기실에 있던 걸 그룹 멤버들과 한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은하가 살았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거의 혼자서 다 처치를 하셨다고 하던데."
"아닙니다. 앰뷸런스 운전하던 분도 있었고 주변분들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진짜 치료를 했던 건 선생님밖에 없었잖아요."
잠자코 있던 한이슬이 최기석을 치켜세웠다.
"다른 분들은 괜찮으시죠?"
"괜찮습니다."
"네. 은하에 비하면······."
최기석의 질문에 멤버들이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들이 입은 상처는 주로 타박상과 크지 않은 열상이었다. 응급실에 간단한 처치를 받는 것으로 해결될 수준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애들을 살려 주신 선생님께 뭘 해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생명의 은인이 바로 앞에 있는데 감사 인사만 하고 입을 싹 닫을 수는 없죠."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최기석이 설명을 이었다.
의사가 환자나 보호자에게 무언가를 받으면 촌지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병원 규정상 이는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너무 빡빡하네요. 고마워서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 건데."
남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퇴원한 다음에는 상관없겠죠?"
"······."
"일단 이거라도 받으세요."
"이건······."
"제 명함입니다."
최기석은 남자가 내민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A.
P 엔터테인먼트 실장 임철호.]
"3대 기획사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힘을 쓸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혹시라도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참고로 우리 소속사 가수의 콘서트 티켓 정도는 앞으로 무상으로 드릴 수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명함을 받고 인사를 나눈 뒤 중환자실을 떠났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논문 읽기, 수술 연습의 스케줄을 마치고 병동 처치마저 끝냈다.
이어서 회의 준비를 마치고 내과 공부에 들어갔다.
내과 생활은 이제 일주일가량 남았다.
그 안에 내과 레벨을 한 단계 올리지 못하면 임무는 실패, 특별한 아이템도 얻을 수 없다.
드르르륵.
머리에 열이 날 정도로 공부하는데 누군가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바로 김철우다.
"너도 참 독하다."
김철우가 최기석을 보며 혀를 찼다.
이제 아침 6시가 됐을 뿐이다.
그런데 최기석은 할 일을 전부 끝내 놓고 내과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맡은 일만 처리하기도 벅찬 게 인턴이거늘, 최기석은 확실히 보통 인턴과는 달랐다.
"병동 일이 바빠서 최대한 자투리 시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도 일찍 나오셨네요."
"논문 발표 할 게 있어서."
김철우가 자리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최기석은 공부를 멈추고 김철우의 정치력을 확인해 보았다.
김철우의 정치력은 6.
정치력을 얻고서 많은 동료들의 정치력을 파악해 봤지만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는 김철우의 수치가 가장 높았다.
회의할 때에 발언권이나, 그밖에도 다른 사람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꽤 조심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 이유가 있었다.
"교수님이 주신 심전도 노트 잘 보고 있습니다. 덕분에 판독 능력이 쑥쑥 올라가는 기분입니다."
"아부냐?"
"아니요. 진심입니다."
최기석의 대답에 김철우가 최기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에 은근히 좋아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그건 네 복이지. 너 말고 다른 레지한테 보여 준 적 있는데 걔는 영 소화를 못하더라."
"그 레지 분이 나빴네요."
"그렇지?"
김철우가 껄껄 웃었다.
지이이잉.
휴대폰이 울리자 김철우가 회의실을 나가서 전화를 받고 다시 돌아왔다.
"급한 용무라도······.
"아니. 딸 전화야."
"실례가 아니면 따님 사진 좀 볼 수 있을까요?"
"안 될 거 없지."
최기석은 김철우가 내민 휴대폰을 응시했다.
배경화면이 가족사진인데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두 여자 아이가 V자를 그리고 있었다.
"따님이 완전 미녀네요. 연예인 해도 될 것 같아요."
"오버하지 마."
"진짜입니다. 지금도 웬만한 여자 아이돌보다 예쁜데요?"
"하긴······ 그렇지?"
김철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아무리 순환기내과 조교수라도 딸 바보임을 숨길 수는 없었다.
최기석은 김철우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띠링!
[김철우와 새로운 라포를 형성하였습니다.]
NEW [김철우(의료인): 1단계 - 친밀]
'차근차근 만들어 보자.'
최기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력 스탯이 생긴 후 오랫동안 고민했다.
앞으로 이 스탯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를 놓고서 말이다.
그의 목표는 예전이나 앞으로나 환자의 완치를 돕는 것.
따라서 출세를 목표로 하는 정치력에 목숨을 걸지는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정치력이 높은 사람들과 조금씩 인맥을 맺어갈 생각이다.
그러면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시간이 흘러 선생들이 하나둘 회의실로 들어왔다.
이윽고 시작된 회의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최기석은 내과 공부를 하고 있었던 만큼 주치의들이 환자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약을 쓰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최 선생. 끝나고 잠깐 나 좀 봐요."
회의가 끝나자 박정환 교수가 최기석을 따로 불렀다.
텅 빈 회의에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순환기내과에서 개인 호출을 받는 것은 처음이라 최기석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순환기내과 일은 할 만해요?"
박정환이 먼저 운을 뗐다.
"네. 배울 게 많아서 잘 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간호사나 레지들 사이에서 최 선생 평이 아주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어제 일을 지황이한테 들었는데······."
박정환이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바쁘다 보니까 약 처방을 잘못 내린 것 같아요. 베라파밀을 울혈성 심부전증 환자에게 주다니."
"아. 네."
최기석 그제야 박정환이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깨달았다.
"다행히 최 선생 덕분에 일이 잘 풀렸어요."
"아닙니다. 제가 뭘······.
"혹시 투약 오류가 있었던 걸 최 선생 말고 또 아는 사람이 있나요?"
"남 선생하고 이 간호사 외에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됐어요. 좋게 좋게 넘어갑시다. 알았죠?"
박정환이 최기석의 어깨에 손을 얹은 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회의실을 나갔다.
입단속을 시키려고 따로 불러냈던 건가.
박정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으라차차차."
최기석은 기지개를 피며 일과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처치는 ABGA.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서 병실을 찾았다.
"왔어?"
유민식 환자가 미소를 지으며 최기석을 반겼다.
최기석이 평소 처치를 잘했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보통 환자들은 의료진의 처치를 달가워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네. 몸은 좀 어떠세요?"
"멀쩡해."
유민식이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가슴 아프지 않으세요?"
"······."
최기석의 지적에 유민식이 몸을 들썩거렸다. 그가 귀신같이 본인의 흉통을 맞췄기 때문이다.
"가슴이야 원래부터 아팠지. 그래서 입원한 거잖아."
"근데 어제는 안 아프셨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유민식이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고 최기석은 그런 유민식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유민식은 어제 없었던 흉통을 앓고 있었다.
"아프면 빨리빨리 말씀해 주셔야 돼요. 계속 참으면 병난다는 거 아시죠?"
"알아."
"일단 담당 선생님께 이야기해 놓을 게요."
최기석은 알렌 테스트를 하고 동맥혈 채혈을 준비했다.
푸우우욱!
바늘이 피부를 꿰뚫었다.
[뱀파이어 칭호 효과가 발동합니다. 채혈에 100퍼센트 성공하고 환자의 통증이 50퍼센트 감소합니다.]
최기석은 ABGA를 성공시키고 알콜솜으로 바늘 꽂은 자리를 꾹 눌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환자 바라기의 활력 효과 발동, 처치 난이도에 비례해서 체력을 회복합니다.]
휘이이잉.
최기석만 볼 수 있는 하얀빛이 최기석을 감쌌다.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과 더불어 전신에 기운이 충만해지는 기분.
'미친······.'
상태창을 확인한 최기석이 혀를 찼다.
아니나 다를까 체력 수치가 일부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