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57화 (57/407)

또 다른 길(3)

강은하.

과거 최기석이 레지던트가 되어 처음으로 맡았던 환자.

아이돌의 꿈을 이룬 그녀가 지금 코앞에 있었다.

그것도 그의 도움을 기다리며.

'병신. 정신 차려!'

최기석은 벌떡 일어나서 강은하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2/10

주 증상: 가슴 통증 / 무호흡 / 출혈

아픈 부위: 저혈량성 쇼크 / 두부 출혈 / 복부 출혈 / 목 타박상 / 흉골골절 / 횡경막파열

진단명: 대퇴 관통상 / 경추 골절 / 머리 열상

현재 상태: 응급(near death)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최기석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강은하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

성한 곳을 찾기 힘들다.

과거에도 이런 복잡한 T.

A 환자에게 처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은 예전과 달라진 스킬들을 믿는 수밖에······.

최기석은 강은하의 안전벨트를 풀어 조심스럽게 사고 파편이 없는 곳에 눕혔다.

"준하 씨! 여기 거즈하고 붕대, 시저, 앰부백!"

최기석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그러자 심준하가 구급함과 경추 고정기를 가지고 번개처럼 다가왔다.

불행하게 아직까지 119는 도착하지 않았다.

"여기 좀 잡아 주세요."

심준하가 강은하의 길게 찢어진 머리 상처에 거즈를 덧대는 사이, 최기석은 두 팔로 붕대를 잡아 어깨너비로 벌렸다.

그리고 사선으로 붕대가 상처를 교차하게 만든 뒤 턱과 목을 부드럽게 돌아 올리며 이마에서 붕대를 마감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처치 정확도 젬 덕분에 탄탄하게 잘 감았다.

"지혈되게 손가락으로 머리 윗부분을 눌러 주세요."

"네!"

심준하가 강은하의 상처 윗부분을 꾹 눌렀다.

최기석은 곧바로 경추 고정기를 이용해 그녀의 목을 고정시켰다.

이윽고 피에 흠뻑 젖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서걱. 서걱. 서걱.

가위로 과감하게 강은하의 옷을 반으로 갈라 완전히 벗겼다.

왼쪽 옆구리에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심각한 출혈이 있었다. 이 상처로 인해 저혈량성 쇼크가 온 듯했다.

최기석은 식염수로 상처를 씻어 낸 뒤 거즈를 덧대고 다시 붕대를 감았다.

이후 가운을 벗어서 그녀의 상체를 감싸 주었다.

"CPR은 안 해도 되나요?"

심준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흉골골절이 있어서 흉부압박은 안 돼요. 일단 호흡만!"

최기석은 기도를 확보하고 앰부백을 짜기 시작했다.

유리에 찔린 상처가 벌어지면서 앰부백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그럼에도 최기석은 앰부백을 짜는 데만 집중했다.

얼굴에서 비 오듯이 내리는 땀은, 앰부백을 짤 때마다 느껴지는 시큰한 통증은 아무 것도 아니다.

강은하를 살릴 수만 있다면.

"아······."

신음 소리와 함께 후방 좌석에서 한 여성이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동승하던 여자인데 화려한 의상을 보면 역시 걸 그룹 멤버인 것 같았다.

"으······ 은하야!"

여자가 날선 비명을 질렀다.

"치······ 침착하세요."

심준하가 여자를 최대한 안심시켰다.

이윽고 부상이 덜한 멤버들이 하나둘 밴을 나왔다.

그들은 초죽음 상태의 강은하를 보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기요. 여기 와서 이것 좀 짜 주세요."

"네?"

"빨리요!"

최기석의 외침에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한 운전자가 강은하 곁에 쪼그려 앉아 앰부백을 짜기 시작했다.

그사이 최기석은 다급하게 밴의 운전석으로 갔다.

강은하에게는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응급처치를 했다.

이제 다른 환자를 봐야 했다.

쿵!

운전석 문을 벌컥 열고 환자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다행히 그는 강은하만큼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았다.

최기석은 남자의 출혈 부위에 붕대를 감아 주고 대퇴부에 부목을 대는 것으로 처치를 마쳤다.

위이이이잉.

사이렌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응급실 근무를 할 때는 끔찍했던 소리가 지금은 천사의 노랫소리 같았다.

타다다다닥.

119 대원들이 스트레쳐카를 끌고 현장으로 다가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한 대원이 아수라장이 된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신호 위반과 과속으로 교통사고가 났어요. 위급한 환자들의 응급처치는 해 뒀습니다. 이 중 세 명은 당장 의진대병원으로 후송해야 해요."

최기석의 속사포 같은 설명에 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이이이이잉.

구급차와 앰뷸런스가 환자를 나눠서 실고 급하게 도로를 질주했다.

'제발.'

최기석은 강은하의 앰부백을 짜면서 기도했다.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이 부디 눈물과 애도로 끝나지 않기를.

"도착했어요!"

구급차와 앰뷸런스가 의진대병원으로 들어갔다.

심준하가 미리 응급실에 연락한 덕분에 의료진들이 바깥에서 환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바이탈 확인하고 검사부터 해."

응급의학과 레지 3년 차 고대호가 지시를 내렸다.

이에 인턴과 다른 스태프들이 환자들을 데리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복귀가 화려한데?"

고대호가 최기석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응급실로 들어가려는 최기석을 막았다.

"저도 치료를 돕고 싶습니다."

"나머지는 우리한테 맡겨. 너 있다고 죽을 환자가 살아나는 거 아니다."

"그건 그렇지만······."

"적당히 개기라고."

고대호는 나지막하게 말하고 최기석을 응시했다.

그의 앞머리는 땀에 절어 미역줄기처럼 늘어졌다. 호흡은 거칠었으며 축 늘어트린 손이 피로 물들었다.

그 모습만 봐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알 수 있었다.

"들어와."

"정말요?"

"새끼. 말하자마자 기어오르네. 누가 너보고 응급실 일 도우래?"

"······."

"드레싱이나 받고 가."

고대호가 가운을 휘날리며 응급실로 들어갔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내과 병동으로 복귀해 밀린 일을 처리했다.

응급실에서 드레싱을 하고 붕대를 감아 주었지만 처치하기가 불편해서 붕대를 풀고 손바닥에 반창고만 붙였다.

두 시간 가까이 병동과 중환자실을 오가다가 간신히 여유시간이 생겼다.

"휴우······."

최기석은 휴게실 소파에 등을 기댔다.

아직까지 정신이 없었다.

처치가 바빴던 것은 물론이요 교통사고 환자들의 경과도 걱정이 되었기에.

'무사해야할 텐데.'

문득 바라본 천장에 강은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은하.

과거 정해진이었을 때 처음으로 담당을 맡았던 환자.

연예인이 되겠다는 당찬 포부를 이루고 아이돌로 데뷔했던 그녀를 설마 교통사고 현장에서 만날 줄이야.

"야. 너 또 한 건 했더라."

양진석이 휴게실로 들어와 최기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가?"

"환자 이송하고 복귀하는 길에 T.

A 환자 데리고 왔다며? 넌 정말 전설의 환타인 것 같아."

"몰라."

최기석은 탁자에 놓인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환자가 요새 잘나가는 아이돌인 건 알지?"

"알아. 슈퍼 비너스잖아."

"오올~ 네가 아이돌도 다 알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혹시 응급처치 끝내고 검색해 봤냐?"

"원래 알았어."

최기석은 담담하게 말했다.

강은하가 데뷔한 그룹은 과거 환자로 지냈을 때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너 아이돌하고 사귀는 거 아니냐?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면서 막 이렇게 저렇게······."

"헛소리하지 마."

"농담이야, 농담."

지이이이잉.

대화를 나누는 도중 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병동 콜이다.

[쌤. 권태형 환자 폴리 꽂아야 돼요.]

"네. 갑니다."

최기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양진석이 먼저 일어나 최기석을 말렸다.

"넌 좀 쉬어. 내가 갈 테니까. 나 어차피 오후에는 어시 없어."

"고맙다."

"알면 됐어."

양진석이 자리를 떠난 후 최기석은 다시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상태창을 확인했다.

[특수 임무, 교통사고 환자를 구하라(3/3)를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신규 스탯, 정치력이 개방되었습니다.]

"정치력이라······."

최기석은 턱을 쓸어내리며 본인에게 의료모드를 사용해 보았다.

라포창 아래에 정치력 스탯이 반짝거렸다.

NEW 정치력: 2

[정치력: 한 의료인이 권력을 잡아 본인의 뜻대로 병원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이 항목에는 인맥, 권력욕, 처세술 등이 포함됩니다.]

신규 스탯이라서 그런지 하단부에 친절하게 설명이 붙었다.

"으음······."

그의 정치력 수준은 상당히 낮았다.

스탯 최대치는 보통 10이니까 거의 바닥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최기석이 바라는 것은 출세도 명예도 성공도 아니고 그저 환자가 건강하게 퇴원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정치력이 낮은 게 아닐까 싶었다.

최기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흉부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새로운 스탯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흉부외과 스테이션을 지나쳐 병동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민주혁이 다가왔다.

"야, 오랜만이다."

민주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T.

A 환자 건, 벌써 소문이 파다하던데? 넌 내과에서도 전적이 화려하다?"

"제가 원래 그렇죠, 뭐."

최기석은 머쓱하게 웃으며 민주혁의 정치력을 살폈다.

줄타기 스킬과의 연계 때문인지 정치력이 5로 꽤 높은 편이다.

따박. 따박. 따박.

구두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니 송명진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송명진의 정치력은 3으로 민주혁보다도 낮았다.

인맥이야 화려하겠지만 권력욕심이나 처세술이 부족해서 수치가 낮은 듯했다.

최기석과 같은 과라고 해야 할까.

괜히 사제지간이 아니라는 생각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최기석과 민주혁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송명진이 손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에요. 내과는 지낼 만해요?"

"네.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배울 게 많아서 놀라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혹시 날 원망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송명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최기석은 두 사람과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순환기내과로 복귀했다.

도중에 새롭게 생긴 정치력 스탯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제 치료뿐만 아니라 병원 내 정치 관계에 뛰어들어 수치를 올려야 할까?

아니면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가야 할까?

일단 판단을 보류하고 이정아가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이정아는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여기가 좀 묵직하기는 하지만."

이정아는 인공심박동기가 삽입 된 오른쪽 쇄골 부위에 손을 얹었다.

최기석은 위로를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그림 안 그려?"

"작업이 막 끝나서 좀 쉬려고요."

"뭘 그리고 있었는지 끝까지 안 보여 줄 거야?"

최기석의 말에 이정아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가 옆에 놓인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서 내밀었다.

"아······."

노트를 펼쳐본 최기석은 깜짝 놀랐다.

노트 한 쪽에 그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그는 청진기로 환자를 청진하고 있었다.

더불어 환자의 얼굴과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는데, 그림임에도 서로 따스한 정을 나누고 있음이 단번에 느껴졌다.

"이야. 잘 그렸다. 화가라고 해도 믿겠는데?"

"저도 알아요."

이정아가 최기석에게 노트를 건네받은 뒤 조심스럽게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를 찢었다.

"이거 선물로 드릴 게요. 버리지 말고 잘 가지고 있어요."

"······."

"저 다시 그림 그릴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나중에 유명해지면 그때 비싼 값에 파세요."

"이걸 왜 팔아? 가보로 둬야지."

최기석의 말에 이정아가 빙긋 웃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유니크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NEW [환자 바라기]

- 언제나 환자를 바라보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항상 힘이 납니다.

- 아이템 효과 활력이 발동됩니다.

- 활력: 환자에게 처치하는 경우, 수술 보조를 서는 경우, 집도하는 경우 일정량의 체력을 회복합니다. 해당 수술이 고난도일수록 체력회복량이 늘어납니다.

- 다른 유사한 효과와 중복되어 적용됩니다.

최기석은 멍하니 아이템을 응시했다.

칼라일에 이은 두 번째 아이템.

이것도 능력이 만만치 않다.

처치를 할 경우 체력이 회복된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효과다.

한 가지 더 눈에 들어오는 점.

아이템의 효과가 다른 유사 효과와 중복되어 적용된다는 점이다.

즉 역환단을 통한 체력회복 상승효과와 환자 바라기 효과를 동시에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의사가 아니라 좀비가 되겠네.'

최기석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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