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길(2)
중환자실을 나온 최기석은 병동으로 올라가 각종 처치에 나섰다.
인턴에게 주말은 없는 법.
오늘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최기석은 병실 환자의 폴리를 제거한 후 맞은편에 있는 나철범을 응시했다.
나철범은 오늘도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었다.
"왜? 내가 담배라도 폈을까 봐?"
눈이 마주치자 나철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닙니다."
"인턴 선생한테 걸린 다음부터 한 개피도 안 폈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 볼게."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최기석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병실을 나오던 중 반대편에서 카트를 밀고 오는 이지혜 간호사와 마주쳤다.
카트 위에 약함과 물통이 놓인 것을 보면 환자에게 약을 챙겨 주려는 모양이다.
"선생님. 저 약 좀 봐도 돼요?"
"네. 그러세요."
이지혜는 별말 없이 그 자리에 멈췄고 최기석은 천천히 약함을 훑었다.
내과 공부를 시작한 후부터 약제에 괜히 더 눈이 갔다.
외과의들에게 있어서 메스에 필적하는 것이 내과의에게는 약물이니까 말이다.
"이건 못 보던 거네요?"
최기석은 검지로 약 봉투 하나를 가리켰다.
봉투 안에는 보랏빛을 띤 알약이 들어 있었다.
내과 매뉴얼을 공부했고 교수들이 자주 처방하는 약제도 따로 익혀 두었기에 할 수 있는 지적이다.
"맞아요. 저도 오랜만에 보는데. 남궁철 환자에게 들어가는 베라파밀이에요. 혹시 베라파밀이 무슨 약인지 아세요?"
"혈관 확장 역할을 하는 칼슘차단제잖아요."
"잘 아시네요?"
이지혜의 눈썹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수고하세요."
최기석은 이지혜에게 인사를 하고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동시에 복습하는 느낌으로 베라파밀의 용법을 다시 상기시켜 보았다.
'뭐지? 이 찝찝한 기분은?'
혹시나 해서 스테이션의 빈자리에 앉았다.
딸칵! 딸칵!
KMRE에서 베라파밀을 검색하자 약의 용법에 대해 나왔다.
가장 먼저 눈이 간 것은 금기 사항이다.
금기 사항을 전부 확인한 최기석은 그대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복도 끝에 있는 병실로 가자 이지혜가 남궁철에게 약을 주려고 하고 있었다.
체력: 4/10
주 증상: 호흡곤란 / 흉통 / 피로
아픈 부위: 심장
진단명: 협심증 / 중증 울혈성 심부전증
현재 상태: 비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고혈압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순간 아차 싶었다.
드르르륵.
"이 선생님!"
최기석은 서둘러 병실로 들어갔다.
"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나오세요."
"환자분 약 드리고 나서요."
"급한 이야기예요. 빨리요."
이지혜를 반강제로 병실 밖으로 끌고 나오자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쌀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그러는데요?"
"남궁철 환자 약. 잘못 들어갔어요."
최기석이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다른 약은 괜찮은데 베라파밀이 문제에요. 베라파밀의 금기 사항 중 하나가 중증 울혈성 심부전증 환자에게 약을 투여하는 거예요."
"진짜요? 이거 박정환 교수님이 내린 오더라고 알고 있는데?"
"바빠서 환자를 제대로 확인 못 하셨나 보죠. 일단 약 주지 말고 기다려 봐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맞은편에서 레지 1년 차인 남지황이 걸어오고 있었다.
남궁철의 주치의는 박정환이고 담당의는 남지황이다.
마침 잘됐다.
"선배. 저 드릴 말씀 있어요."
최기석은 남지황에게 남궁철 환자와 베라파밀 정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남지황의 얼굴이 점점 새파래졌다.
어제 당직이 있었던 데다가 할 일이 밀려서 박 교수의 오더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우와. 좆 될 뻔했네. 야. 잘했다."
남지황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최기석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너 아니었으면 오늘 피바람이 불었을 거야."
"운이 좋았죠, 뭐."
"이건 운이 아니라 실력이지. 세상에 어떤 인턴이 투약 오류를 잡아내냐?"
남지황이 말을 이었다.
"내과 공부한다고 책 추천해 달라고 하더니. 빡세게 보고 있나 본데?"
"그럼요."
"베라파밀 건은 내가 교수님께 이야기할 테니까. 넌 볼일 봐."
"네."
최기석은 대화를 마무리 짓고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문득 자랑스러웠다.
[확실해? 자신 있어? 네 약에 환자의 목숨이 달렸어. 메스 들고 설치는 것만 위험한 게 아니란 말이지.]
김철우가 한 말에 따르며 그는 방금 막 환자의 목숨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이이잉.
시원하게 세수하고 화장실을 나서는데 콜폰이 울렸다.
[나 경혜. 지금 응급실로 내려와 봐.]
"바로 가겠습니다."
최기석은 가운을 휘날리며 응급실로 달려갔다.
순환기내과에서 일하면서 응급실에 오라는 콜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응급실로 내려가자 노인 환자가 베드에 걸터앉았고 그 앞에 레지 2년 차 강경혜가 서 있었다.
"왔어?"
"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암. 생겼지."
강경혜가 최기석을 끌고 응급실 구석으로 갔다.
"너 땡잡았다."
"땡이요?"
"그것도 장땡이야."
강경혜가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방금 막 응급실에서 협심증 환자를 한 명 받았다.
본래라면 내과에 입원시켜야 하지만 병동이 꽉 차서 환자를 받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최기석이 협력병원으로 이송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천에 있는 병원인데 그쪽하고는 미리 다 이야기해 놨어. 이송 끝내고 두세 시간 정도 푹 쉬고 와. 맛있는 것도 사 먹고."
"······."
"이건 니트로글리세린. 환자 상태 봐서 먹여."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멀어지는 강경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환자에게 다가갔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결과 환자는 응급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환자분. 보호자분. 지금 다른 병원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아, 네. 엄마, 가요."
최기석과 보호자가 환자를 부축해서 앰뷸런스 뒤편에 눕혔다.
이윽고 앰뷸런스가 병원을 떠났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네.'
최기석은 환자를 살피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은 당장 비를 뿌릴 것처럼 새카맣게 물들었으며 반쯤 열어 둔 창틈으로 우수수 바람이 쏟아졌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각종 건물들의 모습들이 그에게는 별세계처럼 느껴졌다.
비록 이송이라고 해도 이게 얼마 만의 외출인가.
쏴아아아아아.
먹구름이 기어이 장대비를 쏟아 냈다.
최기석은 창을 닫고 환자에게 집중했다.
환자를 살필 때는 항상 최악의 상태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더군다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문제가 생기면 100퍼센트 그의 책임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앰뷸런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최기석은 협력병원에 환자를 인계한 후 홀가분하게 병원을 나왔다.
병원 지붕 아래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기분이 의외로 좋았다.
"식사 안 하셨죠?"
"네."
"그럼 순대국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최기석은 이송팀 직원인 심준하와 근처 순대국집으로 갔다.
"토종 순대 중짜리하고 순대국 두 개 어때요?"
"좋죠."
"이모. 여기 주문이요."
최기석은 주문을 하는 동안 심준하가 세팅을 끝냈다.
"원래 이런 날에는 소주도 한잔해 줘야 하는데. 그렇죠?"
"저도 파전에 막걸리가 땡기네요."
최기석이 가게 바깥을 응시하며 말했다.
환자 이송이 끝나면서 긴장감이 탁 풀렸다.
오늘 하루는 병원에 돌아가지 않고 푹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턴 일. 힘드시죠?"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인턴분들은 특히 더 힘들잖아요. 얼마 전 응급실 근무하던 인턴분은 뛰쳐나갔던데."
심준하의 말에 최기석은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그래도 오늘은 비도 오니까 별일 없겠죠."
"유비무환 말하는 거죠? 하긴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비 오는 날 정도는 잠잠해야죠."
최기석이 화제를 돌리자 심준하가 맞장구를 쳤다.
잠시 후 직원이 음식을 상에 펼쳐 놓았다.
최기석은 오랜만에 먹는 순대국과 순대를 게 눈 감추듯이 해치웠다.
최근에 먹은 어떤 야식보다도 순대국이 더 맛있었다.
든든한 한 끼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오랜만에 느꼈다.
"이대로 들어가기는 아쉽네요. 목욕탕에서 한 시간 정도만 쉬고 갈까요?"
"선생님이 뭘 좀 아시네."
최기석의 제안에 심준하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식사를 끝낸 후 두 사람은 목욕탕을 찾았다.
"후아······ 살 것 같다."
샤워를 하고 뜨거운 욕탕에 몸을 누이자 전신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최기석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젖었다.
앞으로 흉부외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
조지환과 장혁필은 무슨 꿍꿍이 속이며 송명진은 메이죠 병원의 스카우트를 떨치고 병원에 남을 것인지 등등.
텅 비었던 머리가 금세 갖가지 생각들로 가득 찼다.
최기석은 휘휘 머리를 저으며 잡생각들을 떨쳤다. 언제 올지 모르는 이 순간을 그저 즐기기로 했다.
목욕을 끝낸 후 두 사람은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비는 그쳤다.
기상이 안 좋아서인지 도로 위에 차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대략 10분이 남았다.
"저 새끼 봐라?"
심준하의 눈썹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승용차 한 대가 갈지자를 그리며 앰뷸런스를 추월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차로의 빨간 신호를 무시하고 무시무시하게 달려 나갔다.
"운전 참 좆같이······."
심준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쿵!
승용차가 교차로를 지나가는 검은색 밴의 옆을 그대로 받아 버린 것이다.
밴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인도 쪽으로 날아갔으며 승용차도 덜컹거리다가 그 자리에 멈췄다.
두 사람은 한동안 멍하니 흉물스럽게 찌그러진 두 차량을 바라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대형 사고가 벌어졌다.
띠링!
[특수 임무, 교통사고 환자를 구하라(0/3)
알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위험 구역 표시해 주시고 119에 연락하세요."
최기석은 차에서 내린 후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승용차로 다가갔다.
쿵!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고 등줄기에서 오한이 일어났지만 서서히 가라앉았다.
얼어붙은 심장 패시브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최기석은 승용차 운전자를 확인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체력: 3/10
주 증상: 출혈 / 목 통증
아픈 부위: 다리 / 목 / 머리
진단명: 대퇴 관통상 / 경추 골절 / 머리 열상
현재 상태: 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살려야 한다 스킬을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처치 능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각성 T.
A 처치 버프를 발동합니다. 골절과 출혈을 비롯한 외상의 처치 능력이 급상승합니다.]
휘이이이잉.
스킬을 사용하자 온몸에서 충만한 기운이 샘솟았다.
최기석은 합류한 심준하와 함께 승용차 운전자를 조심스럽게 차에서 빼냈다. 그리고 환자를 스트레쳐카에 올린 후 처치에 들어갔다.
"샐라인. 거즈하고 붕대!"
"네!"
최기석은 생리식염수를 받아 대퇴 관통상이 있는 부분을 세척했다.
이후 상처 부위에 거즈를 대고 붕대로 철심이 박힌 부분을 단단하게 감았다.
이물질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이것이 움직이면서 주변 혈관이나 근육이 다치게 만들 수 있었다.
최기석은 환자의 찢어진 이마에도 붕대를 감았다.
더불어 앰뷸런스 안에 있던 경추 고정기로 환자의 목을 고정시켰다.
그가 할 수 있는 응급처치는 다한 셈이다.
"무슨 일이에요?"
몇몇 운전자들이 차에서 내려서 관심을 보였다.
"보조석에 있는 환자 좀 빼 주세요. 준하 씨, 경추 고정기 쓸 줄 알죠?"
"네."
"보조석에 있는 환자는 일단 고정기만 써요."
최기석은 황급하게 밴을 향해 달려갔다.
가장 먼저 살핀 곳은 밴의 조수석이다.
승용차가 정통으로 받았기에 조수석에 탄 사람이 가장 많이 다쳤으리라.
"아. 씨발!"
용을 썼지만 구겨진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폭군의 강림 스킬을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근력과 민첩성이 상승합니다.]
스킬을 도움을 받아 있는 힘껏 문을 잡아당겼다.
덜컹!
문이 열림과 동시에 최기석은 뒤로 훌러덩 넘어졌다.
유리 파편들이 따갑게 등과 손바닥을 찔렀지만 아파할 틈도 없었다.
"아······."
최기석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조수석에 피를 흘리는 낯익은 여성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