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6)
'아······.'
김철우의 대답에 속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최기석은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낚인 것은 본인의 책임이다.
지식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면 끝까지 밀어붙었을 테니까.
내과 지식을 물어본 후 김철우는 줄곧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중 작업을 멈추고 최기석을 힐끔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최근 흉부외과 쪽에서 심전도 판독을 부탁하는 횟수가 확 줄었다.
본래 흉부외과가 심전도를 잘 보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그래도 빈도가 너무 줄었다.
순환기내과가 흉부외과보다 앞서 나가는 것 중 한 가지.
그게 바로 심전도 판독력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까 네가 픽스턴 하고 나서 흉부외과에서 심전도 판독이 별로 안 오네?"
"웬만한 건 제가 직접 판독하고 있습니다."
"네가?"
김철우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인턴이 심전도 판독이라니,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그럼 이거 한 번 판독해 봐."
김철우는 과거 복사했던 심전도 검사지를 최기석에게 던졌다.
최기석은 무심하게 검사지를 훑었다.
"좌심방 확장에 심방세동······ 하벽 전극에서 Q파가 나타난 걸 보면 승모판 폐쇄부전증을 의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기석은 똑 부러지게 대답하고 김철우를 응시했다.
김철우는 얼굴을 찌푸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를 단순한 인턴이라고 생각했다면 크게 한 방 먹었으리라.
"이것도."
김철우가 두 번째 검사지를 내밀었다.
최기석은 자신만만하게 판독에 나섰지만 곧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느낌이랄까.
처음 접해 보는 케이스에 답답함이 몰려왔다.
"빈맥인건 확실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이 환자는 초기흥분성 빈맥이다. V1부터 V6까지 RS파가 있는지 살펴봐."
"있습니다."
"그럼 초기흥분성 빈맥이야. 그 구간에서 RS파가 없으면 심실빈맥이고."
김철우의 구체적인 설명에 최기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교수님."
"왜?"
"혹시 EKG 판독법을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최기석은 염치 불고하고 나섰다.
심전도는 심장 검사의 시작이자 끝이다.
김철우에게 판독을 배운다면 앞으로 심전도로 고생하는 일은 없으리라.
"너 간이 제대로 부었구나. 인턴이 조교수한테 심전도를 가르쳐 달라고?"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김철우는 차갑게 대답하고 논문 자료검색에 나섰다.
그런데 최기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이상하게 집중이 안 됐다.
'진짜 별난 놈이네.'
최기석에게는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었다.
뭐랄까.
피로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버티는 보통 인턴과는 달랐다.
자기 주관과 방향이 뚜렷했으며 뭔가를 열심히 해 보려는 모습이 가상했다.
김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책장을 뒤적거렸다.
휘이이익. 탁!
낡고 두꺼운 노트 한 권이 최기석의 앞자리로 날아왔다.
"이건······."
"내가 레지 달고 공부했던 노트다. 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김철우가 한마디 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최기석은 김철우의 뒷모습을 쫒다가 다시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레어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EKG의 정석]
- 김철우의 심전도 판독력에 정수가 녹아 있는 노트.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습니다.
- 완독할 경우 심전도 판독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좋았어!"
최기석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바쁘게 처치를 마치고 휴게실에 자리 잡았다.
그의 무릎 위에는 따끈따끈하게 얻은 아이템에 놓여 있었다.
'대박이네.'
노트를 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노트에는 김철우가 복사해 놓은 심전도 결과지가 붙어 있었으며 그 아래로 세세한 판독이 달려 있었다.
판독은 그동안 최기석이 봤던 그 어떤 심전도 서적보다 섬세했다.
또한 김철우가 터득한 특수한 팁까지 존재했다.
왜 아이템이 레어인지.
이름이 심전도의 정석인지 몇 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최기석은 눈에 불을 활활 키며 노트를 읽어나갔다.
특별한 오더가 내려오지 않아서 제법 오랫동안 노트를 살필 수 있었다.
"후아아아아."
최기석은 기지개를 켜고 휴게실을 나와 흉부외과 병동으로 갔다.
비록 떠난 지 이틀밖에 안 지났지만 다들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
"초 인턴 쌤!"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강하나가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왜 순환기내과로 갔어요? 보고 싶었다고요."
"송 교수님이 제안한 것도 있고 내과 공부도 해 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안 돼요. 빨리 돌아와요."
강하나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초 인턴하고 일하다가 그냥 인턴하고 근무를 하려니까 못 견디겠어요."
"저도 동감이에요."
강하나의 말에 옆에 있던 이경혜가 맞장구를 쳤다.
설명이 이어졌다.
최기석의 빈자리에 들어온 인턴이 처치를 잘 못한다는 것이다.
어제는 ABGA를 연달아 실패하면서 환자에게 클레임을 받았고 처치 속도도 썩 빠른 편이 아니라고 했다.
"초 인턴 쌤. 흉부외과 병동이 위기에 빠졌다니까요. 쌤이 빨리 구해 주셔야 돼요."
"뭘 그렇게까지."
최기석은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터벅. 터벅.
발소리와 함께 강승기가 스테이션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바로 최기석 대신 흉부외과 병동 처치를 맡은 인턴이다. 의진대 동기였기에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그의 등장에 강하나와 이경혜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승기야."
"어. 기석아."
"처치 없으면 커피라도 한잔할까?"
최기석의 제안에 강승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휴게실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셨다.
"흉부외과는 어때?"
"힘들다, 힘들어."
강승기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특히 너 때문에."
"내가 왜?"
최기석이 놀라서 되물었다.
왜 흉부외과에서 일을 하지도 않는 자신을 걸고넘어진단 말인가.
"사람들이 자꾸 너랑 나랑 비교하잖아. 내가 너보다 못한다고 엄청 쑥덕거려."
"······."
"나도 나름 인턴 6개월 차인데······."
강승기의 투덜거림에 최기석은 할 말을 잃었다.
최기석과 비교하면 강승기의 처치는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과거 레지를 3년 차까지 했으며 각종 능력으로 무장했으니까.
"내가 픽스턴이라서 잘해 주는 거야. 네가 못하는 건 절대 아니라고."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강승기를 살피며 말했다.
확실히 강승기의 능력치는 평균 이상이다.
"외과 분위기는 좀 어때?"
"별일 없던데? 과장님하고 송 교수님하고 사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별로 싸우는 일도 없어."
"그래?"
최기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싸우지 않는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송명진이 메이요 병원으로 갈 생각을 굳혔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이이이잉.
콜폰이 울리자 최기석과 강승기가 동시에 몸을 움찔거렸다.
"내 전화네. 먼저 간다."
최기석은 콜폰을 받으며 휴게실을 나왔다.
"순환기내과 최기석입니다."
[쌤. 병동인데요. 고탁환 환자 비위관 삽입이요.]
"바로 갑니다."
최기석은 순환기 내과 병동에서 처치 도구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
고탁환은 50세의 남자 환자다.
"어르신. 담당 선생님이 처치를 내린 게 있어서요."
"필요하면 해요."
그가 비위관 삽입에 대해 설명하자 고탁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최기석은 고탁환이 침상에 앉도록 만들고 고개를 숙이도록 했다. 이후 커다란 천으로 고탁환의 몸을 덮은 후 턱밑에 곡반을 댔다.
슥슥슥.
최기석은 튜브의 길이를 측정하고 펜으로 적당한 부위에 표시를 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수술 장갑을 착용하고 튜브에 윤활유를 발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튜브를 환자의 콧속으로 집어넣었다.
"숨 크게 들이 마시세요."
최기석의 지시에 환자가 숨을 들이셨다.
턱!
손끝에 감각으로 튜브가 인두에 들어갔음이 느껴졌다.
"침 삼키시고요."
최기석은 환자가 침을 삼킬 때마다 조심스럽게 튜브를 밀어 넣었다.
튜브가 미리 표시해 놓은 곳까지 도달하자 주사기를 꽂아 소량의 공기를 주입했다.
청진기로 심와부에 포말음을 확인했다.
비위관 삽입은 성공적이다.
플라스터로 튜브를 고정시키는 것으로 처치는 깔끔하게 끝났다.
"선생님. 잘하네요. 다른 병원에 있었을 때는 억지로 쑤셔 넣어서 엄청 거북했는데."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뒷정리를 끝내고 맞은편에 있는 나철범에게 다가갔다.
"어르신은 좀 어떠세요?"
"어떠긴 뭐가 어때? 죽을 맛이지."
나철범이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말했다.
최기석은 어제 나철범이 몰래 담배 핀 것을 담당의에게 알렸다.
이후 나철범은 니코틴 패치를 붙이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편의점에서 껌을 사다가 씹는 모습이다.
"힘내세요. 이 기회에 금연하시고 더 건강해지셔야죠."
최기석은 말을 하며 격려를 사용했다.
[격려 스킬이 실패했습니다. 환자가 격려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실패 알람에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최기석은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없었기에 금연의 고통을 모른다. 다만 격려가 통하지 않는 것으로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헤아릴 뿐이다.
최기석은 비위관 처치한 것을 정리하고 병실을 돌았다.
환자를 한 번 살피고 다시 내과 공부를 할 생각이다.
드르르륵.
마지막 병실에 들어가서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들을 훑었다.
순간 최기석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시선이 고정된 이는 바로 이정아다.
이정아는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 쓴 채 자고 있었다.
'젠장!'
최기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침상으로 달려가 응급 벨을 누르고 스킬을 사용했다.
[각성 CPR을 사용합니다. 특수 버프가 30분간 지속됩니다.]
스킬을 쓴 후 곧바로 이정아에게 흉부압박을 시도했다.
퍽! 퍽! 퍽!
압박을 할 때마다 이정아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무슨 일이에요?"
"자고 있었던 거 아닌가?"
최기석의 갑작스런 CPR에 병실 환자들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이어 신재원 간호사와 전지윤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저······ 정아. 심실세동이에요."
최기석의 말에 신재원과 전지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앰부백 쓰면서 중환자실로 달려요!"
"네!"
신재원이 스트레쳐카를 끌었다. 최기석은 스트레쳐카가 멈췄을 때 흉부압박을 했으며 전지윤은 스테이션에서 가져온 앰부백을 짰다.
'정아야. 제발.'
최기석이 흘린 굵은 땀방울이 이정아의 몸 위로 떨어졌다.
* * *
내과 중환자실.
최기석은 곤히 누워 있는 이정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이정아는 자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브루가다 증후군으로 인한 수면 중 급성 심실세동을 겪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피지 않았다면 그 상태로 세상을 떠났을지 몰랐다. 그가 이정아의 이상 징후를 발견하고 제때 CPR를 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또한 이번 처치에서는 각성 CPR 버프도 단단히 한몫했다.
이정아의 자발순환 회복속도가 상당히 빨랐기 때문이다.
드르르륵.
"정아는 어때?"
순환기내과 치프가 중환자실로 들어와 물었다.
"CPR은 잘 끝났고 자발순환 상태입니다."
"다행이네. 잘했다."
치프가 최기석의 어깨를 툭 쳤다.
"너 아니었으면 우리 과 뒤집어졌을 거야."
"운이 좋았습니다."
"그건 운이 아니야. 환자에 대한 네 관심이고, 응급상황에 대처할 줄 아는 실력이지."
"정아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안 그래도 외래에 김 교수님하고 이야기 끝내고 오는 길이다. 교수님도 최대한 약물로 잡아 보려고 했는데 이번이 세 번째 실신이라서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다."
"그럼 역시······."
"그래. 달아야지."
치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페이스메이커."
제안(7) 2권 완료
최기석은 아무런 대답 없이 이정아를 내려다보았다.
페이스메이커.
다른 말로는 ICD(Implantable Cardioverter Defibrillator), 인공심박기로도 불린다.
주로 특발성 심실세동 환자에게 착용된다.
심실세동이 발생할 경우 강한 쇼크를 내보내어 환자의 심장리듬을 정상으로 돌리는 장치다.
문제는 ICD를 삽입할 경우 일상생활이 불편하다는 점이다.
정기적으로 클리닉을 방문해야 하며 ICD 전기도 갈아 줘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항상 전자기장 방해를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즉 메이스 메이커는 이정아의 생명줄인 동시에 족쇄라고도 볼 수 있었다.
"역시 다른 방법은 없는 거죠?"
"당연하지. 있으면 굳이 어린 얘한테 ICD를 달 필요가 없잖아."
치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역시 이정아에게 ICD를 삽입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모습이다.
"상태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아마 이번 주 안에 처치 들어갈 거다."
"네."
"넌 안 가?"
"저는 조금 더 정아를 보다가 돌아가겠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치프가 손을 흔들고 중환자실을 떠났다.
최기석은 가만히 이정아를 응시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잿빛 감정이 몰려왔다.
앞으로 이정아가 겪을 아픔들, 그녀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자책감이 한데 엉켰다.
"선생님. 페이스메이커가 뭐에요?"
이정아가 눈을 뜨며 물었다.
"······깨 있었구나."
"네. 두 분이 이야기할 때부터요."
"미안. 널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괜찮아요."
이정아의 눈빛은 평소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최기석은 심호흡을 하고 이정아에게 페이스메이커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정아는 침묵을 지켰다.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이 오히려 최기석을 아프게 만들었다. 시원하게 한탄이라도 해 줬으면 편하련만.
왜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걸까.
"꼭 달아야 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네요."
"미안하다. 이건 나나 다른 선생님들도 다른 도리가 없어."
"아까부터 뭐가 계속 미안해요?"
이정아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은 쓰러진 절 살려 주셨고 항상 저를 걱정해 주셨잖아요. 제가 고맙다고 해도 모자랄 판인데."
"······."
"감사해요."
이정아가 최기석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전 괜찮아요. 병원에 있으면서 생각들이 많이 정리됐어요."
"정리?"
"네."
이정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심부전증으로 돌아가신 분을 보고 생각했어요. 비록 힘들더라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고. 그리고 제가 계속 우울해하면 엄마도 힘들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는 자주 웃으려고요."
"대견하구나."
"그걸 이제 아셨어요?"
이정아와 최기석은 서로를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정아와 대화를 나누던 최기석은 다시 병동으로 향했다.
이정아를 위로하려 했지만 위로를 받은 것은 어쩌면 자신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생님! 라운딩 돌 때 대체 뭐했어요?"
스테이션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지원 간호사가 팔짱을 낀 채 신재원 간호사를 된통 혼내고 있었다.
"이정아 환자, 브루가다 증후군인 거 몰라요?"
"압니다."
"그런데 대충 보기만 하면 어떻게 해요? 제가 분명히 말했죠. 잘 쉬고 있는 건 같아도 심실세동일지 모르니까 환자를 제대로 살펴야 한다고."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하다고 끝날 문제에요? 하마터면 환자가 죽을 뻔했다고요!"
"죄송합니다."
신재원이 연신 고개를 숙였지만 이지원은 씩씩거리며 분을 풀지 못했다.
"박현재 환자, 폴리 빼면 되나요?"
"아, 네."
이지원이 최기석을 발견하고 화를 누그러트렸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들겼다.
최기석은 환자에게 처치를 한 후 신재원을 데리고 휴게실로 갔다.
"힘드시죠?"
"아니요. 다 제가 못난 탓인데요."
신재원이 힘없이 웃으며 최기석이 건넨 캔 커피를 받았다.
"제가 할 일만 생각하다 보니까 라운딩 때 환자를 제대로 못 봤어요. 다 제 잘못이죠."
"······."
"그래도 최 선생님 덕분에 살았네요. 만약 환자가 죽기라도 했더라면······."
신재원은 차마 말끝을 잇지 못했다.
최기석은 신재원의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신재원이 실수를 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를 심하게 탓할 수는 없었다.
언뜻 화려해 보이는 병원이지만 속을 파헤쳐 보면 근무 환경은 열약하기 그지없다.
의사나 간호사는 물론이요, 의료 지원부서도 매일같이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미 끝난 일이니까 훌훌 털어 버리세요. 앞으로 잘하시면 되죠."
"네."
신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간호사를 하게 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하도 많이 듣는 질문이라 이젠 이골이 나서."
신재원이 말을 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간호사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봉사활동이나 다른 활동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돕는 직업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간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일은 버틸 만한데 여자 간호사들 사이에서 버티는 게 쉽지 않네요."
"······."
"남자들이야 문제가 생겨도 술 한잔 마시면서 풀면 되는데. 여긴 그것도 안 되고. 웬만한 간호사들은 저보다 어린데 경력은 많고."
신재원의 한탄을 최기석은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러면서 그가 속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종종 질문을 던졌다.
이런 식이라도 그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주고 싶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똑같이 환자를 돌보는 스태프니까.
대화를 십 분 정도 이어가자 신재원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좀 살 것 같네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병원 들어오고 나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신 분은 선생님이 처음이에요."
신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하여간 힘내세요. 아직 병원에 들어 온 지 일 년도 안 되셨잖아요. 조금 더 경력이 쌓이면 충분히 잘 하실 거예요."
"그렇겠죠?"
"네. 게다가 힘든 군대 생활도 버텼는데 병원 일쯤이야."
"근데 솔직히 군대가 병원 일보다 훨씬 편한 것 같아요."
신재원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레지 끝나고 군의관으로 가실 거죠?"
"아니요."
"그럼 인턴 끝나고 가시게요?"
"그것도 아니에요."
최기석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병원 내 남자 인턴 중 오직 최기석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그럼······."
"자세한 건 나중이 되어 봐야 알겠지만 전 군대 안 갈지도 몰라요."
"네?"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거든요. 알아보니까 보통 4급에서 5급 정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슬슬 들어가죠."
최기석은 앞장서서 휴게실을 나왔다.
* * *
그날 저녁.
모처럼 오프를 맞았다.
최기석은 기숙사에서 내과 공부를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왼쪽에는 추천받은 책을 펼쳐 놓고 옆에 있는 노트에 내용을 받아 적었다.
이렇게 내과 공부를 할 때면 의대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최기석은 오늘 목표로 한 파트를 전부 살피고 침대에 기대앉아서 EKG 노트를 살폈다.
"대단하셔."
노트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것을 보면 김철우가 EKG를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손때 묻은 흔적들과 고뇌의 자국들.
지금의 김철우를 만든 것은 분명 땀과 노력이다.
최기석은 심전도 노트를 살피다가 상태창을 살폈다.
연계 임무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좀 더 분발하지 않으면 이번 임무는 물거품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똑! 똑! 똑!
"기석아. 나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츄리닝을 입은 김건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뭐하냐?"
"심전도 공부."
최기석은 보고 있던 EKG 노트를 김건우에게 내밀었다.
"황금 같은 오프에 기숙사에 처박혀서 공부만 하려고?"
"그게 뭐 어때서?"
"답답한 인간아. 그렇게 살지 마. 의사도 사람이야.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지."
김건우가 침대에 걸터앉아 말을 이었다.
"나랑 운동하러 가자."
"운동?"
"병원 앞에 새로 헬스장 생겼어. 이번 달에 등록하면 20퍼센트 할인해 줘. 난 저번 주에 회원 됐다."
"너나 가."
최기석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부터 운동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나가서 노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그런데 심지어 나가서 운동을 하자니······.
최기석에게는 끔찍한 제안이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거 몰라?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가도 몸에 좋아."
"나. 이식 수술 받았잖아."
"간단한 운동만 하면 되지. 그리고 너 웃기는 게 뭔지 알아? 이식 수술 받았다고 해 놓고 다른 애들보다 팔팔하게 날아다니는 건 뭔데?"
"하여간 싫어."
"가자. 응?"
김건우가 달라붙어서 징징거리는 바람에 집중력이 떨어졌다.
최기석은 한숨을 쉬며 노트를 접었다.
"날파리 같은 자식. 일단 오늘만 가 준다. 또 이러지 마?"
"알았어. 일단 가 보기나 해. 그러면 마음이 달라질 테니까."
최기석은 김건우와 기숙사를 나와 헬스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회원 가입을 한 뒤 옷을 갈아입고 트레이닝 룸으로 갔다.
현재 시간 오후 8시 30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최기석은 헬스장에 온 게 처음이라서 신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왔다, 왔어."
김건우가 배시시 웃었다.
"뭐가?"
"저기 봐."
김건우가 검지로 가리킨 곳에는 한 여성이 있었다.
여성은 막 헬스장에 들어왔는지 거울 앞에서 몸을 푸는 중이다.
김건우가 헬스장을 찾는 이유.
그게 100퍼센트 운동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야. 얼굴도 죽이고 몸매도 죽이지 않냐? 저런 여자랑 사귈 수 있으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
"그래도 안 될 걸?"
"왜? 나도 나름 대학병원 인턴인데. 꼬시려면 못 꼬실 것도 없지."
"그러니까 안 된다고. 이유를 알려 줄까?"
최기석은 김건우를 장난스럽게 건드리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반면 김건우는 그런 최기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람?
"교수님, 안녕하세요."
최기석은 고개 숙여 윤지혜에게 인사했고 윤지혜는 최기석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도 여기 다녀?"
"네. 오늘부터요. 동기랑 같이 왔습니다."
윤지혜가 김건우를 응시하자 김건우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운동 열심히 해."
"네. 교수님도."
최기석은 짧은 인사를 마치고 김건우에게 돌아갔다.
"야. 저 사람이 교수라고?"
김건우가 혀를 차며 물었다.
윤지혜의 외모는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교수라면 최소한 나이가 30대 중반은 됐다는 것 아닌가.
눈을 씻고 봐도 믿기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꿈 깨."
"길고 짧은 건 두고 봐야지."
김건우가 성큼성큼 걸어가 윤지혜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몸부터 풀자."
"오케이."
최기석은 김건우의 움직임을 따라했다.
오는 동안 대화를 나눴는데 김건우는 예전부터 헬스장에서 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트레이너가 필요 없을 정도로 운동을 빠삭하게 꿰고 있단다.
"우선 스쿼트부터 해 볼까? 내가 하는 거 잘 봐."
김건우가 먼저 스쿼트 시범을 보였다.
그는 허리를 편 상태로 무릎을 굽히며 엉덩이를 뒤로 쭉 내밀어 앉았다.
스무 번 정도를 반복하자 숨이 거칠어지고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이 정도면 할 만한 것 같은데?"
"그럼 한번 해 봐."
김건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최기석은 김건우의 자세를 떠올리며 스쿼트를 펼쳤다.
우선 두 팔을 쭉 펼치고 허리를 최대한 편다. 그 상태에서 엉덩이를 뒤로 뺀 채 천천히 앉는다.
"허리 더 펴고. 깊숙하게 앉아."
김건우의 말을 들으며 자세를 교정했다.
그렇게 열 번 정도를 하자 무릎이 시큰하게 아파왔다.
"이거 원래 무릎 운동이야?"
"네가 엉덩이를 제대로 안 빼서 그래. 제대로 하면 허벅지가 땡겨."
최기석은 재차 스쿼트를 시도했다.
"허리 펴라고. 허리!"
"엉덩이 뒤로 빼라고 했지. 똑바로 못하냐?"
김건우의 지시가 혹독했다.
도중에 윤지혜의 눈치를 보는 걸 보면 그녀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듯했다.
그렇다고 친구끼리 이렇게 핀잔을 줘야 한단 말인가.
최기석은 살짝 뿔이 났다.
"이제 복근 운동하러 가자."
악몽의 스쿼트가 끝나고 두 사람은 헬스기구 앞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윤지혜가 어깨운동을 하고 있었다.
최기석은 김건우가 시범을 보이기 전 복근 운동기구에 앉았다. 헬스장은 처음이지만 이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한 번에 감이 왔다.
"네가 먼저 하게?"
"어."
최기석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스킬을 사용했다.
[폭군의 강림을 사용하셨습니다. 대상이 존재하지 않아 제압 효과가 발휘되지 않습니다.]
[근력과 민첩성이 일시적으로 소폭으로 상승합니다.]
최기석은 씨익 웃으며 윗몸 일으키기를 시작했다.
자. 이제 쇼 타임이다.
제안(7) 2권 완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