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4)
"아······ 아닌데?"
나철범이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 옷에서 담배 냄새 나요."
"같이 나간 사람이 옆에서 담배 폈어. 난 진짜 안 폈다고."
"손 좀 확인해 볼게요."
"글쎄. 나는 아니라니까."
최기석이 다가가자 나철범이 뒷걸음질을 쳤다.
[폭군의 강림 스킬을 사용합니다.]
[환자가 의사의 수술 권유, 기타 처치 지시에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일시적으로 근력과 민첩성이 상승합니다.]
스킬을 사용하자 몸에서 붉은 오오라가 뿜어졌다.
최기석은 나철범의 손을 끌어당겨 냄새를 맡았다.
예상대로 진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최기석이 나철범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응시하자 나철범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딱 한 대 폈어. 진짜야."
"어르신. 담당 선생님이 회진 돌 때 담배 피지 말라고 했던 거 기억하시죠?"
"알긴 아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
나철범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삼십 년 동안 매일 담배를 한 갑씩 폈다. 그걸 한순간에 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르신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번 기회에 꼭 끊으셔야 해요. 니코틴에는 혈관 수축 작용이 있고 다른 독성물질에는 혈액응고를 촉진하는 작용도 있어요.
"······."
"담당 선생님께 이야기해서 니코틴 패치를 붙이든가 다른 조치를 취해 드릴 테니까 담배 꼭 끊으세요."
최기석이 쐐기를 박자 알람이 울렸다.
띠링!
[폭군의 강림, 경고 효과가 발동합니다.]
[환자에게 흡연의 위해성과 금연의 중요성과 알렸습니다. 환자의 흡연 가능성이 30퍼센트 줄어듭니다.]
"알았어. 시도는 해 볼게."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나철범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환자에게 담배는 특히 더 독약이다.
담배에 있는 각종 유해성분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간혹 몇 십 년간 담배를 피우고 건강한 사람이 있지만 그 수는 극소수다.
'하긴 나라도······.'
최기석은 환자의 입장을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몇 십 년간 담배를 폈다면 제아무리 자신이라도 금연이 힘들 것이다.
오죽하면 담배를 한 번에 끊는 독한 남자에게는 딸을 주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아다닐까.
금연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만약 끊는다고 해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시 흡연의 욕구가 생겨나니까 말이다.
참고로 의사 중에서도 환자 몰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야. 담배도 없이 이 짓을 어떻게 버텨?"
"최소한 담배 피는 시간은 행복해야 되지 않겠냐?"
흉부외과에서 흡연하는 의사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전자 담배가 생긴 이후로는 전자 담배를 피우는 의사들도 제법 늘었고 말이다.
처음부터 담배에 손을 안 댄 게 다행이다, 최기석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 * *
그날 저녁, 모든 일과가 끝났다.
당직이 아니었기에 기숙사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내과 서적을 읽었다.
약물와 효과와 부작용.
약물간의 상호효과를 비롯해서 환자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약물의 농도 등등.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머리가 아팠다.
최기석은 내과 공부를 하면서 본인이 외과체질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이미 내과 레벨을 3이나 올려놓은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정도다.
"정말 할 수 있을까?"
상태창을 확인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한 달 안에 내과 수치를 한 단계 올리라니······.
열심히 공부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확신은 서지 않았다.
책을 열심히 보다가 머리를 식힐 겸 처치 파트를 살폈다.
순환기 내과라고 해서 환자에게 종일 약물을 투여하는 것은 아니다.
전극도자 절제술, 심박동기 삽입, 관상동맥 성형술 등의 처치는 순환기내과에서 진행한다.
최기석은 보고 있던 책을 다 읽고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에 책 한 권을 두고 온 게 떠올랐다.
귀찮기는 하지만 잠깐 바람을 쐰다는 생각으로 나갔다 오리기로 했다.
최기석은 기숙사 현관에 서서 얼굴을 찌푸렸다.
쏴아아아아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본관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그냥 맞고 갔다가는 가운이 폭삭 젖을 듯했다.
"어. 기석아."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우산을 들고 있는 정설화가 보였다.
"오늘 오프야?"
"응. 너는?"
"난 당직."
정설화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산 안 가지고 왔어? 본관까지 같이 가자."
"좋지."
최기석은 정설화와 함께 기숙사를 나섰다.
열대야를 식혀주는 시원한 비가 내리고 공원 쪽에서 밤벌레가 목청 좋게 한 곡조를 뽐냈다. 비록 병원이지만 조금이나마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순환기내과로 갔다면서?"
정설화가 말문을 열었다.
"어. 송 교수님이 내과 공부도 해 두면 좋다고 해서. 호흡기내과는 어때?"
"힘들어 죽겠어."
정설화가 설명을 이었다.
"중환자도 생각보다 많고 보호자들 클레임도 많아. 처치할 것도 산더미야. 여기서 한 달만 지내도 늙을 것 같아. 순환기내과는?"
"여기도 장난 아니던데. 내가 콜폰을 받는 건지, 콜폰이 나를 잡는 건지 모르겠어."
최기석의 농담에 정설화가 쿡쿡 웃었다.
"인턴도 절반 가까이 왔는데 픽스턴 할 때는 정해 놨어?"
"응."
"어디? 마취과?"
"마취과도 좋기는 한데······ 가고 싶은 데는 따로 있어."
"그러니까 그게 어디인데?"
"몰라. 안 가르쳐 줘."
정설화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쿠르르르릉. 쏴아아아아.
천둥이 치면서 빗줄기가 거세졌다.
우산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꼭 붙어 있지 않으면 비를 쫄딱 맞게 생겼다.
'과감하게 가 볼까?'
최기석은 정설화에게 마음의 눈을 써 보고 고민했다.
정설화의 심장은 수줍은 분홍빛.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분홍색이 어떤 의미인지는 대충 감이 왔다.
"이리 와. 비 맞겠다."
최기석은 눈을 딱 감고 정설화의 어깨에 손을 얹은 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정설화가 놀란 눈으로 최기석을 올려다보았다.
"불편해?"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정설화가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얼굴과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음의 눈으로 보자 그녀의 심장이 좀 전보다 짙은 분홍빛을 띠었다.
'나쁘지 않네.'
최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살이 맞닿은 것은 아니지만 정설화와 몸이 맞닿아 있었고 고개를 살짝 내리면 정설화의 예쁜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이런 달달함을 느끼는 게 얼마 만인지······.
스킨십에 적응이 됐던 걸까.
정설화도 최기석에게 편하게 기댄 채 한 손으로 최기석의 허리를 감았다.
두 사람의 모습은 꼭 비오는 날 데이트하는 커플 같았다.
"이야. 그림 좋네. 너희 사귀냐?"
맞은편에서 김건우가 다가왔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비 오는 거 보면 모르냐? 이렇게 안 붙으면 둘 다 쫄딱 젖는다고."
"흐흠······ 아무리 봐도 수상한데······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스킨십이 나오지?"
김건우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무래도 IC의 냄새가 나."
"IC?"
"인턴 커플(Intern Couple). 그래서 그런지 너희 둘을 보고 있으니까 아이씨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니까 아니라고."
"우리는 사귀는 사이 아니야."
두 사람의 해명에 김건우는 한참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중 거리를 좁히며 한 손을 최기석의 어깨에 올렸다.
갑자기 표정이 진지해졌다.
"썸 타는 것 같은데. 웬만하면 설화가 고백하게 하지 마. 여자 가슴 졸이게 만드는 남자는 멋없다."
그의 말에 최기석은 멍한 표정을 지었고 정설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어디까지 가시나요? 때마침 저랑 같은 쪽이네요. 제 우산으로 걸어갈까요."
김건우가 흥얼거리는 노랫말이 둘 사이의 어색함을 깨트렸다.
"갈까?"
"응."
두 사람이 다시 걷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관까지 도착했다.
"자, 우산. 잘 썼어."
"아니야. 네가 계속 들고 있었는데."
최기석이 건넨 우산을 정설화가 받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본관 입구에 서서 바깥을 응시했다.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당직 잘 서고 다음에 보자."
"응."
최기석은 멀어지는 정설화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김건우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확실히 정설화와 자신과의 관계는 애매한 부분이 많았으니까.
"아. 맞다."
최기석은 순환기내과 병동으로 가던 중 발길을 돌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림에 관련된 책을 빌렸다.
이후 병동에 도착해서 이정아가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이정아는 홀터 검사 때 받았던 노트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 그리고 있어?"
"아. 네."
이정아가 황급하게 노트를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대체 뭘 그리길래 그렇게 빨리 숨겨?"
"선생님은 몰라도 돼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한데?"
최기석은 미소를 지으며 이정아에게 다가갔다.
"몸은 좀 어때?"
"똑같아요. 가끔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흡도 불편하고."
"간호사 선생님들이 계속 라운딩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벨 눌러."
"알아요."
이정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건 선물."
최기석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이정아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요?"
"병동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기왕 그림 그리면서 시간을 보낼 거면 이런 거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선생님은 참 이상해요."
이정아가 책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저한테 이렇게 하는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으니까요."
이정아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최기석은 오늘만 해도 벌써 네 번째로 병실을 찾았다.
특별히 할 일이 있어서 오는 게 아니고 와서는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갈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은 심심할 때 보라고 책까지 주었다.
그가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난 쓸쓸한 게 좋지 않다는 걸 알거든."
최기석은 이정아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병원에서 거의 혼자 지내는 이정아를 보면 과거 부모 없이 혼자 자라 온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래서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그런 건 익숙하니까."
"그런 건 익숙해질 필요 없어. 여기 있는 스태프들이 괜히 네 옆에 있는 게 아니거든."
"다들 바빠 보이던데······."
"아무리 그래도 너랑 잠깐 대화할 시간까지 없는 건 아니야."
"네."
이정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와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선생님은 왜 의사가 됐어요? 매일 잠도 못 잔다고 힘들잖아요. 의대 갈 정도로 공부 잘했으면 다른 일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지."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은 이 일이 제일 좋아. 네 말대로 밤 잠 설치고 하루 종일 힘들어도 환자들이 건강하게 퇴원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거든."
"······."
"그러니까 너도 건강하게 퇴원해야 돼. 선생님을 행복하게 하려면."
"싫은데요? 제가 왜요?"
이정아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최기석은 그저 웃고 말았다.
"푹 쉬고 내일 보자."
최기석은 병실을 나와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필요한 책을 챙긴 후 노트북을 켰다.
딸칵! 딸칵!
"으음······."
신음이 깊어졌다.
그는 오늘 저녁에 끝난 이정아의 24시간 홀터 검사를 살피고 있었다.
검사 결과 이정아는 쉬거나 낮잠을 잘 때 우측 흉부유도에서 ST분절의 상승이 있었다.
최기석의 예상대로 브루가다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생각보다 안 좋은 상태로.
순환기내과 스태프들은 이정아에게 어떤 결정을 내릴까.
퀴니딘이라는 약물을 쓸까, 아니면 삽입형 제세동기를 사용할까.
후자 쪽의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기왕이면 약물 치료가 가능하기를 바랐다.
여고생에게 ICD(Implantable Cardioverter-Defibrillator) 삽입이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지이이잉.
콜폰이 울려서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지황인데. 지금 응급실로 내려와라. 지금 AMI(급성 심근경색) 환자 들어왔어. 응급으로 PCI(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 해야 돼.]
"바로 갑니다."
최기석은 가운을 휘날리며 응급실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