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3)
"정아야."
최기석은 노트를 훑고서 운을 뗐다.
"너 그림 진짜 잘 그린다고. 혹시 미술 공부하니?"
"아. 네. 예전에는 했어요."
이정아는 다소 놀란 얼굴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낙서를 했다고 혼낼 줄 알았건만 오히려 칭찬을 받고 있었다.
"특히 이 그림은 진짜 같아."
최기석이 검지로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좁은 골목길, 후줄근한 복장에 한 남자가 가로등 아래서 담배 피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체는 사실적이었으며 남자의 쓸쓸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 그건 우리 아빠예요."
"정아 아버님?"
"네. 2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정아의 대답에 최기석은 말문이 막혔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랐다.
"아빠도 저 같은 심장병으로 죽었다고 하던데. 그럼 저도 곧 아빠처럼 죽겠죠?"
이정아가 최기석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또래 아이들의 생기발랄함은 찾을 수 없었다.
체념, 슬픔, 괴로움, 두려움 등등.
가슴을 좀 먹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데 뭉쳐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언제 심정지로 쓰러질 줄 모른다고 하면 누가 제대로 된 정신을 유지하겠는가.
"아니. 절대."
"······."
"여기 있는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해서 정아를 도와줄 거니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정아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림을 그리는 건 좋은데 가슴이 아프다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그것도 바로바로 적어야 돼. 알았지?"
"네."
최기석은 이정아에게 주의를 주고 병실을 나왔다.
이어서 바쁜 처치가 이어졌다.
내과라서 그런지 투약 처치가 많았으며 소변줄을 삽입하고 제거하는 일 등도 많았다. 하지만 능숙한 솜씨로 처치를 끝내고 회의 준비까지 마쳤다.
"벌써 다 끝냈어?"
양석진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양석진은 이번 달 순환기내과 짝턴이다.
그가 수술방을, 최기석이 병동 일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비록 타 대학 출신이지만 어제 인수인계를 같이 받으면서 제법 친분을 쌓았다.
"당연하지."
"듣던 대로 대박이다. 팔다리에 모터라도 달았니?"
"오버하지 마. 준비 끝났으니까 커피라도 마시자."
"오늘은 내가 쏜다. 특별히 비싼 걸로."
두 사람은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사 가지고 병동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최기석은 가만히 양석진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양석진은 타 대학 출신이라서 앙금이 많이 쌓였다.
"너희 대학에서는 폴리를 그렇게 꽂으라고 가르쳐?"
"의대에서 대체 뭘 배웠어요?"
양석진이 실수를 하면 몇몇 사람들은 타 대학 출신임을 아프게 꼬집었다. 어제 대장관외과에서 비위관 삽관을 할 때도 개욕을 처먹었다고 한다.
"난 볼 때마다 네가 부럽다."
양석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무슨 처치든지 척척 해내잖아. 간호사나 다른 레지 선생님한테 평판도 좋고. 거기다 얼마 전에 아동학대 피의자까지 잡았잖아. 레지 생활은 안 봐도 고속도로네."
"네가 생각하는 거랑은 조금 달라."
최기석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 네 생각을 바꿔 봐."
"······."
"흉부외과 픽스턴 취소하고 다른 과 알아보라고. 뭐하러 흉부외과 가서 개고생 하냐? 딱 봐도 지원자는 너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데."
"흉부외과가 내 길인 걸 어떻게 해."
"하긴 지금 내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떨턴만 피했으면 좋겠는데."
양석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떨턴은 전공의 시험에 탈락해서 레지던트가 되지 못하는 인턴을 말한다. 자칫 잘못하면 날짜가 붕 떠서 애매하게 중위 군의관으로 갈 수도 있다.
"가자."
최기석은 커피를 다 마시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내과 선생들이 회의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기석은 양석진과 오뚝기처럼 인사하기 바빴다.
"넌 흉부외과 픽스턴 아니야?"
순환기내과 조교수 김철우가 최기석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네. 맞습니다."
"근데 내가 여기 왜 왔어?"
"흉부외과 송 교수님이 내과 공부하라고 보냈답니다."
자리에 앉은 레지던트가 대신 대답했다.
"내과 공부?"
김철우가 콧방귀를 꼈다.
"환자만 보면 째지 못해서 안달인 인간들이 퍽이나 공부를 하겠다."
"······."
"게다가 너는 초턴 때 환자한테 흉강천자 했다며?"
김철우가 검지로 최기석의 가슴을 콕 찍었다.
"특히 너 같은 놈이 제일 위험해. 앞뒤 안 가리고 환자 몸에 손대는 새끼들 말이야."
김철우의 목소리에 노기가 담겼다. 잘은 모르겠지만 외과에 상당한 적개심을 가진 듯 했다.
과거에 무슨 사건이라도 있었던 걸까.
김철우가 최기석을 노려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치프의 주관으로 본격적인 회의에 막이 올랐다.
순환기내과 과장과 부교수가 자리를 비웠기에 김철우가 회의실에 왕고가 됐다.
딸칵!
최기석이 마우스를 클릭하자 환자 정보가 프로젝터에 떠올랐다.
환자의 이름은 나철범.
나이는 64세로 당뇨병과 고지혈증을 함께 앓고 있었다.
"환자 치료는 어떻게 하고 있어요?"
"NCEP 분류상 2군에 해당하는 환자로 LDL 수치가 160, HDL 수치가 40, 중성지방수치가 400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비약물 요법을 사용해 봤지만 차도가 없어서 약물 치료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무슨 약물 쓸 건데?"
"clofibrate와 환원요소 억제제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clofibrate?"
김철우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건 담석 형성의 위험이 있어서 잘 안 쓰는 약인데?"
"아······ 그게······."
김철우의 지적에 전공의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약을 처방할 생각이면 그 약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꿰고 있어야지."
"죄송합니다."
"환자가 당뇨병을 같이 앓고 있으면 합병증 위험이 세 배로 증가하는 거 알지?"
"······네."
"평소에 혈압 관리 잘하고. 이 할아버지 저번에 보니까 나가서 담배 피우는 것 같던데, 담배도 못 피게 해. 알았어?"
"네."
김철우가 폭풍 같은 지적을 쏟아 내자 전공의가 기죽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후 회의가 계속되었다.
'살벌하네.'
최기석은 내과의 회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흉부외과의 회의는 절차는 대부분 간단했다. 환자를 어떤 이유로 수술하는 건지, 어떤 수술을 할지 물어보는 정도로 문답이 끝난다.
그런데 내과의 회의는 토론회를 방불케 했다.
환자의 각종 데이터로 약물을 종류와 투약량을 정했으며, 주치의마다 그 기준이 조금씩 달랐다.
난상 토론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회의 시간이 길어졌다.
"마지막 환자입니다."
치프의 눈짓에 최기석이 얼른 환자의 정보를 띄웠다.
환자의 이름은 문주혁.
나이는 45세로 협심증으로 응급실에 내원했다가 순환기내과에 입원하게 되었다.
"오늘 중으로 심혈관 조영술을 통해 환자 상태를 확인할 생각입니다."
"검사 결과를 봐야겠지만 웬만하면 외과에 넘겨주지 마."
김철우가 최기석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여러 가지 질환 중에서 협심증은 흉부외과와 심장내과의 치료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환자의 구체적인 상태에 따라 시술 방법이 선택되지만 각각 PCI(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과 CABG(관상동맥 우회술)로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나고 회진까지 끝났다.
"저기 선배."
최기석은 레지던트 1년 차 남지황을 붙잡았다.
"왜?"
"저 내과 공부 하려고 하는데 책 좀 추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오올~ 놀러 온 건 아닌가 보다?"
남지황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회의실 책장에 보면 우리 병원 내과 진료 매뉴얼 있어. 일단 그거 보고 우리 과장님이 쓴 순환기 노트랑 슈퍼내과 1, 2권 같이 보면 좋아. 4권이면 너무 많으려나?"
"아니요. 딱 좋습니다."
"열심히 해 봐."
남지황이 최기석의 등을 두드리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자. 그럼 나도 시작해 볼까?"
최기석은 가운을 걷어 올리고 스테이션을 찾았다.
* * *
순환기내과 첫 근무가 시작됐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콜폰이 쉴새 없이 울리고 각종 처치가 떨어졌다.
내과 병동이라서 그런지 병동 일의 업무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ABGA나 EKG를 찍는 일이 많았고 환자에게 동의서를 받는 일이나 기타 잡무도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최기석은 초 인턴답게 처치와 더불어 자투리 시간에는 내과 서적을 독파했다.
"빡세네."
의진대병원 내과 매뉴얼, 순환기내과 파트를 보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 아팠다.
치료에 필요한 약물의 종류가 상당히 많았다.
약물에 효과와 부작용을 일일이 외우는 정도는 애교다.
환자의 검사 수치나 기존 질병의 상태에 따라 약물을 혼합하거나 기존 약물을 빼기도 했다.
즉 약물 하나를 쓰는데도 고려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점.
그것은 내과 공부할 때는 대가의 제자 버프가 통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송명진은 내과에 가 보면 좋을 것이라 제안했지 내과 공부를 직접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버프가 통하지 않는 듯했다.
최기석은 제 힘으로 내과 수치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후아······."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엄지로 관자놀이 부분을 문질렀다.
때마침 울리는 콜폰.
오히려 스테이션의 콜이 반갑게 느껴졌다.
[선생님. 여기 스테이션인데요.]
"아, 네."
최기석은 굵은 목소리를 듣고 몸을 들썩거렸다.
[선생님, 양경규 환자 운동부하 검사하러 가야 되는데요.]
"지금 올라갑니다."
콜폰을 가운에 넣고 스테이션을 향했다.
이브닝 근무가 되면서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이 바뀌었다.
개중에는 방금 전화를 걸었던 남자 간호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남자 간호사의 이름은 신재원.
나이는 최기석과 대충 또래일 것 같았다.
경력이 얼마 안 되는지 일하면서도 옆에 앉은 간호사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힘들겠네.'
최기석은 신재원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군대도 다녀왔을 텐데 저보다 어린 여자 간호사들 틈바구니에서 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신재원이 최기석을 발견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남자 간호사 선생님은 처음 뵙네요."
"그러시겠죠."
신재원이 털털하게 웃었다.
최기석은 신재원과 대화를 나누다가 환자를 데리고 물리치료실로 갔다.
물리치료실은 환자들과 물리치료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각종 치료도구들이 널려 있어서 언뜻 헬스장 같은 느낌도 들었다.
"순환기내과에서 왔습니다. 여기 양경규 환자분입니다."
"네, 환자분. 이리로 오세요."
물리치료사가 환자의 몸에 전극을 붙이고 혈압을 잴 수 있게 팔에 커프를 감았다.
쿵. 쿵. 쿵. 쿵.
환자가 러닝머신 위를 걷기 시작했다.
운동부하 검사 또는 트레드밀 검사는 환자가 운동을 할 때에 심전도와 심박수, 혈압의 변화를 확인하는 검사다.
이를 통해 관상동맥 질환 여부와 심장의 상태를 체크할 수 있다.
잠시 후 20분가량의 검사가 끝났다.
최기석은 환자를 병실로 데려왔다. 다른 처치를 하기 위해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나철범이 다가왔다.
회의 시간에 전공의가 된통 깨졌던 고지혈증 환자다.
나철범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최기석은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저기, 어르신."
"왜?"
최기석이 부르자 나철범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충돌하는 가운데 최기석이 먼저 운을 뗐다.
"방금 담배 피우고 오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