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50화 (50/407)

제안(2)

송명진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싸한 느낌이 들었다.

회색의 뜻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색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결코 좋게 볼 수 없었다.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치프의 주관으로 회의가 진행됐다.

입원환자 및 수술환자에 대한 브리핑이 가장 먼저였고 의국 내 각종 현안들이 그 뒤로 이어졌다.

뒷이야기가 길어지면서 회의 시간이 평소보다 길었다.

"자. 이쯤에서 전공 분야 이야기를 해 봅시다."

조지환이 검지로 톡톡톡 탁자를 건드렸다.

이번에는 또 어떤 폭탄을 던질까.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회의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송 교수님."

"······."

"그동안 수술환자가 많아서 힘드셨죠? 그 고생 지금부터 줄여 드리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조지환의 말에 송명진의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송 교수님은 거의 모든 분야에 심장 수술을 집도했습니다. 때로는 폐나 식도 환자도 수술했고요. 하지만 이제는 심장 수술 분야를 세분화할 겁니다."

"그렇다면······."

"송 교수님은 판막질환만 맡으세요."

조지환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심장이식이나 대동맥 질환은 우리 장 교수가 맡을 거고, 로봇 수술이나 협심증 환자는 윤 선생이 맡을 거예요."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뭡니까?"

"그동안 심장 수술은 지나치게 송 교수님 위주로 돌아갔습니다. 조금 과장에서 말하자면 우리 과에서 송 교수님이 빠지면 과가 유지가 안 될 정도죠. 아닙니까?"

"······."

조지환의 물음에 송명진은 침묵을 지켰다.

과장이 섞이기는 했지만 심장 수술 파트에서 그가 빠질 수 없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 능력 있는 스태프들이 들어왔으니까 자리를 양보하시죠. 송 교수님이 아무리 스타라고 해도 보고 우리 흉부외과가 교수님만 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믿어 주세요. 전 자신 있습니다."

장혁필이 대화에 껴들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엉킨 가운데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최기석은 마른침을 삼키며 송명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솔직히 조지환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동안 심장 수술은 지나치게 송명진에게 집중되었다.

다만 최기석이 걱정하는 것은 송명진의 수술 범위가 줄어들면서 그의 영향력이 함께 줄어드는 것이다.

송명진이 맡았던 부분을 장혁필과 윤지혜가 잘 해낸다면?

당연히 송명진의 힘은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지환의 말도 180도 바뀌게 되리라.

[조금 과장해서 우리 과에서 송 교수님이 빠져나가면 과가 유지가 안 될 정도죠.]

이 말이 곧 이렇게 변하게 된다.

[송 교수님 없어도 우리 과는 별문제 없습니다.]

조지환이 두 번째 말을 뱉을 수 있게 되는 순간.

송명진은 의진대 흉부외과에서 내팽개쳐질 가능성이 생긴다.

"······."

"······."

"······."

침묵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대화 자체는 단순했지만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숨겨진 뜻을 알았다.

그리고 송명진의 결정에 따라 흉부외과가 요동칠 수 있음을.

"좋습니다. 조 과장 뜻대로 하세요."

"대답이 시원시원해서 좋습니다."

송명진의 대답에 조지환이 껄껄 웃었다.

이윽고 회의가 끝나고 오전 회진이 시작됐다.

최기석은 호시탐탐 송명진과 대화를 나눌 기회만 엿보았다.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았다.

"자. 다들 고생했어. 일 봐."

라운딩이 끝나자 조지환이 유쾌한 목소리로 스태프들에게 말했다.

최기석은 조심스럽게 송명진에게 다가갔다.

"교수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요."

송명진은 최기석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두 사람은 휴게실이 아니라 특별히 옥상에 자리를 잡았다.

높고 푸른 하늘과 탁 트인 시야.

평소 좋아하던 옥상 풍경이지만 오늘은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운을 뗐다.

"건방지게 제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압니다. 그래도 무례를 무릅쓰더라도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과장님의 제안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신 것 아닌가요?"

"그렇게 보였어요?"

그의 질문에 송명진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건 최 선생도 알 거예요. 흉부외과를 받치는 기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그건 저도 알지만······."

최기석은 마음의 눈을 쓴 채로 송명진을 응시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칙칙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만약에 말이에요. 아주 만약에. 내가 병원을 떠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얼마 전 들었던 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분명 무언가가 있다.

송명진이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그렇지 않고서는 병원을 떠난다는 과격한 발언은 할 수 없다.

"교수님. 제게 숨기는 게 있으시죠?"

"······."

"요즘 교수님을 지켜보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최기석은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고 송명진은 최기석의 시선을 피한 채 난간으로 다가갔다.

오늘따라 송명진의 등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

수술실에서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나이 지긋한 동네 의원 같은 느낌이다.

"최 선생이 그렇게 말하면 나도 어쩔 수 없죠."

송명진이 뒤로 돌아 최기석을 응시했다.

"사실 미국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왔어요."

"미국이요?"

"예전에 연수를 받았던 메이죠 클리닉이에요. 심장 센터 과장을 보장하고 신수술 개발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했어요."

"아······."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메이죠 클리닉은 미국에 있는 병원으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한다.

그런 곳에서 송명진에게 러브콜을 보내다니······.

송명진이 국내를 넘어 세계에 통하는 명의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혹시 그거 알아요?"

"······."

"미국 흉부외과는 우리나라와 달라요. 우리나라 흉부외과는 지원자가 없어서 허덕이지만 미국은 10:1이 넘는 경쟁률을 뚫어야 들어갈 수 있어요. 힘든 거야 똑같다지만 미국에서는 보장이 완전히 다르죠."

송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환자는 다 같은 환자라지만 난 그래도 우리나라 환자들을 치료해 주고 싶었어요. 우리나라 흉부외과는 특히 더 열악하니까요. 그런데 요즘에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건지 회의가 들어요."

'그랬구나.'

최기석은 속으로 안타까움을 삼켰다.

송명진의 속 이야기를 들으니 비로소 그의 심장이 회색빛을 띤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과연 제 길을 가고 있느냐는 의심과 회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등.

송명진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최기석은 그런 송명진의 아픔이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도 그같이 올곧은 사람도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는······ 교수님이 어떤 선택을 하셔도 존중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어디를 가시더라도 환자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주실 테니까요."

최기석은 가슴이 시키는 대로 지껄였다.

머리로는 송명진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가슴은 그렇지 못했다.

송명진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충분히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알기에.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송명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아직 그쪽으로 가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니까."

"네."

"그건 그렇고. 이번 달이면 흉부외과에서 네 달째죠?"

"맞습니다."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관외과에서 한 달, 대전 의진대병원에서 한 달을 보냈고 나머지는 전부 흉부외과에서 보냈다.

전례 없는 픽스턴이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번 달이 얼마 안 남아서 하는 말인데. 과를 옮겨 봐요."

"과를요?"

"기왕이면 순환기내과가 좋겠네요."

"괜찮습니다. 전 흉부외과가 제일 좋습니다."

최기석이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그건 우리 병원 사람이면 다 알아요. 그것보다 내가 왜 순환기내과를 추천하는지를 생각해 봐요."

"그게······."

"사실 환자를 살피다 보면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있고 수술이 필요 없는 환자가 있어요. 단 거기에 대한 판단이 달라서 내과와 외과가 종종 다투죠."

"네. 맞습니다."

최기석이 진성대 레지던트를 할 때도 심장내과와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한데 외과의라도 내과의 치료법과 내과의의 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두 달, 아니 최소한 한 달이라도 가 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겁니다."

띠링!

[특별한 임무, '순환기내과를 체험하라'가 주어졌습니다.]

[임무를 수락하면 연계 임무가 주어지며, 임무 완수 시 유니크 아이템을 지급합니다.]

알림이 속사포처럼 머리를 때렸다.

"그게 가능할까요?"

"어려울 거 없어요. 다음 달 순환기내과 인턴이 우리 쪽으로 오고 최 선생이 순환기내과로 가면 되니까. 생각이 있으면 말해요. 네가 미리 그쪽하고도 말을 맞춰 놓을 테니까."

"네.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만 들어가죠."

송명진이 앞장서고 그 뒤를 최기석이 따랐다.

* * *

나흘 뒤 아침.

최기석은 평소대로 연습을 마치고 5시쯤 아지트를 나섰다.

오늘은 정든 흉부외과를 떠나 순환기내과로 가는 날이다.

고심 끝에 송명진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연계 임무, '내과 레벨을 올려라'가 주어졌습니다. 임무 완성 시 유니크 아이템을 지급합니다.]

송명진에게 내과를 가겠다고 말한 순간 바로 연계 임무가 주어졌다.

현재 그의 내과 레벨은 3.

이것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이 내과에서의 주된 목표다.

"유니크 아이템이라······."

상태창으로 임무를 확인한 뒤 손을 비볐다.

황정우에게 받은 칼라일이 그가 얻은 첫 번째 아이템이자 유니크 아이템이다.

즉 이번 미션을 성공하면 칼라일급의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임무를 끝내고 얻을 보상이 벌써 기대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최 선생님."

스테이션에 있던 간호사들이 인사를 건넸고 최기석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듣던 것보다 훨씬 멋있네요."

"저요?"

"그럼 여기 최 선생님 말고 누가 있어요."

유정아 간호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의진대병원에서 최기석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초턴 때 환자에게 흉강천자를 한 일.

칼처럼 흉부외과 픽스턴을 한 일.

한 달 전쯤에는 병원 최초로 아동학대 피의자를 신고해서 병원 잡지에 기사가 실렸다.

최기석은 단연 병원 내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다.

"감사합니다. 병실 돌고 올게요."

최기석은 머쓱하게 웃으며 차트와 처치에 필요한 물건을 챙겨 스테이션을 떠났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4인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창가 쪽 자리에 앉은 앳된 외모의 여자가 최기석을 바라봤다.

여자의 이름은 이정아.

17세의 여고생으로 이틀 전 실신으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

어제 저녁부터 24시간 홀터 검사를 진행 중이다.

"몸은 좀 어때?"

최기석은 이정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곧바로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4/10

주 증상: 흉통 / 심계항진

아픈 부위: 심장

진단명: 브루가다 증후군

현재 상태: 비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패시브 스킬

[정신집중 Lv.2]

- 오랜 작업을 하더라도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 레벨이 증가하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 30퍼센트 확률로 주변인에게도 정신집중이 적용되는 폭풍 효과가 발동합니다.

이정아의 진단명에 가슴이 아팠다.

브루가다 증후군.

이 병은 특별한 심장 질환이 없음에도 심인성 급사를 경험하는 질병이다.

병의 원인으로는 가족력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아마 그녀의 부모도 비슷한 증상으로 고통 받고 있을 확률이 컸다.

"그저 그래요."

최기석의 질문에 이정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이 검사 장치 좀 살펴볼게."

최기석은 심전도 패드가 잘 붙어 있는지 레코딩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를 살폈다.

다행히 별문제는 없었다.

"노트는 잘 적고 있어?"

최기석은 책상에 놓인 노트를 손에 쥐었다.

24시간 홀터 검사를 받는 환자는 노트에 자신의 활동을 적도록 되어 있었다.

특이 사항이 있으면 노트의 내용과 심전도 결과를 비교해서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펄럭!

손짓과 함께 노트가 넘어갔다.

최기석은 노트를 유심히 살피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