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1)
[살려야 한다 스킬을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스킬을 사용하자 자신감이 붙었다.
얼어붙은 심장 패시브로 마음도 가라앉았다.
퍽! 퍽! 퍽! 퍽!
최기석은 깍지 낀 손으로 환자의 가슴을 압박했다. 압박을 할 때마다 환자의 몸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왜 그래?"
이경혜 간호사와 레지 3년 차인 흉부외과 당직의 김제열, 윤지혜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환자와 최기석을 보며 놀란 토끼눈을 했다.
"하아······ 하아······ 화장실에 들어오니까······ 쓰러져 있어서."
"됐어. 선생님. CPR 방송하고 앰부백, 스트레쳐카 좀 챙겨 주세요."
윤지혜의 지시에 이경혜가 고개를 끄덕이고 스테이션으로 돌아갔다.
"흉부외과 코드 블루. 흉부외과 코드 블루.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위장관외과 코드 블루."
전자음과 더불어 방송이 퍼졌다.
뚝. 뚝. 뚝.
최기석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렀다.
마라톤이라도 뛴 것처럼 호흡이 가빴다. 그럼에도 CPR은 멈추지 않았다.
곁에서는 김제열이 앰부백을 짰다.
타다다닥.
심장내과 당직의를 비롯해 몇몇 의사들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환자 좀 옮겨 주세요."
윤지혜의 말에 의사들이 환자를 스트레쳐카에 올렸다.
일행들은 함께 중환자실로 달렸다.
중환자실에 도착한 후 CPR을 계속하면서 환자에게 환자 감시 장치를 달았다.
"호흡기 달고 정맥라인 잡아."
"에피네프린. 정맥으로."
"제세동기 준비."
윤지혜가 차분하게 지시를 내렸다.
평소에도 얼음장 같은 그녀지만 응급상황에는 더 차가운 모습을 보였다.
'우와. 대박이네.'
김제열은 최기석을 보며 혀를 찼다.
짬이 안 되는 그와 최기석이 환자 처치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기석은 윤지혜의 속사포 같은 지시를 하나도 까먹지 앉고 진행했다.
손이 몇 개라도 되는 것처럼 처리 속도도 빨랐다.
인턴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들 물러나세요. 200J!"
최기석이 충전량을 200J로 맞추고 충전버튼을 누르자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Charge!"
"Clear!"
쿵!
전류가 흐르면서 환자의 몸이 출렁거렸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모니터 상에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200J!"
"Charge!"
"Clear!"
제세동기와 사용과 더불어 CPR이 한동안 이어졌다.
10여분쯤 지나자 환자가 활력징후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윤지혜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AMI(Acute Myocardial Infarction)네. 그것도 심각해."
윤지혜는 심전도를 확인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환자는 ST 분절이 상승했으며 Q파의 변화가 있었다. 이만한 수준이라면 관상동맥을 재개통 시켜야 한다.
'어차피 CABG(관상동맥 우회술) 할 환자였으니까.'
윤지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발순환 돌아왔으니까 수술 들어가자."
"네!"
윤지혜의 말에 최기석과 김제열이 동시에 대답했다.
* * *
그날 저녁.
응급으로 치러진 CABG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환자가 중환자실로 돌아간 후, 수술을 한 세 사람은 의국에서 야식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콜을 받은 김제열이 응급실로 가면서 의국에는 최기석과 윤지혜만 남았다.
"배달 왔습니다."
"네."
최기석은 회비로 계산하고 비닐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오늘의 야식은 매운 떡볶이.
새빨간 양념이 한 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리끼리 먼저 먹자."
"네. 잘 먹겠습니다."
최기석은 세팅을 마치고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달달한 양념이 입안을 감싸다가 갑자기 매운맛이 훅하고 들어왔다.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 싶었다.
몇 개를 집어먹다가 곧바로 음료에 손을 댔다.
반면 윤지혜는 담담하게 떡볶이를 삼켰다.
"안 매우세요?"
"이 정도는 돼야 먹은 것 같아."
윤지혜의 대답에 최기석은 혀를 찼다.
그녀는 행동만 얼음 같은 게 아니라 혀도 얼음으로 되어 있는 모양이다.
최기석은 떡볶이를 먹던 중 물끄러미 윤지혜를 바라봤다.
문득 CPR를 지시하던 모습과 수술실에서 집도하던 모습이 겹쳐졌다.
그녀는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다.
최기석이야 얼어붙은 심장 패시브를 가지고 있기에 그럴 수 있지만 윤지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했다.
심지어 스승인 송명진도 윤지혜만큼 냉정함을 유지하지는 못하니까 말이다.
대화가 끊어진 회의실.
두 사람이 야식을 먹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
침묵을 먼저 깨트린 것은 의외로 윤지혜다.
"오늘 잘했어."
최기석을 바라보는 윤지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최기석은 적절하게 CPR을 했을 뿐 아니라 수술 보조도 빈틈없이 해냈다.
인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실력으로 말이다.
오늘 최기석의 모습은 한때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했으며 동시에 존경했던 사람을 꼭 닮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감이 드는 모습을 봤다고 해야 할까.
"근데 교수님."
"왜?"
"방금 저 보고 웃으셨죠?"
최기석의 지적에 윤지혜가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네. 방금 분명 저 보고 웃으셨어요. 교수님이 스태프 보고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아니야. 잘못 봤어."
윤지혜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지만 두 볼은 어느새 잘 익은 복숭아 빛을 띠었다.
"다······ 다 먹었으면 빨리 가 봐. 나 작업할 거 있어."
"뒷정리하고 가겠습니다."
"됐으니까 그냥 가."
윤지혜가 쫓아내는 바람에 최기석은 어쩔 수 없이 회의실을 나왔다.
띠링!
[마음의 조각(2/2)을 획득하셨습니다.]
[임무에 성공하여 특별한 스킬이 주어집니다.]
'좋았어.'
최기석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일찍 일어나서 송명진이 보내 준 논문을 읽었다.
흉부외과에 들어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논문을 봤다. 그뿐만 아니라 버프의 덕분으로 머릿속에 내용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지금은 흉부외과 수술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풍부해졌다.
딸칵!
감상평을 보내고 곧바로 아지트를 향했다.
아지트 앞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 내장이 담긴 스티로폼 박스가 놓여 있었다.
최기석은 박스를 챙겨 아지트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시트를 깔고 각종 수술 도구를 준비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작업이라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세팅이 끝났다.
[용의 눈 스킬을 사용합니다.]
[수술에 필요한 최적의 시야를 제공합니다.]
[필요에 따라 줌 인 모드와 줌 아웃 모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으으윽.
메스를 손에 쥐고 소의 심장을 갈랐다.
오늘도 이어지는 CABG 수술.
버프의 도움이 있어도 벅차기만 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최기석은 매일 실감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휴우······."
뒷정리를 하고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언뜻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지만 조금씩 집도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우선 불필요한 동작이 줄었다.
처치 정확도가 올라가서 한 작업에 여러 번 손대는 일도 많이 사라졌다.
최기석은 그대로 병실로 올라갔다.
도중에 상태창을 통해 새롭게 얻은 스킬을 확인했다.
[마음의 눈]
- 심안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파악합니다.
- 타인의 감정은 갖가지 색으로 표현됩니다.
- 이미 최대 레벨입니다.
스킬 설명을 확인하는 순간 한숨이 터졌다.
천신만고 끝에 임무를 끝냈건만 이상한 스킬을 얻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새 스킬이 치료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임무 자체가 치료와 관련이 없어서 그런 듯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걸 어디다 써 먹지?'
최기석은 턱을 쓸어내렸다.
어제 스킬을 확인하고 실망해서 한 번도 스킬을 써 보지 않았다.
오늘이라도 용도쯤은 궁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마음의 눈을 사용합니다.]
[타인의 감정을 색으로 표현합니다.]
알림이 울리자 시야가 미묘하게 변했다.
사람을 응시하면 심장 쪽에 하트 모양이 보였고 그 안에 색이 차 있었다.
'신기하네.'
최기석은 마주치는 사람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아무래도 초록빛은 별다른 감정이 없는 보통 상태를 의미하는 듯싶었다.
"이봐요. 왜 사과를 안 해요?"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싸움이 붙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심장은 새빨간 색을 띠고 있었다.
화를 냈을 때 붉은색이 보이는 걸 보면, 감정과 색을 매치하는 기준이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듯 했다.
"초 인턴 쌤. 하이요."
스테이션을 지나치는데 강하나가 밝게 인사를 했다.
그녀의 심장색은 노란색.
강하나 주변에 밝은 기운이 넘쳐흐르는 이유.
그것은 그녀가 밝은 기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최기석은 인사를 받고 병동처치에 나섰다.
드레싱이나, 소변줄을 삽입하고 제거하는 일이나, 흉관을 갈아 주는 처치 등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병동 일을 후딱 마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뜻밖에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윤지혜다.
"안녕하세요."
최기석의 인사에 윤지혜가 손을 가볍게 들어서 인사를 받았다.
"요즘 바쁘신가 봐요."
"논문 준비 중이라서."
윤지혜가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최기석은 청소를 하면서 마음의 눈으로 윤지혜를 살폈다. 별다른 감정이 없는지 심장이 초록빛을 띠었다.
수술환자를 프린팅 해서 탁자에 올려놓은 뒤 커피를 탔다.
달콤한 향이 의국에 퍼졌다.
탁!
"드세요."
최기석은 믹스커피가 담긴 잔을 윤지혜가 작업하는 쪽에 두었다.
윤지혜는 최기석과 커피를 번갈아 응시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최기석이 마음의 눈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그는 잠깐이지만 그녀의 심장 일부가 옅은 분홍빛을 띠었던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뜻을 파고들면 이랬다.
윤지혜는 겉으로만 쌀쌀맞은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속으로는 보통 사람처럼 감정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의외의 소득인데?'
최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교수님."
"왜?"
"요새 좀 피곤해 보이는데 제가 안마 좀 해 드릴게요."
"됐어"
"작업하시는데 방해 안 할게요."
최기석은 한 번 더 미끼를 던지고 윤지혜의 심장을 살폈다.
제안이 정말 싫다면 붉은색이나 기타 강렬한 색이 나와야 하거늘, 의외로 옅은 주홍빛이 보였다.
주홍빛의 뜻은 모르지만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과감하게 윤지혜에게 다가갔다.
"됐다니까."
"전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작업하세요."
윤지혜의 등 뒤에서 어깨를 주물렀다.
안마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윤지혜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하던 작업도 하지 않고 오히려 안마를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줬다.
심장색은 여전히 옅은 주홍빛이다.
'생각보다 괜찮네.'
최기석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얼음마녀라고 불리는 윤지혜에게 안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사실 의국 내에서 그녀와 친한 것은 장혁필뿐이다.
다른 스태프들은 그녀의 쌀쌀맞은 태도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최기석은 마음의 눈을 통해 그녀에게 안마를 하는 성과를 올렸다.
'설마 이 스킬. 연애하라고 만들어 줬나?'
최기석은 그런 생각을 하고 피식 웃었다.
"어때요? 좀 시원하시죠?"
"고마워."
최기석이 안마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가자 윤지혜가 무심하게 한마디 했다.
이윽고 짝턴과 선생님들이 하나둘 회의실로 들어왔다.
'교수님. 왜······.'
최기석은 자리에 앉은 송명진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의 눈으로 본 그의 심장.
그것이 칙칙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