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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46화 (46/407)

새로운 바람(4)

본격적인 응급실 진료가 시작됐다.

최기석의 환타 본능이 발휘되면서 평화롭던 응급실에 환자가 몰아쳤다.

고열을 앓는 소아 환자, 복통을 호소하는 환자, 두통이 극심한 환자 등등.

개중에는 급성 장 폐색증으로 긴급수술에 들어간 환자도 있었다.

폭풍이 한바탕 몰아치고 응급실에 다시 여유가 찾아왔다.

"하아······ 응급실 근무하면서 오늘 환자가 제일 많았네."

안범균이 탁자에 놓인 커피를 마시며 최기석을 응시했다.

"솔직히 말해. 너 환타지?"

"······."

"설화랑 근무할 때는 이런 적 없었다고."

"최 선생님 환타 맞는 것 같아요."

잠자코 있던 응급실 간호사 박미향이 껴들었다.

찔리는 게 있는 최기석은 대답을 못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린 여자 환자가 최기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환자의 이름은 강민아, 나이는 일곱 살이다.

그의 곁에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아버지 강민상이 있었다.

"민아야. 고개 들어 봐. 예쁜 얼굴 들어야 선생님이 상처를 보지."

최기석의 말에도 강민아는 요지부동이다.

땅에 떨어진 고개는 올라올 줄 몰랐다. 산만한 정신을 대변하듯 다리가 계속 떨렸다.

"뭐해!"

강민상이 호랑이처럼 호통을 쳤다.

그제야 강민아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전체적으로 행동이 불안정한 것이 ADHD(주의력 결핍장애)가 의심되기도 했다.

"어떻게 하다가 다쳤니?"

"얘가 바닥에 있는 가방에 걸려 넘어져서 책상에 이마를 찧었어."

강민상이 강민아 대신 대답했다.

반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참았다.

무례한 환자를 대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어디 보자."

강민아의 이마에 생긴 상처는 제법 길고 깊었다. 이만한 수준이라면 봉합이 필요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봉합을 하고 싶지만 그것은 월권이다.

최기석은 성형외과 당직의를 콜 하고 강민아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혹시 ADHD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다.

'뭐야, 이건.'

최기석의 얼굴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이건 뭔가 잘못 됐다.

잘못 돼도 크게 잘못됐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곁에서 봉합 도구를 준비하던 박미향이 물었고 최기석은 침착하게 별일 아니라는 고갯짓을 해 보였다.

잠시 후 콜을 받고 내려온 당직의가 봉합을 시작했다.

성형외과의다운 깔끔한 솜씨.

봉합은 생각보다 깔끔했으며 빨랐다.

"이제 가도 되지?"

"잠깐만요. 박 간호사님 잠깐 저 좀 보죠."

최기석은 보호자에게 기다려 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박미향과 외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네? 정말요?"

최기석의 말에 박미향이 큰 소리로 되물었다.

"확실해요. 저를 믿으세요."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시는 거겠지만······ 만약에 아니면 어떻게 해요? 저 사람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박미향이 보호자를 힐끔거렸다.

보호자는 딸의 상처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최기석과 박미향만 노려볼 따름이다.

"그렇다고 아이를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일단 선생님 말씀대로 할게요."

박미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최기석은 보호자와 마주 앉았고 박미향은 강민아를 데리고 검사실로 이동했다.

"민아야.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어. 그렇지?"

박미향의 말에 강민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맛있는 거 줄 테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네."

강민아는 박미향이 내민 막대 사탕을 받아서 쪽쪽 빨아 먹었다.

"오늘 아파서 병원에 왔잖아. 혹시 근데 아빠가 너 때린 거 아니니?"

그녀의 질문에 강민아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눈동자에 드리운 어둠이 점점 커져갔다.

앙증맞은 입술은 뭔가를 말할 듯이 애틋하게 움직였다 말기를 반복했다.

박미향은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빠는 나 안 때렸어요."

"여기는 언니하고 민아 둘뿐이잖아. 솔직히 말해도 돼."

"정말 안 때렸어요. 근데요······."

"······."

"아빠가 날 밀었어요."

강민아의 대답에 박미향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이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민아는 아빠가 밀어서 다친 거네?"

"네. 배고프다고 하니까 아빠가 짜증 난다면서 밀었어요."

"많이 아팠겠구나."

아버지의 학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아이의 모습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민아야. 언니가 민아 몸을 봐도 될까?"

"네."

박 간호사는 조심스럽게 강민아의 옷을 벗겼다. 허벅지와 옆구리 부분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생긴 멍.

보호자가 강민아를 계획적으로 때리고 있다는 증거다.

가슴에서 은근히 타오르던 불이 전신으로 퍼졌다.

박미향은 당장 바깥으로 나가 보호자를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괜찮아요. 그래도 오늘은 별로 안 아팠어요."

강민아가 헤픈 웃음을 보였다.

"민아야. 이제부터 언니랑 아까 본 의사 선생님이 민아가 안 아프게 도와줄 거야."

"어떻게요?"

"지금부터 설명해 줄게."

박미향은 몸을 낮춰 강민아와 눈을 맞췄다.

* * *

의진대 응급실

최기석은 강민상과 마주 앉은 채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뭐야? 다 끝난 거 아니야?"

강민상이 딸을 끌고 가는 간호사를 노려보았다.

"이마에 염증이 있을 수 있어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다 필요 없으니까 내 딸 데려와."

"꼭 필요한 검사입니다."

최기석은 대충 말을 둘러댔다.

사실 강민아는 봉합이 끝난 시점에서 집에 돌아가도 됐지만 이렇게 사건을 묻어 버릴 수 없었다.

"글쎄. 필요 없다니까!"

강민상이 언성을 높였다.

거기에 놀란 스태프와 환자들이 강민상을 쳐다보았다.

"뭘 봐? 눈 안 깔아?"

강민상이 어깃장을 놓자 시선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응급실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이봐. 내 딸 내가 데리고 가겠다는데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아. 엉?"

"보호자 분."

최기석은 차분하게 강민상을 응시했다.

"따님이 걱정돼서 병원에 데려온 것 아닙니까?"

"······."

"그러면 제 지시를 따라 주세요. 여기 있는 스태프들은 다 환자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최기석의 말에 강민상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화를 삭히는 듯한 모습이다.

"아까 따님이 어떻게 다치셨다고 했죠?"

"식탁에 이마를 찧었어."

"식탁이요? 아까는 분명 책상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최기석은 중얼거리며 EMR을 확인했다.

그가 직접 작성한 응급실 초진 기록지에는 환자가 책상에 이마를 찧었다고 적혔다.

"그랬었나? 근데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식탁이나 책상이나 그게 그거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말이 오락가락하면 신뢰도가 떨어지거든요."

"씨발. 뭐야. 나를 못 믿겠다고?"

강민상의 눈썹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따님 발목에 멍이 있더군요."

"당신 의사 맞아? 오늘 이마를 다치면서 발목까지 다친 거잖아. 이거 가만히 보니까 돌팔이네?"

"정말 그럴까요?"

최기석이 말을 이었다.

"민아의 발목에 있는 멍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어요. 즉 오늘 다친 게 아니라는 소리죠."

최기석의 말에 강민상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기가 죽은 듯 보였지만 금방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애 새끼 안 다치게 학교도 보내지 말고 집에 가둬 줄까? 지가 다치고 오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벌컥.

타이밍 좋게 박미향과 강민아가 응급실로 돌아왔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박미향의 눈짓을 받은 최기석은 그녀에게 다가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저 사람 완전 악질이에요. 민아 어머님하고 통화해 봤는데 평소에도 민아뿐만 아니라 민아 어머님까지 때린대요."

"······."

"오늘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고 병원 쪽에서 신고하겠다고 하니까 알겠다고 하셨어요."

"그럼 경찰에 연락은······."

"당연히 끝냈죠."

"잘하셨습니다."

최기석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치료 끝났지? 난 이제 간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가 일어서는 강민상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쭈? 너 뭐하냐?"

"의료인은 아동학대를 신고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 이상 아이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최기석의 낭랑한 외침이 응급실에 퍼졌다.

"아······ 아동학대?"

"민 선생님. 진짜예요?"

환자를 비롯한 스태프가 전부 술렁거렸다.

의료인에게 아동학대를 신고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고 실제로 학대를 파악해서 신고하는 일은 많지 않다.

실제로 의진대병원에서는 그동안 단 한 건의 아동학대 신고도 없었다.

"하아······ 씨발. 돌겠네."

강민상이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가 내 딸을 때렸다고?"

"양심이 있다면 아니라고는 못할 겁니다."

"아이 몸에 있는 상처는 이미 다 촬영했어요."

최기석이 박 간호사를 바라보자 간호사가 휴대폰을 흔들었다.

"너. 저 간호사한테 다 말했니?"

"······."

강민상이 얼굴을 구기자 강민아는 대답하지 못하고 간호사의 등 뒤로 숨었다.

"하여간 자식새끼 먹여 주고 재워 줘봤자 소용없다니까. 비켜."

"못 비킵니다."

"뒤질래?"

강민상이 으르렁거리며 최기석에게 달려들었다.

[폭군의 강림 스킬을 사용합니다.]

[제압에 실패했습니다. 환자가 아닌 상대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근력과 민첩성이 상승합니다.]

스킬 알림이 머릿속을 스쳤다.

"개새끼. 죽고 싶냐?"

휘이이이익.

강민상이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최기석은 뒤로 살짝 물러나며 강민상의 주먹을 피했다. 그러자 강민상이 씩씩거리며 두 손으로 잽을 날렸다. 왕년에 권투라도 배웠던 것일까.

손속이 매서웠다.

발재간도 제비처럼 날랬다.

최기석은 반격을 피하지 않고 최대한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폭군의 강림으로 신체능력이 향상되서 회피가 벅차지 않았다.

"하아······ 하아······."

주먹질에 지친 강민상이 숨을 골랐고 최기석은 그런 강민상을 가만히 지켜봤다.

"쓰레기 새끼."

최기석은 강민상만 들을 수 있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 너! 뒈졌다고 복창해라!"

강민상이 진료의자를 들고 최기석의 머리를 내리쳤다.

후우우웅.

"꺄아아악!"

"조심해요."

지켜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최기석은 뒤로 크게 물러나서 진료의자를 피했다.

텅터터더더덩.

의자가 쇳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강민상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새빨개졌다.

그사이 최기석은 재빠르게 강민상의 등 뒤로 돌아가서 팔을 꺾었다.

이에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자직원들도 우르르 강민상에게 달려들었다.

"아 씨발!"

강민상의 울부짖는 소리가 응급실에 울려 퍼졌다.

* * *

시간이 흘러 아동학대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강민상은 출동한 경찰들에게 붙잡혀 지구대로 끌려갔다.

강민아는 자정이 돼서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아······ 기분 참."

최기석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병원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듣던 강민아 어머니의 모습이.

말없이 흐느껴 울던 모습이.

강민상은 강민아뿐 아니라 강민아의 어머니에게도 자주 손을 댔다고 한다.

강민아의 어머니도 경찰에 신고를 할까 고민했지만 보복이 두려워 항상 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야 낫겠지만 모녀가 앞으로 짊어지고 갈 마음의 멍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너도 참 대단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안범균이 운을 뗐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아동학대를 잡아냈냐?"

"아이를 보니까 조금 미심쩍은 게 있어서."

최기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버지의 눈치를 심하게 보는 강민아, 아이를 강압적으로 다루는 강민상.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잡아 낸 다발성 타박증.

이 세 가지를 통해 강민아가 학대를 당했을 거라 판단했다.

다행히 그의 판단은 옳았고 말이다.

"형도 고생했어."

최기석이 안범균을 바라봤다.

안범균은 강민상을 제압하던 중 몇 대를 얻어맞았다. 그뿐만 아니라 안경이 부러지는 사고까지 겪었다.

"고생은 네가 다 했지."

"그런 소리 마."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박미향이 다가와서 따뜻한 커피를 내밀었다.

"두 분 다 수고 많으셨어요."

"······."

"응급실 근무만 4년째 하고 있는데 아동학대를 잡아낸 건 오늘이 처음이네요."

박미향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최 선생님은 예전에 응급환자에게 흉강천자도 했다면서요?"

"네."

"예전 일도 그렇고, 오늘 일도 그렇고 최 선생님은 정말 보통이 아닌 것 같아요."

"뭐랄까. 주변에서 절 가만히 안 내버려 두는 것 같아요."

최기석의 농담에 박미향과 안범균이 피식 웃었다.

대화가 끝나고 평온한 시간이 이어졌다.

병원에서 난리가 난 것을 알기라도 한 듯 환자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최기석은 여유시간에 상태창을 살폈다.

강민상을 제압하고 경찰에 넘길 때 새로운 칭호를 얻었다.

[Brave Man]

- 환자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명감에 경의를 표합니다. 단결!

- 호감도가 +10 상승합니다. 평판이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 스킬 성공률이 10% 증가합니다.

칭호의 효과는 좋았다.

대인관계에 관련된 수치는 물론이요 보너스로 스킬 성공률도 올려 주었다.

하지만 새로운 칭호를 얻은 기쁨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앞으로 칭호를 볼 때마다 강민아가 떠오를 테니까.

"저기. 실례합니다."

응급실 한쪽에 누워있던 환자가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복통으로 수액을 맞고 있던 박광수 환자다.

"저 KTB 방송국 기자인데요. 오늘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을 기사로 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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