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45화 (45/407)

새로운 바람(3)

"원래 왼손잡이 아니었어?"

최기석이 니들홀더를 바꿔 쥔 것을 발견한 정상혁이 한마디 했다.

"아니요. 전 원래 오른손을 씁니다."

"······."

"······."

최기석의 대답에 잠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왼손잡이도 아닌데 그만한 스피드와 정확도를 보여 주다니, 최기석의 봉합을 봤던 이들은 하나같이 치를 떨었다.

특히 조태호는 똥 씹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 그럼 특별 매치를 시작합니다. 제한시간은 3분. 준비······ 시작!"

진행자의 외침에 두 사람이 동시에 봉합사 포장을 벗겼다.

'제대로 보여 주지.'

니들홀더로 바늘을 쥐고 조이자 끼기긱 하는 소리가 퍼졌다.

이후 포셉으로 모형의 조직을 잡은 후 바늘을 깊숙하게 집어넣었다.

상처 양쪽 부위를 연결하고서 이번에는 바늘을 양쪽 피하조직에 통과시켰다.

실을 당기가 상처 부위가 적당히 당겨졌다.

그 상태에서 번개같이 엄지 매듭법으로 봉합을 마쳤다.

찰칵!

봉합사를 잘라 내는 소리가 경쾌했다.

봉합 하나를 끝내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20초도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신기의 손놀림.

봉합 부위가 깔끔하다는 것도 놀라웠다.

"우와. 대박인데?"

"인턴 맞아?"

관중들의 탄성에 김대현이 슬쩍 최기석을 응시했다.

이제 막 피하조직을 뚫으려고 하는데, 인턴은 벌써 봉합을 끝내 버렸다.

똥줄이 탔다.

여기서 지면 레지던트 체면은 쓰레기통으로 버려진다.

"야. 인턴한테 지면 죽는다."

"기석아. 파이팅."

양쪽의 응원전이 시작됐다.

응원과 더불어 두 사람의 봉합 속도에도 불이 붙었다. 눈에서는 광채가 뿜어졌으며 손은 바람처럼 움직였다.

'미쳤네. 미쳤어.'

김대현은 최기석이 봉합하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봉합실력을 보면 웬만한 수술은 직접 집도해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수술 과정을 이해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하겠지만 말이다.

막간의 응원이 끝나고 숨 막히는 긴장감이 찾아왔다.

최기석과 김대현은 환상적인 손놀림을 뽐내며 봉합을 이어갔다.

"시합 끝! 손 내려놓으세요."

진행자의 말에 경기가 끝났다.

봉합을 지켜보던 이들이 두 사람의 모형을 보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특별 매치의 승자는 최기석.

그는 레지던트가 모형 하나를 꿰맬 때 무려 두 개의 모형을 꿰맸다.

속도 차이가 두 배나 났던 것이다.

"특별 매치의 승자는 최기석 인턴입니다. 상품으로 태블릿 PC를 드리겠습니다. 다들 박수."

짝. 짝. 짝. 짝.

최기석은 박수세례를 받으며 안됐다는 표정으로 레지던트를 응시했다.

김대현은 충분히 실력 있는 레지던트다

단지 상대를 잘못 만났을 뿐.

"최기석이라고 했지?"

태블릿 PC를 챙겨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뒤를 돌아보니 흐뭇하게 웃고 있는 김대현이 보였다.

"너 봉합 솜씨가 장난 아니다?"

"감사합니다. 평소부터 꾸준히 연습해서요."

"그건 그렇고 너 성형외과 안 올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흉부외과 픽스턴입니다."

"벌써 픽스턴?"

김대현이 혀를 내둘렀다.

픽스턴은 10월이나 11월쯤 결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인턴 시작한 지 세 달 만에 픽스라니, 그것도 과 계열 중 악명이 높은 3D과 흉부외과로 말이다.

김대현은 최기석의 봉합 솜씨에 한 번 놀랐고 파격적인 결정에 또 한 번 놀랐다.

"생각을 바꿔 보는 건 어때?"

"죄송한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꽉 막힌 자식.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성형외과가 얼마나 매력적인 줄 알아? 게다가 너만 한 솜씨라면 충분히 수부외과도 갈 수 있어. 어때 탐나지 않아?"

수부외과는 손, 손목, 손가락, 팔다리를 전문적으로 성형하는 성형외과 내 분과다.

대표적인 수술로는 절단 환자의 신체 부위를 봉합하는 것이다.

성형외과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별다른 마음의 변화가 없었건만 수부외과라는 이야기에는 마음이 동요했다.

절단 부위를 봉합하는 수술은 외과수술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새로운 임무, '성형외과 인턴으로'가 생성되었습니다.]

[성형외과 인턴이 되어서 연계 임무를 수행하면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90일 이내에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임무는 사라집니다.]

"천천히 생각해 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네."

최기석은 그대로 회의실을 떠났다.

알림이 주는 여운을 느끼며.

* * *

봉합대회가 끝난 지 나흘이 지났다.

숨 가빴던 병동 업무를 마친 최기석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모처럼 오프, 발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웠다.

'할 게 많네.'

속으로 중얼거렸다.

논문도 봐야 하고 아침에 끝내지 못한 봉합 연습도 해야 한다.

하지만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다는 게 오히려 기뻤다.

요새 들어 스킬들의 진척도가 좋았으며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성장하는 재미의 푹 빠진 것이다.

깜깜하기만 했던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의라는 목표.

그것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듯 했다.

"성형외과라······."

휴게실에 자리를 잡은 최기석이 중얼거렸다.

흉부외과에 대한 신념은 확고하지만 성형외과 쪽에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김대현의 제안은 매혹적이었고 새로운 임무도 생겼으니까.

선생님에게 이야기하고 성형외과에 잠깐 있어 볼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야. 신의 손."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민주혁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봉합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민주혁은 최기석을 신의 손이라고 놀리곤 했다.

"뭐하냐?"

"잠깐 쉬고 있어요. 커피 드실래요?"

"좋지."

최기석은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민주혁에게 내밀었다.

"오늘 당직이세요?"

"어. 벌써부터 졸려 죽겠다. 오늘은 어떻게 버티련지······."

민주혁이 커피를 들이키고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 봉합대회 우승하고 태블릿 PC 받았잖아."

"네."

"그거 나한테 팔면 안 되냐? 값은 적당히 쳐줄게."

"벌써 임자한테 넘겼어요."

"임자? 누구?"

"아는 동생이요."

최기석이 웃으며 말했다.

태블릿 PC를 받은 당일, 편의점 택배를 통해 고아원에 있는 김정혁에게 보냈다.

화상통화로 김정혁이 태블릿 PC를 받고 좋아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넌 오프지?"

"네."

"칫. 잘 먹고 잘 살아라."

민주혁이 휴게실을 떠나고, 최기석은 병동을 한 바퀴 돌았다.

푹 쉬기 전에 환자들의 상태를 한 번 살펴보고 싶었다.

'오늘은 별일 없겠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를 다 살핀 후 병동 복도를 가로질렀다.

"크크크크크."

스테이션에 있는 강하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왜 그래요?"

"유머자료가 웃겨서요. 초 인턴 쌤도 한번 맞춰 볼래요?"

"퀴즈 같은 거예요?"

"네."

강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퀴즈의 이름은 여자들의 문자 속뜻 맞추기.

말 그대로 여자가 문자를 보냈을 때 그 속에 담긴 진심이 무엇인지 맞추는 것이다.

"여자친구랑 다투는 중인데 여자친구가 화난다고 문자 보내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것도 문제라고 내요?"

"오올. 그럼 정답이 뭔데요?"

"문자 보내지 말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안 보내야죠. 더 보내면 화낼 텐데."

최기석의 대답에 강하나와 곁에 있던 이민지가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초 인턴 쌤. 솔직히 여자친구 한 번도 안 사귀어 봤죠?"

"아예 안 사귄 건 아닌데······."

"그럼 사귄 사람하고는 얼마나 갔어요?"

"50일?"

"그러면 그렇지."

강하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자 보내지 말란다고 안 보내면 어떻게 해요. 풀릴 때까지 다독여 줘야죠."

"아니. 그러면 애초에 문자를 보내지 말라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죠."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보내지 말라서 안 보내는 건데 왜 그걸로 태클을 건단 말인가.

"휴우······ 그럼 딱 한 문제만 더 내 볼게요. 뭐. 결과가 빤히 보이지만."

강하나가 말을 이었다.

"초 인턴 쌤이 놀고 있는데 여자친구가 자기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놀라고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예요?"

"당연히 고맙다고 하고 잘 놀아야죠."

최기석의 대답에 강하나와 이민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만하면 중증이네. 넌 어떻게 생각해?"

"이번 생에서 연애하기는 틀린 것 같아요."

"왜요? 또 틀렸어요?"

"당연하죠.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어떡해요? 중간중간 연락을 해 줘야죠."

"미치겠네."

최기석은 답답함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도대체 왜 문자 내용하고 속뜻이 달라요?"

"실제 내용하고 속뜻이 다르니까 퀴즈가 되는 거죠. 초 인턴 쌤은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강하나가 쯧쯧 혀를 찼다.

바로 그 순간, 알림이 뇌리를 스쳤다.

띠링!

[특별 임무, '여심을 얻어라'를 획득하셨습니다.]

[여자 동료의 호감도를 얻으면 유니크 스킬이 주어집니다.]

[마음의 조각(0/2)]

"왜 그래요?"

"그냥 충격을 받아서······ 전 가 볼게요."

최기석은 그대로 병동을 벗어났다.

며칠 사이에 임무를 두 개씩이나 받다니, 전례가 없는 일이다.

"뭔 임무가 이래?"

최기석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동안 받은 임무는 '스킬 배우기', '최고를 향해서', '성형외과 인턴으로' 같은 치료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임무는 치료나 환자 관리와 무관했다.

난데없이 여자 동료의 호감을 얻으라니······.

"설화야.

걷던 도중 정설화와 마주쳤다.

착각인지 몰라도 정설화는 낯빛이 좋지 못했다. 눈은 살짝 풀렸으며 걷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응급실 야간?"

"응. 넌 오프야?"

최기석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정설화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4/10

주 증상: 고열 / 두통 / 기침

아픈 부위: 호흡기

진단명: 독감

현재 상태: 비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너 독감 걸렸어?"

"그······ 그걸 어떻게······."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최기석은 정설화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핫팩에 손을 댄 것처럼 후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정확한 체온은 재 봐야겠지만 38도는 충분히 넘을 듯 했다.

"응급실 가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

"오늘만 버티면 내일 오프야. 괜찮아."

"그러니까 오늘도 쉬고 내일도 쉬라고."

최기석의 말에 정설화가 놀란 토끼눈을 했다.

"내가 너 대신 응급실 근무 설게."

"아······ 아니야. 너도 피곤할 텐데. 게다가 도중에 수술실에서 콜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정설화가 절대 안 된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까 푹 쉬고 내일 보자."

정설화가 인사하고 최기석을 지나쳤지만 최기석은 정설화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

"내 걱정은 말고 기숙사로 가."

최기석은 정설화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그녀가 기숙사 쪽을 바라보게 했다.

"정말 괜찮다니까."

"네가 괜찮은 건 아는데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보육원 때 신세진 것도 있잖아."

최기석은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 냈다.

만약 수술실에서 응급콜이 오면 그때 정설화가 응급실에 오면 된다 등.

정설화가 근무를 안서도 되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럼 너무 미안한데······."

"정 그러면 나중에 맛있는 거나 사 줘."

결국 최기석은 정설화를 떠밀어 기숙사로 보냈다. 그리고 격려를 걸어 준 후 응급실로 향했다.

과거 최기석도 인턴 생활 중 대상포진에 걸려 고생한 적이 있어서 정설화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인턴인 것도 서러운데 아프기까지 하면 그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

게다가 겸사겸사 여심을 잡아라 미션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 기석이 네가 왜 응급실에?"

최기석이 응급실에 들어서자 안범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범균은 정설화의 응급실 짝턴이다.

"설화가 독감에 걸려서 대타로 왔어."

"그래? 혹시 너희 둘이······."

안범균이 음흉한 표정으로 최기석을 훑었다.

"형이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고된 인턴 생활, 그 속에 싹트는 사랑이라. 이거 완전 드라마 소재네."

"그러니까 아니라고."

최기석은 툴툴거리며 안범균의 시선을 피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