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은 곳을 향해서(6)
윤지혜는 여배우 강사랑을 닮았다.
예쁜 것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고 행동 하나하나에서 왠지 모를 기품이 느껴졌다.
그의 이상형에 가까웠다.
"너도 좋지?"
"글쎄요."
최기석은 말끝을 흐렸다.
오늘 처음 봤고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라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굳이 평가를 하자면 윤지혜는 경계 대상이다.
장혁필과 더불어 조지환 과장이 꽂은 인물이기에.
"난 윤 선생님 보면 가슴이 터질 것 같더라. 외모에 몸매에, 아우!"
민주혁은 최기석의 의견은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다는 듯 자기 할 말만 했다.
"윤 선생님이 예쁘기는 하죠."
"그냥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완전 사랑스럽지."
"웃지도 않고 하루 종일 무표정인데요?"
"그것도 매력이야."
민주혁이 실실 웃었다.
"그보다 장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장 교수님? 백진대 동기랑 통화해 보니까 실력도 좋고 성격도 시원시원하다고 하더라. 좋은 분이래."
그 좋은 사람이 왜 조지환 과장 밑으로 들어왔어요?
최기석은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은 간신히 참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운을 뗐다.
"선배. 앞으로 의국이 어떻게 될까요?"
최기석은 진지하게 물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장혁필과 윤지혜의 전공은 심장외과.
조기환은 송명진을 쳐내기 위해 두 사람을 데려왔을 확률이 높았다.
체력: 6/10
진단력: 3/10
외과적 처치: 3/10
내과적 처치: 2/10
평판: 6
액티브 스킬: 없음
패시브 스킬
[줄 타기 Lv.2]
- 병원 내 권력 관계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처신해 상급자로부터 호감도와 신뢰도를 얻습니다.
- 레벨이 오를수록 획득하는 호감도와 충성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최대 레벨은 3입니다.
민주혁에게는 줄타기라는 특이한 패시브가 있다.
의국 내 정치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것이다.
궁금했다.
과연 그는 지금의 정세를 어떻게 읽고 있을까.
"아직 섣부르게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민주혁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장 교수님이 과장님의 꼭두각시로 남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평소대로 스케줄을 소화했다.
일찍 일어나서 논문을 살폈으며 이후에는 아지트에서 소 심장으로 수술 연습을 했다.
"보는 거랑은 확실히 다르네."
최기석은 수술 도구를 들고 미적거렸다.
어제 촬영한 동영상을 보며 혼자 CABG 수술에 도전하는 중이다.
고난도 수술이라서 보고 따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송명진처럼 양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다는 점.
어시스트가 없다는 점.
이 두 가지가 발목을 잡았지만 최기석은 군말 없이 어려움을 이겨 냈다.
아니 즐겼다.
송명진의 제자가 됐다는 사실.
이렇게 혼자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이 있다는 사실.
CABG 수술 과정을 몇 번이고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의 성장을 도와주는 축복이다.
짜증이나 불평 따위는 감히 할 수 없었다.
"아쉽다."
최기석은 시간을 확인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CABG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이제 좀 재미를 좀 볼까 싶었지만 병동에 올라가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청소를 후다닥 끝내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 * *
모처럼의 오프.
최기석은 병원 인근 한약방에서 배즙을 사서 송명진의 원룸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의료모드로 본인을 살폈다.
직업 및 전공: 레지던트/흉부외과
체력: 3/10
진단력: 8/10
외과적 처치: 5/10
내과적 처치: 3/10
평판: 6
.
.
.
최기석은 상태창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매일 소 내장으로 연습한 덕분에 외과적 처치가 한 단계 상승했다.
한 달 만에 수치를 올렸으니 엄청난 쾌거다.
피나는 노력과 송명진의 제자 버프.
이 두 가지의 상승효과가 처치 레벨 상승의 원인이다.
"······."
길을 걷던 중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한 여자에게 쏠리는 것을 경험했다.
여자는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으며 단정한 원피스를 입었다.
외모만 보면 연예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최기석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다른 남자들도 여자를 힐끔힐끔 훔쳐보기 바빴다.
"네. 다 왔습니다."
여자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며 의진대병원을 향했다.
퍽!
여자에게 한눈을 팔다가 앞에서 걷던 행인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최기석은 사과를 하고 가던 길을 갔다.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는 생각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 목적지에 도착했다.
띵동!
벨을 누르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웬일이에요?"
송명진이 놀란 얼굴로 최기석을 바라봤다.
"드릴 게 있어서요. 이거 받으세요."
최기석은 송명진에게 배즙 박스를 내밀었다.
송명진은 요즘 들어 피로한 기색을 많이 내비쳤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건강을 챙겨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됐으니까 최 선생이 먹어요."
"안 됩니다. 교수님 드리려고 사 온 거예요. 그리고 교수님 평소에 기침 많이 하시잖아요. 배즙이 기침에 좋다고 합니다."
"허허. 그것 참."
송명진이 뒷머리를 긁다가 배즙 박스를 받았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
"바쁜 게 아니면 잠깐 이야기 좀 하다 갈까요?"
"네."
최기석은 안에 들어가 식탁 의자에 앉았다.
송명진의 원룸은 조촐했다.
조선시대의 청빈한 선비가 필요한 물건만 두고 생활하는 듯한 분위기가 났다.
이 방만 놓고 보면 흉부외과 부교수가 지내는 방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원룸의 소박한 내부가 아니다.
병원 옆에 자리를 잡은 송명진의 마음씨다.
송명진은 응급환자가 나타날 것을 대비해 원룸에 대기했다.
오직 일주일에 한 번 집에 갈 뿐이다.
"저녁은 먹었어요?"
"네. 방금 먹고 왔습니다."
"그럼 가볍게 한잔하죠."
송명진이 소주병과 잔, 견과류가 담긴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교수님께서 술을 마시자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요?"
송명진이 최기석의 잔을 채웠고 최기석도 송명진의 잔에 술을 채웠다.
챙!
술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최기석은 소주를 꿀떡 삼켰다. 그런데 술을 마신 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 이거······."
"맞아요. 그냥 물이에요. 응급환자가 언제 올지 모르는데 술을 마실 수는 없잖아요?"
송명진이 견과류를 먹으며 말을 이었다.
"이러면 적어도 술을 마시는 분위기는 낼 수 있죠."
"역시 교수님은 대단하세요."
최기석은 다시 한 번 송명진에게 감탄했다.
더불어 이렇게 능력 있고 환자를 위하는 사람이 대접 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원래대로라면 송명진이 흉부외과 과장이 됐어야 하는데······.
"이제 와서 말하는 게 새삼스럽지만 최 선생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저야 교수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아니에요. 실력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게 보여요. 본인이 몰라서 그렇지 논문 읽는 속도나 감상문 내용은 웬만한 전문의 뺨 칠 정도예요."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그 자세예요."
송명진이 최기석의 왼손을 가리켰다.
최기석은 술을 마실 때나 안주를 집어 먹을 때 계속 왼손을 쓰고 있었다.
즉 일상에서도 왼손 쓰기 연습을 꾸준히 한다는 증거다.
"그런 열정이라면 생각보다 빨리 양손을 쓸 겁니다."
"아. 네."
최기석은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요즘은 왼손 쓰는 일이 버릇이 돼서 특별히 왼손을 써야겠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술잔 아니 물 잔을 기울이면서 대화가 깊어졌다.
병원 돌아가는 이야기, 흉부외과 의사들 이야기, 환자들 이야기 등등.
화제가 넘쳐서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교수님. 저 오늘 새로운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기석이 화제를 바꿨다.
"아무래도 조지환 과장이 교수님을 어떻게 해보려고······."
"괜찮아요."
최기석이 말을 흐렸지만 송명진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건 환자예요. 구태여 다른 부분까지 생각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송명진이 화제에 매듭을 지었다.
지이이이잉.
대화를 도중 송명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두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지금까지의 훈훈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집 전화네요."
"다행이다."
송명진의 말에 최기석은 몸의 긴장을 풀었다.
전화만 울리면 입이 바짝 마르고 긴장하는 것, 그것은 외과의에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여보세요. 어. 나예요."
[······.]
"최 선생이랑 술 한잔하고 있어요."
[······.]
"잠깐만요."
송명진이 통화를 끊고 아내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휴대폰 화면 속에 아내와 두 딸이 모습을 드러나자 송명진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통화하는 목소리에는 밝은 기운이 감돌았다.
세상에 모든 행복이 이 자리에 찾아온 듯한 분위기다.
최기석은 송명진이 행복해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송명진도 사람이라는 것을, 한 가장의 기둥이자, 두 딸의 아버지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최 선생. 이리와 봐요."
"네."
최기석은 송명진 옆에 앉은 후 송명진의 아내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최 선생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우리 남편 잘 부탁해요. 남편이 요새 최 선생님 때문에 살맛 난대요.]
"흠흠. 왜 괜한 소리하고 그래요?"
[당신은 솔직하지 못해서 탈이야. 일 잘하고 주말에 봐요]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영상통화가 끝나고 방 안이 고요해졌다.
송명진은 통화가 아쉬웠는지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술잔을 비웠다.
"최 선생이 보기에 나는 어때요?"
"실력이나 마음씨나 모두에게 존경 받을 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은 고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요."
송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죠. 난 평생을 의술을 쏟아 부었지만 정작 가족과는 추억을 남기지 못했어요."
"······."
"첫째와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수술실에 있었고, 아내가 아팠을 때는 외국에 있었어요."
"······."
"그뿐이 아니에요."
송명진이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의사들에게는 끊임없이 견제를 받으며, 몇몇 사람들은 내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벼르고 있기도 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최기석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명예와 굴곡을 수없이 넘겨 온 송명진의 삶을 어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의술만 보고 달리는 의사는 외롭습니다. 몸은 병원에 묶여 있고 마음은 환자에게 묶여 있어요. 사방에는 시기, 질투하는 동료가 시시각각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죠. 최 선생은 이 모든 걸 견딜 수 있겠어요?"
송명진의 말투에 도발하는 기색이 담겼다.
"저는 견딜 수 있습니다."
최기석은 송명진과 눈을 마주치며 운을 뗐다.
"아까 교수님께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고 하셨죠? 전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될 수 있으면 모든 걸 다 잃어도 좋습니다."
"배짱은 마음에 드네요."
송명진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가능하면 결혼은 빨리해요."
"겨······ 결혼이요?"
뜬금없는 화제 전환에 최기석이 바보처럼 되물었다.
"세상이 최 선생을 버려도 최 선생을 지켜 줄 단 한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나도 아내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
"지금부터 부지런히 찾아봐요. 그 단 한 사람을."
이후 송명진은 아내와의 연애담을 늘어놓았고 최기석은 그것을 가만히 들었다.
처음으로 듣는 송명진의 인간적인 이야기.
자신도 모르게 그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시간이 도둑맞은 것처럼 지나갔다.
"교수님.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요."
송명진이 현관 앞에 서서 최기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최기석은 원룸을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 대화를 통해 의사 송명진과 인간 송명진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더 엿보았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를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버려도 지켜 줄 단 한 사람이라······. 교수님이 그런 느끼한 말을 하다니······."
최기석은 웃음을 터뜨리며 느긋하게 걸었다.
그런데 병원 앞에 도착했을 때 건너편 횡단보도에 있는 강하나를 발견했다.
사복인 것을 보면 나이트 출근인 듯 했다.
후임들을 챙기려는지 야식이 든 비닐 봉투가 양손에 들렸다.
"초 인턴 쌤!"
강하나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최기석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횡단보도 앞을 지켰다.
기왕 마주쳤으니 함께 병원까지 갈 생각이다.
이윽고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힝. 무거워 죽겠어요."
강하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횡단보도를 건넜고 최기석도 반대편에서 강하나를 향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대형 트럭 한 대가 횡단보도로 달려들었다. 하필이면 강하나가 있는 쪽으로.
최기석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강 선생님!"
최기석의 외침에 강하나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뒤늦게 그녀를 덮쳐오는 트럭을 바라보았다.
툭!
손에서 비닐 봉투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