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은 곳을 향해서(5)
최기석은 병동 복도를 걷던 중 짝턴 고우혁을 마주쳤다.
고우혁은 이번 달 짝턴으로 의진대 출신 동기다.
"처치 끝났어?"
"이제 막."
고우혁이 힘없이 대답했다.
낯빛이 유난히 어두웠다.
그가 아는 고우혁은 항상 주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고 농담도 자주했는데······.
불안한 마음에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3/10
주 증상: 우울증
아픈 부위: 정신
진단명: 우울장애
현재 상태: 비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우울증이라······.'
최기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과거의 그도 인턴 시절에 우울증으로 크게 고생했다.
특히 관장을 하거나 소변줄을 꽂을 때면 이런 취급 받으려고 의사가 된 게 아닌데, 내가 계속 의사 생활을 해야 하나.
그런 회의가 들기도 했다.
실제로 그런 회의를 견디지 못하고 인턴 기간 중 병원을 뛰쳐나가는 인턴도 적지 않고 말이다.
"회의 준비 빨리 끝내고 쉬자."
최기석의 말에 고우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회의 준비를 끝내고 휴게실로 이동했다.
"요즘 힘들지?"
"죽겠어."
고우혁이 말도 말라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가는 과마다 동네북처럼 얻어맞고 있어. 레지 잔소리에, 간호사 태클에, 환자 눈치까지 보느라 미칠 것 같아."
고우혁의 절규에 최기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판기 커피를 뽑아서 고우혁에게 내밀 따름이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사람에게 어설픈 위로만큼 독은 없다.
무거운 침묵 속에 고우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넌 안 힘들어?"
"당연히 나도 힘들지. 그래도······."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흉부외과에서 잘해 보고 싶다는 목표가 있어서 버틸 만해. 넌 생각해 둔 과 없어?"
"아직."
고우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지금이 원하는 과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가야 할 곳이 정해지면 너도 달라질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정말 그럴까?"
"날 믿어."
두 사람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휴게실을 나왔다.
"오늘도 힘내 보자."
최기석은 고우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격려를 사용했다.
[격려 스킬을 사용하였습니다.]
[대상의 면역력, 재생력, 자신감이 대폭 상승합니다.]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격려가 안 먹혔다면 고우혁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을 테니까.
이윽고 선생들이 하나둘 얼굴을 비쳤다.
"안녕하세요."
최기석은 회의실에 들어오는 선생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런데 도중에 낯선 여의사가 눈에 띄었다.
여의사의 이름은 윤지혜.
체구는 작았으며 머리는 단발이다. 백옥처럼 하얀 피부와 무표정이 인상적이다.
"네."
최기석의 인사에 윤지혜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혜의 등장에 다른 레지들과 전임의들도 동요한 기색을 보였다.
"혹시 새로 오신 선생님이세요?"
민주혁이 용감하게 말을 걸었다.
"네."
윤지혜의 짤막한 대답에 민주혁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 잘해 봐요 등등의 인사가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윤지혜는 단 한 마디로 화제를 끊어 버렸다.
덩치가 큰 중년 남자가 회의실로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다시 바뀌었다.
남자의 가운에는 장혁필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기석 인턴?"
"네. 맞습니다."
"조 과장님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픽스턴이라고 들었는데 앞으로 잘해 봅시다."
장혁필이 씨익 웃으며 최기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 네."
오늘 처음 보는데도 장혁필과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그가 조지환에게 벌써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점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식사는 하셨죠?"
장혁필의 활기찬 인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혹시 새로 오신 조교수님이십니까?"
"네. 다들 반갑습니다."
민주혁의 물음에 장혁필이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장혁필의 서열은 조지환 과장, 송명진 부교수 다음이다.
흉부외과의 3인자인 만큼 그의 행동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시간이 흘러 흉부외과 인원들이 전부 회의실에 모였다.
"다들 알겠지만 오늘 새로운 식구들이 흉부외과에 왔습니다."
조지환이 장혁필과 윤지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장 선생님은 백진대 흉부외과 조교수를 지냈으며 미국 칼리트 대학 흉부외과에서 2년 연수를 받고 올해 초에 귀국했습니다. 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장혁필입니다."
장혁필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을 이었다.
"전에 있던 병원에서는 스태프들이 장혁 삘 난다고 하던데. 여러분이 보기에도 그런가요?"
장혁필의 농담에 몇몇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걸 보니 역시 아부성 발언이었군요. 물론 저도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 조지환 과장님을 도와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짝. 짝. 짝.
박수가 쏟아졌다.
"윤 선생님은 장 교수님과 함께 백진대 흉부외과에 전임의로 있었고 겸임교수로 우리 병원에 왔습니다. 윤 선생님?"
"네."
조지환의 외침에 윤지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흉부외과의 홍일점이자 유일한 꽃인 그녀에게 모두의 눈길이 쏠렸다.
"윤지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윤지혜가 소개를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지독하게 짧은 소개로 회의실에 황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윤 선생님이 원래 차가운 도시 여자니까 다들 이해해 주세요."
장혁필이 한마디 거들자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본격적으로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과 통계를 봅시다. 가만 보자."
조지환이 문서를 훑다가 송명진을 응시했다.
"송 교수. 좀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분발이요?"
"이것 좀 보세요. 송 교수가 꼴지 아닙니까?"
조지환이 내민 서류에는 의사들의 각종 통계 수치가 들어 있었다.
외래에서 얼마나 많은 환자를 받았는지.
환자에게 얼마나 많은 검사를 하고 비급여 처치를 했는지.
입원환자를 얼마나 빨리 퇴원시키는지 등등이 말이다.
"한 달 동안 받은 환자도 많지 않고, 비급여 처치도 적습니다. 퇴원해도 좋은 환자를 오랫동안 입원시킨 케이스도 있네요?"
"나 좋자고 한 일 아닙니다. 다 환자를 위해서예요."
"환자는 그만 위하고 병원을 위하시죠."
탁!
조지환이 서류를 테이블에 내리쳤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자의 QOL(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도 병원의 일입니다."
"아직도 뭘 모르시네. 아니 앞으로도 평생 모르시려나?"
"······."
"환자는 돈이고 그 돈으로 병원이 움직이는 겁니다."
조지환과 송명진이 기 싸움을 벌이면서 숨 막히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두고 봐요. 계속 이런 식이라면 송 교수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조지환이 송명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과장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면서 자리를 떠났다.
더불어 송명진도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흠흠······ 그러면 환자 브리핑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개판이 된 분위기 속에 치프가 헛기침을 하며 회의를 진행했다.
잠시 후 회의가 끝나고 라운딩이 시작됐다.
조지환과 송명진이 자리를 비웠기에 장혁필을 중심으로 의사들이 뭉쳤다.
흉부외과의 두 기둥이 싸운 것을 봤음에도 장혁필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특유의 밝은 분위기로 라운딩을 이끌 뿐이다.
오늘 처음 출근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라운딩이 끝나고 본격적인 일과가 시작됐다.
* * *
"드디어 수술이구나."
최기석은 중얼거리며 수술실로 향했다.
오늘의 첫 번째 수술은 관상동맥 우회술.
통칭 CABG(Coronary Artery Bypass Graft).
관상동맥은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중요한 혈관으로, 이곳에 협착 및 폐쇄가 생기면 심장에 피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관상동맥의 대체 혈관을 만들어 주는 수술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관상동맥 우회술이다.
CABG는 흉부외과 수술 중에서도 난이도가 상당하다.
'오늘은 날이네.'
최기석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CABG의 집도의는 송명진.
동영상 촬영을 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이다.
스크럽을 끝내고 로젯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에게 타임아웃을 실시하는 동안 송명진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자리를 잡았다.
[용의 눈을 사용합니다.]
[수술에 필요한 최적화된 시야를 확보합니다.]
[동영상 모드 촬영을 실시합니다.]
알림이 연속으로 머리에 울렸다.
최기석은 수술 장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촬영하려는 의지에 불탔다.
"지금부터 CABG 수술을 시작합니다."
송명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수술실에 울렸다.
"메스."
송명진이 피부 소독을 끝내고 간호사가 건네는 메스를 쥐었다.
스으으으윽.
환자의 피부가 사정없이 반으로 갈라졌다.
피부절개 이후 정중 흉골 절개술이 이어졌다.
빠드드득. 빠드드득.
제1보조가 톱을 들고 환자의 흉골을 절단했다. 흉골 갈라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흉골이 절단이 끝나고 폐를 들추자 환자의 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심장이 힘차게 박동하며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캐뉼라 연결하세요."
"네."
제1보조와 제2보조가 캐뉼라 관을 연결했다. 덜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인공심폐기가 돌아갔다.
CABG의 막이 올랐다.
최기석은 견인기를 이용해 수술 시야를 확보했다. 그리고 용의 눈을 이용해 수술 장면을 생생하게 담았다.
"보비(전기 소작기)."
"석션(흡입)."
송명진은 거침없이 수술을 이어갔다.
보조들을 다루는 솜씨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CABG에 필요한 내흉 동맥을 박리하고 이것으로 새로운 혈관을 이어 주는 처치도 완벽했다.
수술의 교과서라고 불릴 만한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최종 문합이 끝나고 송명진이 수술 부위를 닫기 시작했다.
'역시 스승님이야.'
최기석은 또 다시 감탄했다.
보통 6시간 가까이 걸리는 CABG를 송명진은 4시간 만에 끝냈다.
이게 바로 월드 클래스라고 할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최기석은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촬영한 동영상을 확인했다.
수술의 A부터 Z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그것도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인정받는 송명진의 수술을 말이다.
입에서 감출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민주혁의 전화를 받고 당직실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음식 냄새가 훅 코를 찔렀다.
테이블 위로 치킨에 피자가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냈다.
"벌써 세팅까지 하셨어요?"
"우리 후배님 드셔야 하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민주혁이 너스레를 떨었다.
최기석이 픽스턴을 결정한 후부터 민주혁은 각별하게 그를 챙기고 있었다.
최기석을 흉부외과에 남겨 막내 탈출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였다.
초반에 경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우혁이는요?"
"아직 처치할 게 남았대. 끝나면 온다더라."
민주혁이 피자를 한 입 베어 물고 말을 이었다.
"빨리 와서 먹어. 식을라."
민주혁이 최기석에게 닭다리를 내밀었고 최기석은 웃으며 닭다리를 먹었다.
"요새 힘든 건 없지? 힘든 거 있으면 재깍재깍 말해. 가슴에 쌓아 두면 나중에 터진다."
"네. 그런데 저보다······."
최기석은 대답을 하고 화제를 바꿨다.
"선배가 우혁이 좀 챙겨 주시면 안 될까요?"
"우혁이? 왜?"
"요새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요. 선배가 상담 좀 해 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래. 이따가 따로 불러서 얘기 좀 해 볼게."
민주혁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팔린 가운데 민주혁이 운을 뗐다.
"야. 근데 윤지혜 교수님 대박 아니냐?"
"뭐가요?"
"내가 지금까지 본 여의사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
민주혁이 싱글벙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