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은 곳을 향해서(4)
송명진 같은 의사가 대한민국에 어디 또 있을까 싶었다.
'이런!'
발소리가 들려서 구석에 놓인 걸레를 들고 청소하는 시늉을 했다.
"아침에 해 놓고 또 청소에요?"
송명진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 네. 지저분한 데가 있어서."
"괜찮으면 나랑 야식이라도 먹죠."
"네."
최기석은 대충하던 청소를 끝내고 휴대폰을 들었다.
송명진이 한방 삼계탕을 원했기에 삼계탕 두 개를 시켰다.
"그나저나 오늘은 참 좋았어요."
송명진이 최기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간호사가 넘어지는 걸 막은 것도 그렇고, 대신 보조를 선 것도 그렇고. 최 선생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아니에요. 수술은 선생님이 다하셨는데요."
최기석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겸손하기는. 인턴 일에 내 숙제까지 하려니까 피곤하지 않아요?"
"멀쩡합니다. 그리고 그 정도는 견뎌야 교수님 같은 대가가 될 수 있죠."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송명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최 선생은 왜 많은 직업 중에 의사를 택했죠? 그것도 제일 힘들다는 흉부외과에."
"저는 전부터 심부전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올해 초에는 상태가 나빠져서 심장이식 수술도 받았고요."
"아······."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흉부외과에 관심이 갔습니다. 앞으로 송 교수님 같은 명의가 돼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최기석은 대답을 하고서 화제를 돌렸다.
"그럼 혹시 저도 여쭤 봐도 될까요? 교수님이 왜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셨는지."
"나 같은 경우에는······ 어렸을 때 여동생이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예전에는 결핵이 상당히 무서운 병이었거든요."
송명진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죠. 겨울에 여동생이 감기에 걸렸어요. 한동안 기침을 달고 살았고 낮에는 몸이 뜨거웠다가 밤에는 차갑게 식었죠. 하지만 가족 중 누구도 그게 결핵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
"동생이 피를 토한 뒤에야 병원에 데려갔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어요."
송명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당시의 참담함이 표정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동생이 죽는 걸 보고 결심했죠. 앞으로 그 누구도 내 앞에서 죽게 두지 않겠다고."
"······."
최기석은 침묵을 지켰다.
어설픈 대답이나 위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은 동생에게 죄책감과 슬픔을 느끼며 살아왔을 송명진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최 선생. 이번 수술을 하면서 한 가지 느낀 게 있어요."
"그게 뭐죠?"
"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거예요."
송명진의 말에 최기석은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나 다른 흉부외과의는 뭐가 되나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 피부로 느꼈어요. 아마 양측 폐 수술이었으면 실패했을지 몰라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최 선생에게 부탁 한 가지만 할게요."
"부탁이요?"
"네."
송명진이 그윽한 눈빛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그 부탁. 들어줄 수 있어요?"
"아직 어떤 부탁인지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대답부터 듣고 싶군요. 들어줄 수 있어요?"
"······네. 환자를 위한 일이라면 무조건 하겠습니다."
최기석의 씩씩한 대답에 송명진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최 선생은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건 이미 제 목표인데요?"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최 선생은 심장외과 쪽에서 최고가 되려는 거 아닌가요?"
"그건 맞지만······."
"저는 최 선생이 흉부외과의 모든 분과에서 최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인심장외과, 폐식도외과, 소아흉부외과 이 세 분야 전부에서요."
송명진이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만약 최 선생이 이 세 분야 전부에서 최고가 된다면 그 누구도 최 선생을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나처럼 조지환 교수와 다툴 필요도 없고요."
"······."
"부디 최고가 되세요. 누가 뭐래도 의사의 일은 환자를 치료하는 일입니다. 환자를 잘 치료하고 돌보는 의사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어요."
"명심하겠습니다."
최기석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명진의 말 하나하나가 가슴에 파고들었다. 전에는 느껴 본 적 없었던 열망이 온 몸을 휘감았다.
세 가지 분과를 모두 아우르는 흉부외과의라니.
더욱 커진 꿈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다.
띠링!
[특별 임무, '최고를 향해서'가 생성되었습니다.]
[임무 달성 조건]
- 성인흉부외과: 대동맥 수술 성공
- 폐식도외과: 양측 폐이식 수술 성공
- 소아흉부외과: 팔로 4징증 수술 성공
[임무 달성 시 특별한 스킬이 주어집니다.]
똑. 똑. 똑.
임무를 확인하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의국문이 열렸다.
"배달 왔습니다."
"네. 잠시만요."
최기석은 의국회비로 음식 값을 치르고 탁자에 신문지를 깔았다.
플라스틱 용기를 열자 뽀얀 국물과 잘 익은 백숙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닭 육수 냄새가 코를 간질이면서 마른침이 꿀꺽 목젖을 지나갔다.
"교수님. 맛있게 드세요."
"그래요. 오늘 수술 때문에 고생 많았는데 최 선생도 많이 먹어요."
본격적인 식사에 들어갔다.
최기석은 우선 다리의 살을 뜯은 후 국물을 들이켰다. 배달 삼계탕이라 맛이 별로일 거라고 생각했건만 아주 큰 오산이었다.
잘 알고 있던 닭백숙의 맛에 한약재의 맛이 가미되면서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송명진이 맞은편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식사에 열중했다.
이후 시간이 제법 흘렀다.
"후아······."
최기석은 식사를 끝내고 물로 입가심했다.
이만한 퀼리티라면 다음 야식으로 삼계탕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듯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송명진의 시선을 읽었다.
송명진은 플라스틱 용기 위에 놓인 닭가슴살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최기석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교수님. 이거 드실래요?"
"아······ 아니에요. 최 선생 먹어요."
"제가 퍽퍽 살을 안 좋아해서 따로 모아 놓은 거예요. 교수님이 안 드시면 버릴 건데······."
"버리는 건 아까우니까 내가 먹을까요?"
송명진이 닭가슴살을 모아 놓은 플라스틱 용기를 본인 쪽으로 가져갔다.
"교수님은 역시 흉부외과 체질이세요. 저는 발끝에도 못 쫓아갈 만큼이요."
"왜요?"
"닭가슴살을 제일 좋아하시잖아요."
최기석의 농담에 송명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사제 간의 첫 수술과 첫 식사를 가진 뜻 깊었던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 * *
조지환이 흉부외과 과장이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정치력과 배경으로 과장이 된 조지환.
눈 뜨고 과장 자리를 빼앗긴 송명진.
두 사람의 충돌로 피바람이 불 것 같았던 흉부외과지만 의외로 조용한 날이 이어졌다.
우선 폐이식 사건이 조용히 묻혔다.
심장 전문가인 송명진이 고난도 폐이식 수술을 성공시켰지만 조지환은 그것을 객기라 평했다.
우연히 결과가 좋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조지환의 정치 플레이에 송명진의 업적은 다소 묻히고 말았다.
다만 폐이식 사건 후 두 사람의 충돌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적인 자리뿐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그저 각자 스케줄에 맞춰 환자를 치료할 뿐이다.
변수가 되는 것은 조지환이 과장이 되면서 생긴 공석이다.
조교수 자리를 과연 누가 차지하느냐.
의국의 관심은 전부 거기에 쏠렸다.
* * *
시간이 흘러 흉부외과에서 보내는 두 번째 달이 찾아왔다.
픽스턴이 받아들여지면서 최기석은 다른 과에 가지 않고 흉부외과에 남았다.
최기석의 대한 평가는 좋았다.
그를 가장 좋아한 것은 환자와 간호사들이다.
우선 성격이 싹싹하고 시원했으며 모든 처치를 단번에 성공하니 미워할 수가 없었다.
최기석에 대한 의사들의 평가는 반반으로 나뉘었다.
최기석은 송명진의 제자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지환 과장을 중심으로 한 몇몇 의사들이 최기석을 견제했다. 하지만 최기석은 꼬투리 잡힐 일을 피하며 조용하게 지냈다.
오전 2시.
최기석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서 알람을 껐다.
습관이 돼서 그런지 일찍 기상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씻고 의사 가운을 걸친 후 컴퓨터에 앉아서 메일을 살폈다.
오늘도 송명진의 논문이 메일로 도착했다.
"흐음······."
최기석은 집중해서 논문을 훑기 시작했다.
제자가 흉부외과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일까.
최근 송명진은 심장 수술 논문을 비롯해 폐와 식도, 소아 수술에 관한 논문까지 보냈다.
최기석은 버프 효과로 논문을 빠르게 독파하고 짧은 감상문을 써서 보냈다.
첫 번째 숙제 끝!
그대로 아지트로 이동했다.
"역시."
최기석은 오늘도 문 앞에 놓인 스티로폼 박스를 보고 씨익 웃었다.
박스를 살짝 열자 신선한 소 내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장의 비린 냄새가 이제는 사랑스러웠다.
아무래도 뜨개질 연습보다는 소 내장으로 연습하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됐다.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수술 연습에 들어갔다.
연습의 절반은 오른손으로.
나머지 절반은 왼손으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비린내가 아지트를 휘감았다.
수술포 주변으로 피가 튀었으며 가위로 매듭 자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최기석은 실제 집도를 하는 것처럼 연습에 몰두했다.
"후아······."
한숨을 쉬며 손에 쥔 처치 도구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새로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용의 눈 스킬이 Lv.2로 상승합니다. 새로운 모드가 추가됩니다.]
모처럼의 알림이 귓가를 때렸다.
최기석은 서둘러 상태창을 살폈다.
패시브 스킬
NEW [난 왼손잡이야 Lv.1]
- 왼손의 처치 속도와 정확도가 증가합니다.
- 왼손만을 사용할 경우 왼손이 행하는 처치 정확도, 속도가 2배로 상승합니다.
- 레벨이 올라갈수록 처치 속도와 정확도 증가 폭이 상승합니다.
- 최대 레벨은 3입니다.
[용의 눈 Lv.2]
- 시선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줌 인 모드와 줌 아웃 모드가 생성 됩니다.
- 레벨이 올라갈수록 다양한 효과가 발휘됩니다.
- 신규 모드, 동영상 모드가 개방되었습니다.
모처럼 얻은 스킬을 확인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노력에 비해 얻는 게 없어서 지칠 때였거늘, 좋은 타이밍에 보상이 떨어졌다.
"동영상 모드라······."
턱을 쓸어내리며 동영상 모드를 사용해 봤다.
그러자 시야가 동영상 촬영 프로그램을 쓰는 것처럼 변했다.
프레임이 생기고 그 안에 영상을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영상 촬영을 시작하시겠습니까?]
하겠다고 마음먹자 프레임 아래의 시간 바가 서서히 움직였다.
바의 최대치를 확인하니 72시간이다.
즉 최대 72시간까지 동영상 촬영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최기석은 모드를 사용한 채 뒷정리를 시작했다.
시야가 부자연스러워서 청소가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그렇게 청소를 마무리 지은 후 동영상 촬영을 종료했다.
놀랍게도 스킬 하단부에 촬영한 동영상이 파일로 남았다.
"미쳤네."
최기석은 동영상을 분석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동영상은 말 그대로 동영상이다.
본인이 원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었고 필요 없는 부분은 넘길 수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놀랍게도 동영상 화면에도 줌 인 모드와 줌 아웃 모드를 쓸 수 있었다.
그 말인 즉 앞으로는 수술을 동영상으로 남긴 후 분석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걸 잘 활용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최기석은 설레는 발걸음으로 병동으로 향했다.
벌써 수술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