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울로(3)
병실에 들어가자 황정우가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황정우의 보호자 양지민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아침에는 제가 잠깐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못 뵈었네요. 정우한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요?"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황정우를 응시했지만 황정우는 딴청 피우며 코를 후볐다.
"선생님이 주사를 안 아프게 놔서 정우가 너무 좋았대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정우야. 선생님이랑 잠깐 검사 받으러 갈까?"
"네!"
황정우가 기다렸다는 듯 병상에서 내려왔다.
최기석은 황정우와 심전도실을 찾아서 심전도 검사를 시작했다.
심전도는 심장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기본 검사다.
인체에 고통을 주지 않는 비침습적 검사라서 환자들도 부담이 없었다.
"정우야. 이제 가자."
최기석은 황정우의 몸에 붙은 센서를 제거하고 결과지를 훑었다.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선생님. 나도 그거 볼래요."
"봐도 모를 걸?"
황정우는 최기석이 건네 결과지를 받고서 원수를 보듯이 노려보았다.
"이거 삐죽삐죽한 산 같은데······."
"그래서 봐도 모른다고 했지?"
"선생님은 무슨 뜻인지 알아요?"
"당연하지."
"그럼 이 산 같은 게 뭐에요?"
"우리 정우 심장이 뛰는 걸 기록한 거야. 신기하지?"
"내 심장이 이렇게 뛰어요?"
황정우가 왼손을 가슴에 얹었고 오른손 검지로 침상에 올려놓은 심전도의 그래프를 따라갔다.
"아닌데? 내 심장 이렇게 안 뛰어요."
황정우의 귀여운 대답에 최기석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검사를 마치고 황정우와 지하 1층으로 향했다. 모처럼 병실을 나왔으니 간식이라도 사 주고 싶었다.
"편의점 왔다. 먹고 싶은 거 골라봐."
"진짜요?"
"다 사 주는 건 아니야. 선생님이 봐서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안 사 줄 거야."
"네!"
황정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황정우가 다섯 가지 물건을 골라 왔다. 전부 요술워치 캐릭터가 붙어 있는 간식들이다.
"선생님. 최고!"
"그걸 이제 알았어?"
최기석은 간식을 사서 황정우와 병동으로 돌아왔다.
보호자에게 음식을 맡기고 나오는데 때마침 송명진 교수와 맞닥뜨렸다.
"심전도 결과 나왔어요?"
"네."
최기석은 송명진에게 결과지를 건넸고, 송명진은 결과지와 최기석을 번갈아 응시했다.
결과지 결과는 'abnormal'이다.
"판독은요?"
"제가 직접 했습니다."
"직접?"
송명진이 눈을 치켜떴다.
인턴이 EKG를 직접 판독하는 일은 없다. 보통 순환기내과의를 찾아서 판독을 부탁하는 게 보통이다.
"네."
"그럼 어디 판독을 들어 볼까요?"
최기석과 송명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선 세동파가 매우 불규칙적인데 분당 350에서 550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QRS 역시 분당 10에서 150회로 불규칙적입니다. 전형적인 심방세동 환자의 그래프입니다."
"으음······."
송명진이 턱을 쓸어내리다가 손에 들고 있던 차트를 뒤적거렸다.
"그럼 이것도 한 번 해독해 봐요."
"네."
송명진이 내민 심전도를 훑었다.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최기석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송명진이 그의 EKG 판독 실력을 의심하고 있음을.
아마도 송명진은 최기석이 내과의에게 미리 판독을 받아 놓고서 직접 판독하는 척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이건······."
최기석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딱히 드릴 말씀이 없는데요?"
"이유가 뭐죠?"
"아예 잘못 찍은 거니까요. I 유도에서 P파, QRS가 모두 음성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흉부유도는 정상이잖아요. 양팔을 바꿔서 찍은 것 같습니다."
"방금 그 해석. 정확합니까?"
"······."
"판독이 잘못되면 환자가 위험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책임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에게 돌아가죠. 어설픈 판독은 용납 못 합니다."
송명진이 거칠게 쏘아붙였다.
판독이 틀리면 최기석을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
하지만 최기석은 당당하게 판독지를 다시 송명진에게 건넸다.
"저는 제 판독을 믿습니다."
"그래요?"
송명진이 눈썹을 치켜뜨고 말을 이었다.
"사실······ 최 선생 판독이 맞아요. 이건 저번 달 인턴이 찍은 엉터리 EKG니까."
송명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솜씨가 대단한데요? EKG를 이 정도까지 해독하는 인턴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과찬이십니다."
"판독 공부는 따로 했어요?"
"네."
최기석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과거 심전도를 꾸준히 공부했다.
흉부외과, 그중에서도 심장외과 펠로우를 하려던 최기석이 아닌가.
EKG 판독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왔다.
"아까 민 선생에게 들었는데 흉부외과 전공에 벌써 픽스턴까지 할 거라면서요?"
"그렇습니다."
"앞으로 기대가 커요."
송명진이 최기석의 어깨를 두드리고 회의실로 향했으며, 최기석은 송명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교수님."
최기석의 말에 송명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폐이식 수술은 역시 교수님이 집도하시는 건가요?"
"네."
송명진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전국대 병원 흉부외과에 후배가 있어서 환자를 살펴봐 달라고 했는데 수술이 힘들 것 같다더군요. 그러더니 혹시 전원시키려는 거 아니냐며 펄쩍 뛰었어요."
"아······."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결국 환자는 버림받았다. 의진대 흉부외과에서도, 전국대 흉부외과에서도.
이제 그가 기댈 곳은 오로지 송명진뿐이다.
"저는······ 교수님이 꼭 수술을 잘 끝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송명진은 씁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최기석은 그 침묵을 음미하다가 스테이션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타이밍이 예술이네요."
스테이션 중앙에 앉은 간호사가 씽긋 웃었다.
"성인 병동에 백종현 환자 드레싱 오더 내려왔어요."
"바로 갈게요."
최기석은 드레싱 도구를 챙겨서 병실로 이동했다.
백종현은 창가 쪽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가슴에 흉관이 삽입되었다.
수술이 끝나고 혈흉이 생겼던 것이다.
최기석은 배액양과 배액물, 그리고 간호기록지를 살폈다.
아직 흉관을 제거할 때는 아니었다.
처치가 어렵지 않아서 환자와 적당히 대화하며 드레싱을 시작했다.
"아. 글쎄 말이에요······."
백종현은 그런 최기석이 반가웠는지 오늘 병동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
예상대로의 일.
환자는 원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병에 대해서도, 주변에 다른 환자에 대해서도, 의사에 관해서도.
그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쉽게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새로운 인턴 선생님이죠?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훈훈하게 대화를 마치고 병실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던 중 병실 앞에 걸린 환자 명패에 시선이 고정됐다.
강동호.
이름 석 자에 발걸음이 멈췄다.
폐이식 수술 예정 환자로 흉부외과에 불어닥친 폭풍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최기석은 환자 명패를 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강동호는 창가 쪽 자리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옆에 놓인 보호자 침상에는 아내로 보이는 여인이 잠을 자고 있었다.
강하나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환자의 큰아들이 병원에서 병동 보호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가정 형편은 좋지 않았고 말이다.
'왜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거지?'
최기석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환자는 의진대에서 수술받는 게 최선이다.
의진대 흉부외과는 폐이식을 할 능력이 있었으며 환자의 치료비 부담도 덜어 줄 수 있다.
조지환이 수술만 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쩌면······.'
불현듯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조지환은 일부러 송명진을 도발해서 수술하게 만든 게 아닐까.
송명진이 수술에 성공하더라도 조지환에게는 큰 손해가 없다.
반면 수술 실패 시에 얻는 반사이득은 어마어마하다.
송명진의 명성에 금이 갈 테고 자칫하면 의료소송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체력: 3/10
주 증상: 호흡곤란 / 기침
아픈 부위: 폐
진단명: 만성 폐쇄성 질환
현재 상태: 응급
경과: 매우 불량
과거력: 없음
'힘내세요. 저도 함께할 테니까.'
환자의 상태를 살핀 최기석은 강동호를 속으로 응원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때마침 스테이션에 있는 오혜정과 마주쳐서 간단하게 인수인계를 했다.
오늘 당직은 오혜정이다.
"나. 송 교수님 수술 스크럽 섰거든? 송 교수님 완전 대박인 거 알아? 손이 완전 휙휙휙 움직인다니까?"
오혜정이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송명진의 실력은 이미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확인했지만 집도를 직접 보고 싶기는 했다.
대화를 끝낸 후 최기석은 기숙사 침대에 몸을 던졌다.
* * *
"대단하네."
최기석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잠깐 눈을 붙였음에도 푹 잔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역환단의 체력회복 효과는 확실히 대단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딸칵! 딸칵!
마우스를 열심히 클릭하자 곧 동영상 파일이 떠올랐다.
"랄랄라라. 후우~ 랄랄라라. 후우~ 지금 이 순간에 전해지는 마음들······."
요술워치 오프닝을 보는 순간, 자괴감이 몰려왔지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참았다.
최기석 본인의 입으로 황정우와 약속했다.
요술워치를 꼭 보겠다고 말이다.
그러니 유치한 만화라도 봐야할 필요가 있었다.
"으음······."
최기석은 요술워치 3편을 연달아 시청했다.
어른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으로 보니 의외로 괜찮았다. 황정우가 왜 불사신 칼라일을 좋아하는지도 알았다.
결제한 영상을 다 본 후 모처럼 병원을 벗어났다.
병원 주변이 번화가라서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걷는 연인들, 길거리 음식을 먹고 있는 청년들, 회식 나온 직장인 등······.
일상적인 모습이지만 최기석은 그조차 신기해 보였다.
의사는 비일상을 일상으로 다루는 직업이다.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일상인 것이 의사에게는 비일상적이라는 것이다.
최기석은 상념을 접으며 근처 인형 가게로 들어갔다.
한쪽 벽면이 요술워치 캐릭터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요술워치의 인기는 폭발적이다.
반면 그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포켓 몬스터즈 인형들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격세지감이라고 할까.
최기석은 칼라일 캐릭터와 불사의 검을 사서 병원으로 돌아갔다.
도중에 편의점 앞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조태호와 남강준과 마주쳤다.
"······."
"······."
날카로운 침묵 속에 팽팽한 시선이 오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조태호다.
"너 이번 달에 흉부외과라며?"
"그래서?"
"픽스턴 박겠네."
조태호가 음료수를 마시고 손으로 캔을 찌그러트렸다.
"네가 흉부외과의가 되겠다는 건 안 말려. 돈도 벌기 싫고 죽어라 고생만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리겠어. 근데 말이야 우리 병원 흉부외과에 붙어 있을 생각은 하지 마라."
"협박이냐?"
"충고야, 충고. 친구 사이에 충고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조태호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껄렁껄렁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네가 너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말이야. 우리 작은 아버지가 흉부외과 교수다."
조태호의 한마디가 머리를 때렸다.
최기석은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머리를 굴렸다.
조태호의 작은 아버지라고 하면······.
"설마? 조지환 교수님?"
"잘 아네. 크크크큭."
조태호가 최기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장난스러웠던 웃음이 뚝 끊겼다. 조태호는 위협적인 기세로 말을 이었다.
"어디 버틸 수 있으면 버텨 봐."
조태호가 으르렁거리며 자리를 떠났고 남강준이 그 뒤를 따랐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 없더라."
최기석은 씁쓸하게 웃으며 병동으로 향했다.
황정우가 자고 있었기에 보호자에게 대신 선물을 건네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런데 기숙사 계단을 오르는 중.
어두컴컴한 2층 복도 끝 방에서 불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별관 2층은 각종 의료도구를 보관하는 곳으로 평소 인적이 드물었다.
그런데 이 야심한 밤에 불이 켜졌다니······.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최기석은 최대한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불이 새어 나오는 방 앞에 섰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시트가 깔린 테이블.
그 위로 싱싱한 장기가 올라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