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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2화 (32/407)

다시 서울로(2)

"진짜?"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 정 못 믿겠으면 태호한테 직접 물어보던가."

오혜정의 폭탄선언에 최기석은 어안이 벙벙했다.

남녀의 교재가 평생 가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나름 오래갈 거라 생각해 왔다.

설마 이렇게 깨질 줄은 몰랐다.

"뭘 그렇게 놀라? 누가 보면 귀신이라도 본 줄 알겠네."

"정말 귀신을 본 느낌인데?"

"설마 나랑 태호가 오래갈 줄 알았니? 하여간 넌 진짜 연애에 젬병이다. 널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 속이 새까맣게······."

오혜정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누군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을 말자. 말을 마."

"태호랑 깨진 지는 얼마나 됐는데?"

"두 달쯤. 거의 초턴 끝날 때였어."

"괜찮겠어? 조태호 그 새끼 뒤끝 장난 아니잖아."

"전혀 문제없어. 내가 차인 거니까."

오혜정이 시원시원하게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그 인간 비위 맞춰 주느라 진이 빠졌는데. 이제 완전 해방이다."

"근데 애초에 그 인간하고 왜 사귄 거야?"

"비즈니스랄까. 태호가 나한테 원한 게 있고 나도 태호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알면 다쳐."

오혜정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나저나 지금 내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태호가 너 손본다고 벼르는 중이야."

"할 테면 해 보라고 해."

최기석은 코웃음을 쳤다. 조태호의 보복이 두려웠다면 애초부터 갈라서지도 않았다.

"아주 자신만만하네."

"기죽을 이유가 없으니까."

"너 확실히 예전하고 많이 달라졌어."

오혜정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나 저번 달에 위장관외과 병동에서 일했거든? 거기 간호사랑 레지 선생님들이 네 칭찬을 그렇게 하더라."

"······."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어. 내가 알던 너는 PK실습 때도 어리바리했으니까."

"옛날이야기지."

"정말 그런가 봐. 요즘 네가 하는 걸 보면."

오혜정이 피식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최기석의 크록스에 닿았다.

"곰돌이를 달았네? 너한테 이런 깜찍한 취미가 있는 줄 몰랐는데?"

"설화랑 같이 한 거야."

"그래?"

오혜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최기석의 옆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거 알아? 네가 일찍 정신 차렸으면 태호가 아니라 너랑 사귀었을지 몰라."

오혜정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끈적한 분위기 계속되는 가운데 오혜정의 몸이 갑자기 옆으로 휙 기울었다.

최기석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다.

"뭐······ 뭐야?"

"회의할 시간 다 됐다. 빨리 가자."

최기석은 빠른 걸음으로 병동으로 복귀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오혜정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서.

회의실에 도착한 후, 프린트물의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선생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레지 1년 차부터 4년 차, 전문의와 전임의, 교수까지 회의실을 찾았다.

최기석은 의사들의 이름과 얼굴을 잘 기억해 두었다.

회의 시작 5분 전.

한 사람이 허겁지겁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는 구면인 민주혁이다. 최기석의 흉강천자를 꾸짖었던 흉부외과 레지 2년 차다.

"안녕하세요, 선배."

"어라······ 너는?"

민주혁이 최기석의 인사를 받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무언가를 말할 듯했지만 끝내 침묵을 지키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치프가 회의를 주관했다.

수술환자 위주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브리핑은 꼼꼼하고 정확했으며 갖가지 케이스 스터디 사례도 첨부되어서 이해가 쉬웠다.

의진대 흉부외과 수준은 역시 녹록치 않았다.

이윽고 프로젝터 화면이 바뀌면서 한 환자의 신상정보가 떠올랐다.

환자 이름은 강동호, 나이는 48세.

진단은 C.

O.

P.

D(chronic obstructive pulmonary disease).

즉 만성 폐쇄성 폐질환이다.

"얼마 전 이식관리센터에서 폐 기증자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잘 됐네요. 최대한 빨리 수술 잡죠. 안 그래도 환자 상태도 안 좋은데."

치프의 보고에 송명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 의견에 반대합니다."

잠자코 있던 조지환이 나섰다.

조지환은 흉부외과 조교수로 폐식도 질환 전공이다.

과장 자리가 공석인 상황에서 조교수와 부교수의 의견이 충돌하고 말았다.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유가 뭡니까?"

송명진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엄밀히 따지면 수술에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

"단지 저는 우리 병원에서 수술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조지환이 말을 마치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당연히 전원을 시켜야죠."

"전원이요?"

"네. 폐이식 수술은 전국병원 흉부외과가 가장 잘하니까 그쪽으로 보내는 게 좋겠군요."

"이 환자는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어 해요."

송명진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환자의 보호자가 우리 병원 직원이라는 거 모릅니까? 전원하면 치료비 문제는 어떻게 할 겁니까?"

송명진의 반박에 조지환이 입을 다물었다.

현재 환자는 직원 혜택을 받아 치료비 감면을 받고 있었다.

전원한다면 당연히 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그건 제 알 바 아닙니다."

"뭐라고요?"

"이 환자, 수술 중에 죽을 확률이 높습니다."

조지환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환자가 죽으면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병원 사망률도 올라갈 거고요. 그러니까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 없이 전원을 보내면 그만입니다."

조지환의 선언에 수술실에 냉기가 감돌았다.

흉부외과 수장들의 싸움에 다른 의사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안전이 보장된 환자만 수술하고 싶다는 이야기군요."

송명진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네. 맞습니다. 환자가 아니라 병원과 의국의 편의도 생각해야죠."

"······."

"아무리 송 교수님이라도 이번에는 제 의견을 따라 주셔야겠습니다."

조지환이 껄껄 웃었다.

송명진이 뛰어난 흉부외과의라고 해도 그 명성은 심장 수술로 쌓았다.

폐이식 수술의 전문가는 폐식도외과 전임의 조지환이다.

실제로 병원에서 이뤄진 네 번의 폐이식을 전부 조지환이 집도했다. 즉 조지환이 수술을 거부하면 사실상 누구도 이를 강제할 수 없는 셈이다.

당장 폭발한 듯 팽팽한 분위기 속에 송명진이 파문을 일으켰다.

"이 환자 수술합시다."

"지금까지 제 이야기 못 들으셨습니까?"

"아주 잘 들었죠."

"허허. 제가 수술을 안 할 건데 어떻게 수술을 진행하겠다는 말씀이죠?"

"내가 할 거니까요."

송명진의 폭탄 발언에 모두가 경악했다.

개중에 민주혁은 물을 마시다가 물을 탁자에 뿜어내기까지 했다.

"송 교수님의 실력이야 의심할 바가 없지만 말입니다. 폐이식까지 손댄다는 건 지나친 오만이 아닐는지."

조지환이 여유 만만하게 웃었다.

송명진은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심장외과 펠로우와 폐식도외과 펠로우를 전부 따낸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심장 수술의 대가임에도 폐식도 관련 수술도 집도할 수 있었다.

다만 그조차 폐이식 수술은 한 적이 없다.

폐이식 케이스는 희귀하니까.

"이식 수술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게 폐이식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압니다. 하지만······."

"······."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환자가 다른 병원에 가는 꼴은 못 봅니다. 이번 주 중으로 수술 날짜 잡아요."

"환자가 죽으면 당연히 송 교수님이 책임지시겠죠?"

"난 언제나 그래 왔어요. 자신이 없어서 환자를 벼랑에 떠미는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쾅!

송명진이 탁자를 내리치고 회의실을 떠났다.

이에 몇몇 의사들이 송명진의 뒤를 따랐고 나머지는 조지환과 오전 회진을 돌았다.

[혹시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흉부외과 전공할 거면 라인을 잘 정해 두세요.]

[사람 보고 줄을 잘 서야 될 거예요.]

최기석은 강하나의 말을 뒤늦게 이해했다.

* * *

오전 회진이 끝난 후 최기석은 민주혁의 지시에 따라 회의실에 남았다.

"혹시나 하는 일은 항상 역시나가 되더라."

민주혁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에 손을 얹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흉부외과에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정말로 왔다는 뜻이지."

민주혁의 손이 최기석의 어깨에 올라왔다.

"저번처럼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있자. 알았지?"

"네."

최기석은 짧게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근데 선배.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저 흉부외과 전공할 겁니다. 그리고 이번 달부터 흉부외과 픽스턴으로 들어갈 거예요."

"······진심이냐?"

"네."

"미친 건 아니지?"

놀란 민주혁이 한 번 더 물었다.

작년 흉부외과에 지원한 인턴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재작년 레지던트였던 민주혁이 여전히 막내 생활 중이다.

최기석이 흉부외과를 지원한다면 지긋지긋한 막내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

우선 픽스턴을 신청한 인턴은 과를 옮기지 않고 한 과에만 머문다.

그뿐만 아니라 지원자가 바닥인 흉부외과의 특성상 최기석은 무난하게 레지던트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밑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건 좋지만 그게 최기석이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상황이다.

"일단 다른 선생님한테 이야기는 해 볼게."

민주혁이 최기석을 위아래로 훑었다.

"네. 그런데 원래 조교수님하고 부교수님은 자주 싸우나요?"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사이는 원래 안 좋았고. 이렇게 대놓고 싸운 건 과장님이 나가신 후 처음이다."

"선배는 누구 편이에요?"

"마음이야 송 교수님한테 쏠린다만······ 됐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자."

민주혁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전 듣고 싶어요. 선배 의견."

최기석의 당돌한 질문에 민주혁이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 어차피 다 알게 될 테니까. 굳이 숨길 필요도 없지. 난 송 교수님을 좋아하지만 만약 공개적으로 누군가의 손을 들어야 한다면······ 조 교수님 손을 들겠어."

"왜요?"

최기석이 얼굴을 찡그렸다.

"누가 봐도 송 교수님 말이 옳잖아요. 전원하면 환자 치료비는 어떻게 하고요?"

"······."

"게다가 우리 흉부외과가 폐이식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전원을 시켜야 하나요?"

"그건 나도 알아."

민주혁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출세하려면 조 교수님 말을 따라야지. 조 교수님이 병원장님 동생이거든. 공석인 흉부외과 과장 자리에도 아마 조 교수님이 들어갈 거야."

"······."

"넌 그냥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해. 원래 짱구는 윗사람이 굴리고 밑에 있는 사람은 구르면 되는 거야."

민주혁이 한마디 하고 자리를 떠났다.

* * *

흉부외과 병동 업무 첫날.

최기석은 숨 가쁠 정도로 바쁜 하루를 보냈다.

소아과 병동, 성인 병동, 중환자실을 넘나들며 환자를 처치하고 다녔다.

잠깐이라도 쉬려고 하면 콜폰이 시끄럽게 울었다.

업무 강도를 따져도 응급실보다 병동이 훨씬 빡셌다.

하지만 최기석은 특유의 능력으로 담당의의 오더와 간호사의 부탁을 번개처럼 해치웠다.

동맥혈 채혈, 비위관 삽관, 소변줄 삽입 등등.

까다로운 처치마저 한 번에 끝났다.

이에 강하나 간호사는 최기석에게 인턴이 아니라 인턴을 초월했다는 의미에서 초 인턴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근데 왜 하필이면 초 인턴이에요?"

"일본만화 드래건볼 아시죠? 제가 그걸 재미있게 봤거든요. 샤이어인을 초월한 게 초 샤이어인이니까. 최 쌤은 인턴을 초월한 초 인턴이죠."

최기석의 물음에 강하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과연 4차원 간호사다운 이유였다.

바쁜 시간을 보내는 속에 모처럼 여유가 찾아왔다.

퇴근이 한 시간 남은 시점.

지이이잉.

콜폰의 진동에 최기석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휴게실 소파에 앉은 지 고작 오 분 만에 온 연락이다.

"잠시도 가만 두질 않는구나."

최기석은 기지개를 켜고 콜폰을 받았다. 강하나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초 인턴 쌤. 당직 선생님이 황정우 환자 EKG 찍어 오래요.]

"바로 갑니다."

최기석은 자판기 커피를 한 번에 털어 넣고 병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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