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남녀(6)
"무슨 일이세요?"
스테이션에 들어가자 강지연 간호사가 최기석을 빤히 쳐다봤다.
"그게······ 입원 중인 강용태 환자 면회를 할 수 있을까요?"
"면회는 친족 이외에는 안 돼요."
"벌써 가족분들이 면회 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환자와 가족분들의 허락은 오기 전에 받았고요."
"흐음······ 잠시만요."
강지연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보고 면회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이에 병동 보호사가 최기석의 간식을 확인하고 기타 반입 물품도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인사하고 병동 복도를 걸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며 걷자 진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환자들이 감정부정장애, 우울증, 정신분열증 등을 앓고 있었다. 정신과에 있지 않았다면 누가 이들과 정상인을 구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저기요."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렀다.
무시하고 걷자 또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저요?"
"네."
뒤를 돌아보자 풍채 좋은 20대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최기석을 응시했다.
"저기. 선생님. 지금 내 욕했죠?"
"네?"
청년의 질문에 최기석은 기가 막혔다.
세상에 입을 열지 않고 욕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청년의 질병을 확인하자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세요. 제 욕했잖아요."
"전 그쪽 분을 오늘 처음 봅니다. 욕을 할 이유가 없어요."
"거짓말. 내가 다 봤는데."
청년이 씨익 웃으며 최기석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은 마치 무고한 시민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악당 형사 같았다.
"말해 봐요. 욕했죠?"
"글쎄. 아니······."
"야. 너 또 그러냐?"
누군가가 최기석과 청년 사이에 껴들었다.
바로 강용태다.
"아저씨. 이 선생님이 저한테 욕했단 말이에요."
"인마. 넌 욕 타령 그만하고 가서 목욕이나 해. 냄새나 죽겠다."
"그 정도예요?"
"아주 심각해. 욕 나올 정도로."
"그래서 그런가?"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병실로 돌아갔다.
"휴우······ 형님. 덕분에 살았네요."
"뭐.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강용태가 껄껄 웃었다.
못 본 사이 강용태는 안색이 좋아졌다.
예전의 모습이 후줄근한 옆집 아저씨였다면 지금은 기업 사장님 같은 분위기가 났다.
최기석은 강용태를 따라 면회실로 갔다.
면회실은 복도 중앙에 위치했으며 신발을 벗고 편히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이다. 제법 넓었지만 면회객이 많아서 생각보다 좁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고전희와 그녀의 아들 강지용이 인사를 건넸다.
최기석도 꾸벅 인사를 했다.
"면회까지 와 주실 줄은 몰랐네요. 감동이에요. 정말 이런 의사 선생님은 대한민국에 또 없을 거야."
"아니에요. 환자분들을 따뜻하게 보는 의사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최기석은 휘휘 손을 저으며 간식을 풀어 놓았다.
이후 강용태와의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강용태는 최기석이 걱정한 것보다 훨씬 알콜교육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정신과 폐쇄병동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금주와 금연을 할 수 있어서 오히려 잘됐다는 말까지 했다.
[격려 스킬 사용에 실패했습니다. 대상은 이미 최대치의 자신감과 저항력, 치료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최기석은 스킬 실패에 오히려 웃었다.
강용태는 이미 격려가 필요 없을 만큼 상태가 좋았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본 경과도 양호다.
"고마워요. 의사 양반이 신경을 안 써 줬으면 난 이렇게 변할 수 없었을 거예요."
"저보다는 형님이 결심을 잘하셨죠."
"그 결심을 하게 만든 게 의사 양반이라니까."
강용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줬으니까 앞으로는 술을 꼭 끊어야지. 앞으로는 119 신세지는 일도 없을 거예요."
강용태의 커다란 손이 최기석의 손을 감쌌다.
그 순간 최기석은 보고야 말았다.
강용태의 손에서 뿜어진 빛이 자신의 손에 스며드는 과정을.
띠링!
[레어 젬을 최초로 획득하셨습니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간만에 낮잠을 푹 자고서 몸을 일으켰다.
간만에 즐기는 오프의 여유.
간식으로 사 둔 빵을 먹으며 창밖을 응시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자 젬 창에 새롭게 얻은 젬이 착용되었다.
[레어 젬: 처치 정확도 1.5배 상승.]
강용태를 도우면서 첫 번째 젬을 얻었다.
의료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처치 정확도는 생명, 상당히 좋은 젬을 획득했다.
앞으로 더 많은 젬을 얻는다면 능력치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으리라.
"아. 내 정신 좀 봐."
최기석은 손으로 본인의 이마를 탁 쳤다.
하필이면 컨퍼런스 준비에 필요한 노트북을 응급실에 두고 왔다.
하는 수 없이 응급실로 향했다.
"선생님. 오프인데 왜 왔어요?"
"노트북을 두고 가서요."
이미영의 물음에 최기석은 노트북을 챙기며 응급실을 훑었다.
환자 숫자는 많지 않지만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느낌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최기석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며칠 전 정설화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가 홍성훈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응급실 분위기는 저기압일 수밖에 없었다.
"야. 씨발. 장난하냐고!"
환자의 욕지거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깡마른 사내를 진료 중인 정설화가 보였다.
"의사면 의사답게 진료를 똑바로 보던가? 엉? 내가 아프다고 하잖아!"
환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하지만 함께 근무를 서는 홍성훈은 진화에 나설 기미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나마 얄팍한 보복을 하려는 걸까.
최기석은 성큼성큼 정설화에게 다가갔다.
"정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환자분이 몸이 아프다고 무조건 데메롤을 놔달라고 하셔서······."
"넌 또 뭐야? 엉?"
환자가 도끼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서 보니 목에 용 문신이 있었다.
"정 선생님. 이 환자분은 제가 볼 테니까 다른 일 보세요."
최기석은 정설화를 보내고 대신 진료석에 앉았다.
"내가 묻잖아. 넌 뭐냐고?"
"저도 의사입니다. 진료를 봐야 하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자리에 앉으세요."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를 살피고 진료 기록도 살폈다.
체력: 6/10
주 증상: 없음
아픈 부위: 없음
진단명: 없음
현재 상태: 비응급
경과: 양호
과거력: 충수돌기 수술
[폭주 모드에 돌입했습니다.]
- 흥분 상태가 유지되며 근력과 민첩성이 증가합니다.
환자의 상태를 살핀 후 최기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난동을 부리고 있는 김태영의 상태는 지극히 양호했다.
한마디로 아픈 것 없는 꾀병 환자다.
혹시나 해서 차트를 훑어보니 일주일 전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정형외과에서도 김태영에게 특별한 처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딴 거 필요 없고 데메롤이나 놔 줘."
"데메롤은 환자분이 원한다고 줄 수 있는 약품이 아닙니다."
"씨발 나 존나. 아프다고. 그러니까 빨랑 놔!"
탕타다당!
김태영이 진료의자를 걷어차면서 응급실 분위기가 한층 험악해졌다.
다른 환자들은 슬슬 눈치를 보면서 거리를 벌렸고 스태프들도 겁먹은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데메롤은 마약성 진통제다.
아마 김태영은 데메롤에 중독돼서 병원을 돌아다니며 이런 짓을 벌이고 있으리라.
"야! 내가 아파서 죽으며 책임질 거야."
김태영의 눈깔이 뒤집혔다.
씩씩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최기석을 한 대 칠 기색이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최기석은 결심을 굳혔다.
[격려 스킬의 상위 타입으로 폭군의 강림 스킬을 선택했습니다.]
[폭군의 강림 스킬을 사용합니다.]
- 환자가 의사의 수술 권유, 기타 처치 지시에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 일시적으로 근력과 민첩성이 상승합니다.
스킬을 쓰자 최기석의 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새빨간 오오라가 뿜어졌다.
오오라를 느꼈는지 김태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병원이 당신 투정 부리는 곳인 줄 알아!"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는 힘으로 호통을 쳤다.
쩌렁쩌렁한 소리에 다른 환자와 스태프들까지 놀라서 몸을 들썩거렸다.
"뭐······ 뭐야? 갑자기."
"치료를 받으려 왔으면 의사 말 들어. 당신 혼자 북 치고 장구 칠 거면 병원은 왜 왔어?"
최기석이 강하게 나오자 김태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데메롤을 요구할 때 이런 식으로 강하게 나온 의사는 눈앞의 의사가 처음이다.
게다가 착각인지 몰라도 의사가 거인처럼 크게 느껴졌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났다.
"아······ 아니. 내가 아프다니까. 데메롤 한 대만 놔 주면 그냥 갈게."
"안 돼. 돌아가!"
최기석은 검지로 응급실 문을 가리켰다.
"아니······ 그러니까······."
"가라고!"
최기석이 다시 호통을 치자 김태영이 깨갱거리며 응급실을 떠났다.
그것도 비싼 응급 관리료까지 내면서.
환자가 떠나면서 순간적으로 응급실이 조용해졌다.
"우와. 최 선생님 멋있다."
"다시 봤어요."
이미영이 최기석을 칭찬하자 다른 스태프들까지 최기석을 칭찬하고 나섰다.
김태영은 체격이 좋고 용 문신을 한데다가 입까지 거칠었다.
스태프는 물론이요 환자까지 겁을 먹었는데 최기석이 용감하게 김태영을 쫓아낸 것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칭찬에 최기석은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 * *
그날 저녁.
까만 하늘 위로 넉넉한 보름달이 떴다.
거친 바람이 불면서 가로수 나뭇가지가 춤을 추듯 흔들렸다.
최기석은 정설화와 병원 근처의 고깃집을 찾았다.
최기석은 오프였고 정설화는 근무가 끝났기에 자유다.
치이이이익.
고기가 노릇노릇하게 익어 갔다.
"낮에는 놀랐지?
최기석은 정설화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낮에 당한 일을 생각하면 술이 땡길 수밖에 없다.
비록 최기석은 아직 함께 술을 마실 수는 없지만 말이다.
"지금은 괜찮아. 네가 제때 와 주기도 했고."
정설화가 잔을 비우고 말을 이었다.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 거야."
"당연하지. 설화가 위험한데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
최기석의 대답에 정설화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응급실 근무도 이번 주가 마지막이네. 시간 참 빨리 간다."
"그러게. 벚꽃 구경하면서 온 게 엊그제 같은데."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넌 다음 달에 무슨 과야?"
"나? 안과."
"좀 살만 하겠네."
"응. 소아과 병동이나 응급실에 비하면 천국이지."
"기석이 너는"
"글쎄······."
"뭐야. 나만 궁금한 게 만드는 게 어딨어?"
정설화의 항의에 최기석은 다음 달에 가는 과를 알려 주었다.
"자. 아~"
대답을 들은 정설화가 최기석에게 고기쌈을 내밀었다.
최기석은 손을 쓰지 않고 낼름 쌈을 받아먹었다.
받은 게 있는지라 정설화에게도 쌈을 싸 주었다. 이에 정설화가 수줍게 입을 벌리고 쌈을 먹었다.
"아이고. 예쁘게들 먹네. 둘이 사귄 지는 얼마나 됐어?"
지나가던 주방이모가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응급남녀(7) 1권 완료
"저희 사귀는 사이 아니에요."
"그래? 내가 보기에는 둘이 잘 어울리는데······."
"그런가요?"
최기석은 담담하게 대화를 넘겼고 정설화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정설화가 수첩을 내밀었다.
"이거 봐라."
수첩에는 두 개의 진단명이 적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정설화가 진료하면서 판단한 진단명.
다른 하나는 노티를 받은 당직의가 내린 진단명이다.
수첩을 살핀 결과 둘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정설화의 진단력이 그만큼 뛰어난 것이다.
"대단한데? 인턴 관두고 진료 봐도 되겠어."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정설화가 쑥스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최기석은 오랜만에 정설화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직업 및 전공: 인턴/일반의
체력: 6/11
진단력: 5/10
외과적 처치: 2/10
내과적 처치: 2/10
평판: 4
액티브 스킬: 없음
패시브 스킬
[따스한 손길 Lv.3]
- 처치한 환자의 상처 회복력과 질병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 레벨이 높을수록 더 많은 수치가 증가하며 추가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 최대 3단계까지 성장합니다.
라포 형성
최기석(의료인): 4단계 ? 신뢰
양미라(의료인): 2단계 ?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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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젬
[레어 젬 착용: 성장력 1.5배]
정설화는 예전부터 진단력이 높았다.
그런데 대전에 내려온 후 진단력이 한 계단 뛰어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패시브 레벨까지 상승했다.
급속한 성장의 바탕에는 성장력을 1.5배 올려 주는 젬의 역할이 컸으리라.
그런데 정설화는 어떻게 성장력 젬을 얻었을까.
두 사람은 도란도란 병원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일어날 때가 되자 정설화가 완전히 뻗었다.
말할 때마다 혀 꼬부라진 소리가 났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내일이 오프라고 달린 게 문제다.
"설화야, 이제 가야지."
"시러. 더 마실래."
정설화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최기석은 술값을 계산하고 정설화를 부축하려 했지만 워낙 힘이 없어서 업고 말았다.
등에 닿는 풍만하고 보드라운 감촉.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가슴이 싱숭생숭해졌다.
최기석은 정설화를 업은 채 병원으로 돌아왔다.
쿵! 쿵! 쿵!
"누구 없어요?"
팔꿈치로 여자 당직실 문을 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정설화의 가방을 뒤져 당직실 열쇠를 찾았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자 아무도 없었다.
최기석은 정설화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다.
"하으으으응."
정설화가 잠꼬대하며 최기석의 팔을 끌어당겼다.
돌발행동으로 최기석의 몸이 정설화의 몸 위로 포개졌다. 더불어 두 사람의 입술이 가볍게 스쳤다.
이슬을 머금은 꽃잎이 닿은 느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정설화와 입술을 비볐다.
'이런!'
복도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문 앞에서 서서 슬쩍 고개를 내밀자 발소리의 주인공은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휴우······."
저절로 한숨이 터졌다.
근데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람?
* * *
지이이잉.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정설화는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제 술을 잔뜩 마신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중간에 일어나서 숙취음료를 마시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물품을 챙겨서 샤워실로 향했다.
기분이 묘했다.
대전에서의 근무가 며칠 남지 않았다.
비록 함께 근무했던 레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른 스태프들은 대부분 친절하고 실력이 좋았다.
정을 붙였다고 생각할 때 떠나야 하다니······.
쏴아아아.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쏟아졌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좋았다.
'착각이었나?'
정설화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기석이 업어 준 것까지는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누군가와 입을 맞춘 듯한 착각 아닌 착각이 어렴풋이 남았다.
'설마 기석이는······ 아니겠지?'
정설화는 피식 웃었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양미라가 샤워실로 들어왔다.
양미라와는 종종 샤워실에서 마주쳤던지라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양미라가 정설화의 옆자리에 자리 잡았다.
"어제 최 선생님하고 술 마셨다면서요? 진도는 많이 뺐어요?"
양미라의 기습 질문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지······ 진도라니요. 저랑 기석이는 치······ 친구 사이예요."
"발뺌해도 소용없어요. 티가 얼마나 팍팍 나는데."
양미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최 선생님은 환자랑 의료밖에 모르는 바보잖아요. 그러니까 다가오길 기다리면 안 돼요."
"······."
"정 선생님이 화끈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요. 아셨어요?"
"······네."
정설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쉽다. 제아무리 최 선생님이라도 정 선생님 벗은 걸 보면 한 번에 끝날 텐데."
양미라가 음흉하게 정설화의 몸을 훑었고 정설화는 다급하게 등을 돌렸다.
"몰라요!"
* * *
대전을 떠나는 날 아침.
최기석은 바쁘게 침을 챙겼다.
비록 한 달이지만 이곳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실력 있는 간호사와 일을 했고, 환타 칭호를 얻었고, 환자와 싸우기도 했고, 새로운 스킬을 얻기도 했다.
짧은 시간 미운 정도, 고운 정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떠난다는 사실이 마냥 후련하지는 않았다.
최기석은 짐을 들고 응급실로 내려갔다.
뒤이어 정설화가 왔기에 같이 스태프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두 사람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최기석은 역대 최고의 인턴이었으며 정설화도 A급 인턴이었기에.
"두 분 다 고생 많았어. 특히 정 선생님은······."
양미라가 말끝을 흐렸다.
"이젠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건 선물."
양미라가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묻지 말고 직접 확인해 봐요."
최기석은 쇼핑백을 받아 안에 있는 물건을 살폈다.
양미라가 준비한 선물은 두 켤레의 크록스 신발이다.
크록스 신발은 일종의 샌달로 신기 편하고 통풍이 좋았다.
"참고로 그거 커플화에요."
최기석은 뒤늦게 신발에 달린 장신구를 확인했다.
둘 다 하얀 크록스지만 한쪽 크록스에는 남자 곰이, 다른 쪽에는 여자 토끼 악세사리가 붙었다.
최기석이 크록스를 살피는 사이, 양미라가 정설화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정설화의 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저 빼고 무슨 이야기예요?"
"여자들끼리 이야기니까 최 선생님은 몰라도 돼요. 정들기 전에 빨리 가세요."
양미라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반 강제로 응급실을 떠났다.
응급실 스태프들의 인사를 받으며 최기석과 정설화가 차에 올랐다.
"아쉽다."
정설화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병원을 바라보았다.
병원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앞으로도 저런 스태프들 만나길 빌어야지."
신호가 멈춘 사이 최기석은 정설화를 힐끔 거렸다.
"크록스. 마음에 들어?"
"응."
정설화가 수줍게 말을 이었다.
"기석이. 너도 이거 신고 일할 거지?"
"선물로 받은 건데 그래야지. 안 그래도 신고 있던 슬리퍼도 다 닮았던 참이고."
"곰돌이는 절대로 빼면 안 돼!"
"알았어."
최기석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마지막에 양 선생님이랑 무슨 말 했어?"
"아. 그거? 비밀."
정설화가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댔다.
응급남녀(7) 1권 완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