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8화 (28/407)

응급남녀(4)

최기석과 정설화가 대전에 파견 온 지 벌써 2주가 되었다.

두 사람은 착실하게 응급실 근무를 해 나갔다.

둘이 워낙 일을 똑 부러지게 했기에 스태프들과 레지들은 두사람은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최기석은 독보적이었다.

응급실에서 10년째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조차 최기석이 역대 최고의 인턴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초적인 처치가 완벽했으며 교통 정리하는 실력 또한 발군이었다.

나중에는 당직의들까지 최기석의 근무를 반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파견 3주 차가 다가왔다.

무사 복귀를 향한 여정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 * *

홍성훈은 휘파람을 불며 시계를 응시했다.

벌써 낮 근무가 끝나가고 있었다.

요즘 들어 일 하는 시간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휙휙 지나갔다.

그 이유는 바로 정설화 때문이다.

정설화가 오면서부터 일에 활기가 돌았다.

홍성훈은 처방 타이핑을 하다 말고 정설화에게 눈길을 주었다.

정설화는 자상 환자에게 드레싱(상처소독)을 하고 있었다.

"정 선생님."

홍성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설화에게 다가갔다. 이에 정설화와 환자의 시선이 동시에 홍성훈에게 쏠렸다.

"네."

"잘하고 있기는 한데. 내가 하는 방식으로 하면 더 좋아요."

홍성훈은 정설화의 손을 슬쩍 잡으면서 포셉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드레싱을 해 나갔다.

"어때요? 상처가 훨씬 깔끔해졌죠?"

"아. 네."

정설화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홍성훈은 환자의 상처에 거즈와 플라스터를 붙여 드레싱을 끝냈다.

처치를 끝낸 그의 코가 피노키오처럼 솟구쳤다.

"홍 선생님, 죄송한데요."

인수인계를 기다리던 최기석이 대화에 껴들었다.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벌써부터 기분이 나빴다.

언제부터였을까.

최기석을 볼 때마다 짜증났던 게······.

"그런 식으로 치료에 껴들면 정 선생님이 곤란하지 않을까요? 저 환자가 다시 응급실에 오면 정 선생님을 초보라고 생각하고 무시할지 모르는데요."

"최 선생님이 뭘 모르네."

홍성훈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잠깐은 면박을 당하는 것 같아도 이렇게 선배 기술을 배우는 게 훨씬 중요해요."

"······알겠습니다."

최기석이 얌전히 대답하고 물러났다.

'짜식.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인턴이라고.'

홍성훈이 득의만만해하고 있을 때, 최기석의 한 마디가 카운터로 꽂혔다.

"뭐. 별 차이도 없는 것 같던데."

최기석의 말에 몇몇 간호사가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홍성훈이 정설화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나선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에도 진료나 처치를 할 때도 괜히 붙어서 얼쩡거리곤 했다.

"지금 내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환자 차트를 보고 있었습니다."

최기석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돌렸고 홍성훈은 혼자서 분을 삭혔다.

여기서 물고 늘어져 봐야 본인 꼴만 우스워진다.

환자 두 명을 더 받고 나자 근무시간이 끝났다.

홍성훈은 정설화와 홀가분하게 응급실을 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스케줄이 된 것처럼 인근 카페를 찾았다.

"오늘 힘들었죠?"

"아니요. 저보다는 홍 선생님이 더 힘드셨죠."

"하여간 정 선생님은 마음씨도 고우셔."

홍성훈은 피식 웃었다.

위이이이잉.

오늘 응급실의 일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데 진동벨이 울렸다.

홍성훈은 진동벨을 가지고 카운터로 향했다.

진동벨의 울림과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이 합쳐지면서 야릇한 흥분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오늘은 중요한 할 이야기가 있었다.

"다음번에는 제가 카운터에서 기다릴까 봐요. 매번 홍 선생님이 가셔서······."

"이까짓 게 뭐 큰일이라고요."

훙성훈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최 선생님하고 사귀어요?"

"네? 저······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정설화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에이. 놀란 걸 보니까 맞잖아요. 여기서 솔직히 털어놔 봐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할게요."

"정말 아니에요."

"이상하다? 둘이 사귀는 것처럼 보였는데?"

홍성훈은 말과 달리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오늘은 쐐기를 박고자 이야기를 꺼냈다.

최기석이 화제로 떠오른 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설화는 고개를 푹 떨어트린 채 커피만 마셨고 홍성훈은 바깥을 보는 척하며 정설화를 힐끔거렸다.

"흠흠······ 조금 진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요."

홍성훈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정 선생님 좋아합니다."

"······."

"정 선생이 응급실에 온 날부터였어요. 제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기 시작했던 거. 솔직히 이런 감정 너무 오랜만에 느껴서 저도 많이 당황했어요."

홍성훈의 고백에 정설화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홍성훈은 간접적으로 꾸준히 호감을 드러내 왔다.

당연히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정 선생 파견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용기 내서 이야기를 꺼내는 건데······. 정 선생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해요?"

홍성훈은 마른침을 삼키며 정설화를 응시했다.

말아 쥔 두 손에서 땀이 났다.

시선은 오로지 대답이 튀어나올 정설화의 입가에 고정되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무게감을 견디지 못해 커피를 단번에 절반 넘게 빨아 당겼다.

"홍 선생님 마음은 고맙지만······ 죄송해요."

정설화의 말에 홍성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거절당했다는 충격 때문에 정설화가 뒤에 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마치 길거리의 백색 소음처럼.

"역시 최 선생 때문인가요?"

홍성훈의 말에 정설화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정 선생님이 최 선생을 좋아한다는 건 압니다. 근데 그동안 곁에서 지켜본 입장에서는요, 둘이 정말 안 어울려요."

"······."

"주제넘은 이야기인 줄은 알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어요."

홍성훈이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최 선생, 걔는 정 선생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 자식은 환자밖에 모르는 놈이라고요. 설령 둘이 사귄다고 해도 정 선생님만 불행해질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설화가 커피를 마시고서 반문했다. 착각인지 몰라도 그녀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기회를 잡으려면 지금뿐이다.

홍성훈의 직감이 최후의 사인을 보냈다.

"그건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그건 최 선생을 좋아하는 정 선생님이 더 잘 알지 않아요?"

"그거야······."

정설화가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혹시 그런 말 아세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보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게 더 행복하다는 말?"

"······."

"전 최 선생보다 정 선생님에게 더 잘할 수 있어요. 지방에 있는 게 걸린다면 제가 본원으로 갈게요. 그 정도 능력은 있으니까."

"죄송해요. 그래도 안 되겠네요."

정설화의 대답이 단호했다.

'이 정도면 넘어 오겠지' 하고 기대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질 만큼.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정설화가 휙 자리를 떠났다.

홍성훈의 진심을 단칼에 잘라 버린 것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으로 보였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홍성훈의 충격은 더욱 컸다.

홍성훈은 허탈하게 웃으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거절당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몸이 붕 뜬 기분이었다.

하지만 꿈같았던 기분이 차차 분노로 변했다.

네깟 년이 뭐가 잘났다고 나를······.

가슴 속의 불길이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쾅!

홍성훈은 문을 걷어차며 기숙사로 들어갔다.

* * *

대전의진병원 응급실.

시계가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다면 늦은 시간이건만 최기석과 간호사들은 환자를 보느라 바빴다. 화타가 아닌 환타의 능력은 오늘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중이다.

최기석은 방금 막 진찰한 환자를 보내고서 커피를 홀짝거렸다.

이제 남은 환자는 두 명뿐이다.

"선생님. 머리가 너무 아파요."

삼십 대 여성 환자 임현지가 최기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체력: 4/10

주 증상: 두통 / 오심

아픈 부위: 머리

진단명: 중증성 편두통

현재 상태: 비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편두통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폈지만 뾰족한 처치법은 나오지 않았다.

굳이 검사는 필요 없었기에 증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서 신경과 당직의에게 노티 했다.

[박동성 두통에 오심, 시야까지 뿌려지는 것 같다고요? 그럼 중증 편두통 맞네. 혹시 환자한테 고혈압 있어요?]

"없습니다."

[좋아요. 그럼 일단 metoclopramide 원 앰플 정맥주사로 놓고 약은 triptan 계열에서 에르고타민으로 먹여요.]

"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양미라에게 처치를 부탁했다.

"다음 환자분. 조까치 님."

무의식적으로 환자의 이름을 부르다가 흠칫했다.

이름이 주는 어감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이다. 몇몇 스태프들은 최기석이 호명하는 것을 듣고 피식 웃었다.

"네."

조까치가 최기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조까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셨어요?"

"피부가 간지러워서 미칠 것 같아요."

조까치가 손목을 내밀었다.

손목 부위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상태를 살피자 접촉성 피부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손목을 자세히 살피자 시계를 찬 흔적이 있었다.

"혹시 최근에 메탈로 된 시계를 차고 다니셨어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금속 알레르기 때문에 접촉성 피부염에 걸리신 것 같습니다. 그 시계를 계속 차고 다시면 또 이렇게 피부병이 생기니까 착용하시면 안 됩니다."

최기석은 설명을 하고 간단한 피부과 약과 주사를 처방했다. 피부 환자를 보내고 나자 막간의 여유가 찾아왔다.

스태프들은 엄재문이 사 온 붕어빵을 먹으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붕어빵 하나 제대로 못 먹겠네."

"그러게요."

양미라의 말에 조윤지가 맞장구를 쳤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사이렌이 귀가를 때렸다.

구급차가 응급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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