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남녀(3)
"우와······ 진짜네."
양미라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용태는 소변 검사상 ph가 7.5였고 케톤 양성반응이 나왔다.
그 말인 즉 강용태가 A.
K.
A를 앓고 있다는 뜻이다.
A.
K.
A는 보통 사람이 아는 also known as가 아니다.
정식 병명은 Alcoholic ketonacidosis으로 알콜성 케톤산혈증이다.
방치할 경우 위염이나 췌장염이 동반될 수 있다.
"케톤산혈증이 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척 보니까 딱 알겠던데요?"
최기석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선생님. 응급실인데 결과 나왔습니다. 환자가 알콜성 케톤산혈증인 것 같습니다."
[확실해요?]
"네."
최기석이 검사 결과를 보고하자 내과 당직의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5D/W에 티아민 섞어서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밤은 계속 노티 해도 되죠?"
[네.]
내과 당직의가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환자분하고 보호자분. 이쪽으로 오세요."
최기석은 강용태와 고진희를 불렀다. 그리고 검사 결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병명이 나오자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특히 자신감이 넘쳤던 강용태가 더더욱 겁을 먹었다.
"케톤산혈증이 심각한 병은 아닙니다. 발견도 비교적 빨랐고요. 일단 오늘은 병원에서 수액 맞고 쉬세요."
강용태에게 필요한 처치를 하자 새벽 2시가 되었다.
그제야 환자들이 한풀 꺾였다.
"선생님은 여태껏 본 인턴 선생님 중에 실력이 제일 좋으면서······ 역대급 환타인 것 같아요."
보통 야심한 새벽에는 스태프끼리 대화를 주고받으며 여유를 즐기는 맛이 있어야 하거늘.
오늘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여유 넘치던 응급실 침상도 환자들로 제법 차 있었다.
"억울해요. 전 진짜 환타 아니에요."
"비겁한 변명 같은데······."
양미라가 팔짱을 낀 채 새침한 표정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쏴아아아아.
새벽 4시,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서 응급실 안에서도 시원한 빗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양 쌤. 세기의 대결이 시작됐어요."
"뭔데 세기의 대결씩이나 해?"
조윤지의 말에 양미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이 새벽에······ 대결이라고 할 게 있어?"
"환타하고 유비무환이 붙었잖아요."
조윤지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심심한데 저랑 내기 하실래요? 둘 중에 누가 이길지? 지는 쪽이 야식 사는 걸로 해요."
"좋아. 난 환타에 걸게."
"그럼 전 유비무환이요. 제아무리 환타라도 유비무환을 이길 수는 없죠."
두 사람이 베팅하면서 세기의 매치가 시작됐다.
환자를 몰고 오는 최기석이냐?
아니면 환자를 몰아내는 비냐?
과연 그 승자는······.
* * *
드디어 밤 근무가 끝났다.
최기석은 오전 근무자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화장실을 찾았다.
"후아······."
찬물로 세수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환단으로 최대 체력이 늘어날고 체력회복 능력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밤샘 근무는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오프라는 점이다.
최기석은 기숙사에 도착해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밑을 닦지 않은 것처럼 찜찜했다. 분명 잊지 말고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이런!"
최기석은 벌떡 일어나서 응급실로 돌아갔다.
침상을 훑는데 보려고 했던 사람이 없었다.
"선생님. 강용태 환자 어디 갔어요?"
"내과에 노티 하니까 보내도 좋다고 하던데요. 방금 막 나갔어요."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재빠르게 응급실을 떠났다.
다행히 강용태는 병원 근처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고전희가 최기석을 알아보고 말을 건넸고 최기석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근무 끝나고 잠깐 나오셨나 봐요?"
"네. 잠깐 볼 일이 있어서요."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남편이 아픈 것도 모를 뻔했어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오실 때 이야기는 잘 들었죠?"
"네. 당분간 술 끊고 고기도 많이 먹으라고 했어요."
"맞습니다. 꼭 지켜 주셔야 돼요. 병을 고치는 일은 의사와 환자가 함께하는 거니까요."
"흠흠······ 밤에는 신세가 많았습니다."
강용태가 대화에 껴들었다.
밤새 잘 쉰 덕인지 안색이 좋았다.
"괜찮습니다. 여유가 있으시다면 근처에서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혹시 남편에게 문제라도 있나요?"
"그런 건 아니고 따로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 그럼 카페라도 갑시다."
강용태가 호기롭게 앞장을 섰다.
세 사람은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이른 아침이지만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는 직장인들로 붐볐다.
강용태는 진동벨을 만지작거리며 최기석을 응시했다.
취했을 때는 몰랐는데 최기석은 키가 훤칠하고 인물이 좋았다.
인상은 흔히 말하는 호감형.
시집 안 간 딸이 있다면 소개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반대로 손은 진동벨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치료가 끝났음에도 개인적으로 보자고 하는 의도.
그것을 좀처럼 알 수 없었다.
"할 말이 뭔가요?"
"환자분, 아니 병원 밖이니까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을 했다면 전 지금쯤 침대에서 편하게 자고 있었을 테니까요."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기석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강용태와 고전희는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희 병원에서 운영하는 알콜치료 교육을 받아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알콜치료?"
"네."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이 이어졌다.
의진대병원 정신과에서는 알콜치료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치료 기간은 보통 두 달이며 그동안 정신과 병동에서 숙식을 하게 된다.
비용은 대략 10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다.
"그러니까 나보고 정신과에 가라 그 말이요?"
"정신과에 색안경을 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요새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과 중 하나입니다."
"허허, 참."
강용태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이이잉.
때마침 진동벨이 울리고 고전희가 세 사람의 커피를 가져왔다.
강용태는 뜨거운 커피를 쭉쭉 빨아 마셨다.
"제가 봤을 때 어르신은 케톤산혈증이 문제가 아닙니다. 술을 끊으셔야 진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어요."
"의사 양반. 바깥에까지 나와서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술 마시는 걸로 입원할 정도는 아니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최기석이 반문했다.
"제가 차트를 보니까 일주일에 두 번씩 만취 상태로 119에 실려 오시던데요."
"그거야 그렇지만 술은 마음만 먹으면 까짓 거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어."
"다들 말은 그렇게 하시죠. 하지만 환경이 변하지 않으면 습관도 변하지 않습니다. 치료 센터에서 제대로 금주 훈련을 받으실 필요가 있어요."
"하아······."
강용태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일부러 센 척을 해 봤다.
본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았다.
최근에는 그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그를 마시고 있는 수준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벌벌 떨리는 손.
오랫동안 이어진 불면증과 가족들과의 불화까지.
술이 벌레처럼 인생을 좀먹어 가고 있었다.
물론 금주를 시도한 적이 있지만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다시 소주에 손을 대곤 했다.
"의사 양반 이야기를 들으니까 조금 혹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자신 없어. 돈만 날릴 것 같고."
"아니요. 어르신은 할 수 있습니다."
"······."
"혼자서는 힘들지 몰라도, 저희 병원 의료진이, 그리고 제가 어르신을 도울 테니까요."
최기석은 이야기하며 격려를 사용했다.
그만 볼 수 있는 빛이 강용태를 휘감았다.
[격려 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면역력, 저항력, 재생력, 자신감이 대폭 상승합니다.]
띠링!
[축하합니다. 격려 스킬이 최대 5레벨로 올랐습니다.]
[스킬 분기점이 생겼습니다. 격려 스킬의 두 가지 상위 타입 중 한 가지를 선택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신규 스탯, 젬이 열렸습니다.]
정신없이 알람이 울렸다.
'뭐······ 뭐야?'
최기석은 얼떨떨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오랜만에 알림이 폭풍처럼 밀어 닥쳤다.
"내 말 듣고 있어요?"
"아. 죄송한데 다시 이야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최기석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흠흠. 그러니까 치료 말이에요. 이 기회에 한 번 받아 볼게요."
"정말이십니까?"
"어째 내 마누라보다 의사 양반이 더 좋아하네?"
"이 사람이 진짜!"
고전희가 째려보자 강용태가 깨갱했다.
부부가 알콜치료에 동의한 이후 대화는 술술 풀렸다.
그뿐만 아니라 부부는 오늘 바로 정신과에 가겠다는 적극성까지 보였다.
"병원 밖에서도 신경 써 주는 의사는 처음 봤네. 고마워요."
"아닙니다. 치료 열심히 받으시고 시간이 되면 면회도 갈게요."
최기석은 두 사람과 작별인사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스킬 살피기다.
과연 알림대로 격려 스킬 위로 두 가지 액티브 스킬이 생겼다.
[폭군의 강림 Lv.0]
- 환자가 의사의 수술 권유, 기타 처치 지시에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 일시적으로 근력과 민첩성이 상승합니다.
- 레벨에 따라 복종 수치 및 신체 스탯이 상승합니다.
- 최대 3단계까지 성장합니다.
[치료의 바람 Lv.0]
- 내과적 처치를 할 경우 회복속도를 20퍼센트 증가시킵니다.
- 레벨에 따라 회복속도가 빨라집니다.
"흐음······."
최기석은 신음을 흘리며 턱을 쓸어내렸다.
스킬 분기점이라는 말이 알려 주듯 한쪽 스킬을 익히면 다른 스킬을 익힐 수 없었다.
문제는 둘 다 쓸 만한 유용한 스킬이라는 점이다.
폭군의 강림은 의사를 깔아뭉개는 환자나, 청개구리 환자에게 쓰면 유용했다.
반면 치료의 바람은 범용성이 높은 기술이다.
내과 치료를 할 때만 회복도가 증가한다는 게 조금 걸리기는 한다.
그래도 이 스킬 또한 환자를 위한 스킬이라 볼 수 있었다.
회복속도의 20퍼센트 증가는 무시할 수 없다.
스킬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고 젬 항목을 살폈다.
젬은 라포 스탯 아래에 위치했다.
초등학생이 도장 받기 숙제를 하는 것처럼 별 모양 기호가 9개 뚫렸다.
형태를 보면 아이템을 착용하듯 젬도 착용하는 모양이다.
더 자세한 건 젬을 얻어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또 할 일이 생겼구나."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회의실에서 컨퍼런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는 근무가 끝난 정설화가 응급실 관련 서적을 읽고 있었다.
"후아. 집중이 안 된다."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작업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해 놓은 게 하나도 없었다.
저녁을 먹은 직후 작업에 들어갔더니 몸이 나른하고 자꾸 딴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정설화가 책을 내려놓으며 입을 쭉 내밀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정설화가 갑자기 몸을 들썩거렸다.
"왜 그래?"
"별거 아니야."
정설화가 웃으며 가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귀이개다.
"아까 룸메이트 선생님 귀를 파 주기로 했는데. 이걸 계속 가운에 넣어 놨네."
"······."
"내가 귀 파 줄까?"
정설화가 수줍게 물었다.
어차피 집중도 안 되었기에 최기석은 흔쾌히 수락했다.
"자. 여기 누워."
정설화가 소파에 앉아 그녀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냥 소파에 누울게."
"안 돼. 그러면 몸을 더 숙여야 된단 말이야."
정설화의 고집에 최기석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뉘였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어렸을 때는 보육원 선생님들이 귀를 파줬고 성인이 된 후에는 대충 면봉으로 후비는 정도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사각. 사각.
귀 후비개가 시원하게 귀를 긁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기석은 거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길게 내려와서 볼을 간질이는 정설화의 머리카락과 뜨거운 숨결이 신경 쓰였다.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생각보다 별로 없는데? 이제 돌아."
최기석은 정설화를 향해 몸을 돌리던 중 정설화와 눈을 마주쳤다.
"······."
"······."
최기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정설화와 정설화의 무릎베개를 받은 채 정설화를 올려다보는 최기석.
두 사람 사이에 야릇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 그렇게 있으면 귀를 못 파잖아."
"아. 미안."
최기석은 후다닥 정설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정설화가 귀를 파 주었고 최기석은 가만히 거기에 몸을 맡겼다.
뭘까.
가슴이 울렁거리는, 처음 느껴보는 이 기분은.
"자. 이제 끝."
"고마워."
최기석은 속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몸을 일으켰다.
"이젠 내가 파 줄게."
"나는 괜찮은데······."
"빨리 눕습니다. 실시!"
최기석이 소파에 앉아서 무릎을 두드리자 정설화가 수줍게 그의 무릎에 누워 몸을 옆으로 돌렸다.
긴 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기자 새빨개진 귀가 드러났다.
최기석은 몸을 숙여 정설화의 귀를 파 주었다.
혹시나 그녀의 귀가 다칠까 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귀를 파는 도중 정설화의 몸이 미묘하게 들썩거렸다.
"설화야. 움직이면 안 돼."
"그건 아는데. 너무 간지러워."
정설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몸의 떨림도 멈추지 않았다.
"자꾸 이러면 다쳐."
"자······ 잠깐만."
정설화의 말에 최기석은 귀 후비는 것을 멈췄다.
그의 무릎에서 일어난 정설화의 두 뺨이 어느새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후아······."
"이제 좀 괜찮아?"
"응."
심호흡을 끝낸 정설화가 다시 최기석의 무릎에 누웠다. 그리고 두 손을 꽉 쥐고 입을 앙 다물어 간지럼을 참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최기석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돌아."
최기석의 말에 정설화가 최기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
"······."
다시 시선이 맞은 두 사람.
최기석은 문득 정설화의 눈이 무척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눈이 예쁜데 그동안 얼굴을 가리는 뿔테 안경을 썼으니 외모가 죽을 수밖에······.
사각. 사각.
귀 파기가 다시 시작됐다.
간지럼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정설화는 갓난아기처럼 조용했다.
"다 끝났어."
"어? 응. 고마워."
정설화가 몸을 일으켰다.
서로 귀를 파 주고 난 후라서 그럴까.
최기석은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