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남녀(2)
소아 환자를 진료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환자의 특성상 문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려면 보호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보호자의 경우 자식을 걱정해서 과도하게 증상을 부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기석은 가운을 정리하고 보호자 맞을 준비를 했다.
김찬호가 원무과에서 접수하는 사이, 손지윤이 최기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이가 열이 심해요. 집에서 체온계로 재 봤는데 열이 38.8도였어요."
손지윤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말씀하세요."
"선생님 말고 다른 선생님이 진료 보면 안 되나요?"
손지윤의 말에 최기석이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말씀이죠?"
"선생님. 인턴 맞죠?"
"네. 그런데요."
"병원에 온 지도 얼마 안 됐죠?"
"맞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인데 기왕이면 실력 있는 선생님한테 진료를 받고 싶은데······."
손지윤이 말끝을 흐렸다.
[3,4월의 응급실 진료는 피해라, 인턴이 사람 잡는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없다.
"저기, 보호자 분."
최기석이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료는 제가 보지만 처방은 소아과 당직 선생님이 내려 주십니다. 혹 아이의 상태가 심각하면 당직 선생님이 직접 내려오실 거고요."
"······알겠습니다."
최기석의 설명에 손지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탈 체크할게요."
양미라가 아이를 침상에 눕히면서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됐다.
"아이가 몇 살인가요?"
"이제 5개월이에요."
"열이 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죠?"
"한두 시간 전부터요."
최기석은 문진을 이어 갔다.
아주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물어보며 그 내용을 차트에 입력했다.
"체온은 38.5도입니다. 다른 바이탈은 전혀 문제없고요."
"아이 좀 잠깐 볼게요."
양미라의 말을 듣고서 아이에게 다가가 검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검지를 아이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자 아이가 눈과 몸을 움직이며 반응을 보였다.
"지금 아이하고 장난하시는 건가요?"
손지윤이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의 반응성을 확인하고 있는 겁니다. 원래 감염증이 있는 영아들은 바깥 자극에 제대로 반응을 못해요."
최기석의 말에 손지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최기석은 이어서 아이의 호흡과 피부색까지 살폈다.
체력: 4/10
주 증상: 발열
아픈 부위: 전신
진단명: 상세불명의 발열
현재 상태: 비응급
경과: 보통
마지막으로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아이를 확인했다.
딱히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후 5개월이기에 조금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최기석은 곧바로 소아과에 전화를 걸었다.
최기석이 문진한 내역을 알려주자 루틴 검사 오더가 떨어졌다.
X-RAY와 피 검사다.
"일단 간단한 검사를 할 겁니다. 자세한 건 검사 결과를 보고 말씀드릴게요."
"선생님. 채혈은 제가 할게요."
"됐어요."
최기석은 양미라가 나서는 것을 막았다. 그러자 양미라가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가뜩이나 예민한 보호자예요. 한 번이라도 잘못 꽂았다간 난리 피울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다는 거예요."
최기석은 웃으며 양미라에게 귓속말을 돌려주었다.
이윽고 양미라가 아이를 눕히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가볍게 잡았다.
늦은 밤이라 졸린지 아이는 그다지 저항이 없었다.
힐끔 힐끔 아이를 훔쳐보는 간호사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보호자들.
그 속에서 최기석은 태연하게 행동했다. 아이의 팔을 토니켓으로 묶고 손가락으로 혈관을 더듬었다.
'큰일이네.'
양미라는 속이 끓었다.
그동안 응급실에서 채혈하기 힘든 환자가 있으면 전부 그녀가 맡아 왔다. 그런데 그런 양미라에게조차 뚜렷한 혈관이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나머지 이를 부딪치며 최기석을 지켜보았다.
만약 최기석이 실패한다면 볼 것도 없이 그녀가 나서야 한다.
푸우우욱.
바늘이 아이의 피부를 꿰뚫었다. 동시에 주사기 침 부근에 피가 고였다.
한 번에 혈관을 찔렀다.
"착하다. 우리 동건이."
최기석이 웃으며 주사기를 당겼다.
채혈은 무사히 끝났다.
잠시 후 엑스레이 검사와 피 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다.
소아과 레지던트에게 노티 하자 별 이상이 없다며 약 처방을 내렸다.
"검사 결과 다행히 이상은 없습니다. 시럽하고 가루약 먹이고 경과를 지켜보세요. 혹시나 중간에 또 이상 증상이 있으면 찾아주시고요."
"감사합니다."
손지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까는 죄송해요. 제가 괜히 인턴 선생님이라고 무시해서."
"아이를 너무 걱정해서 그러신 건데요. 뭐."
"감사합니다."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을 떠났다.
"최 선생님. 대단하시네요. 저 아이 피를 한 번에 뽑을 줄은 몰랐어요."
"저도요."
"엄 선생님보다 천배는 나은 것 같아요."
양미라를 비롯한 간호사들이 엄재문이 못 듣도록 조용하게 최기석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낯익은 알림이 귓가를 때렸다. 잠깐의 쉴 틈도 없이 119가 응급실을 찾았다.
찰싹!
최기석은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잠시 후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부축해서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만만치 않네.'
최기석은 환자를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환자는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눈동자는 반쯤 풀렸으며 두 볼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상의에는 토사물이 묻었고 술 냄새와 토악질을 한 냄새가 동시에 풍겼다.
응급실의 단골손님 중 하나인 알콜 환자다.
"아저씨. 다 왔어요. 병원이에요."
"벼······ 벼엉원?"
환자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반문했다.
어차피 대답을 해도 의미가 없는 상황,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베드에 눕혔다.
"저 아저씨, 또 오셨네."
양미라가 혀를 차며 원무과로 갔다. 그리고 알아서 강용태의 진료 접수를 했다.
강용태가 단골 알콜 환자였기 때문이다.
"환자분. 몸은 좀 어때요?"
최기석이 강용태에게 다가가 물었다.
"배가 많이 아파. 구역질도 계속 나오고."
"술을 많이 마셨으니까 당연하죠."
양미라가 꾸짖듯이 말하고 최기석의 팔을 끌었다.
"선생님. 이분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보호자한테 연락했으니까 알아서 데려갈 거예요."
"이분 가볍게 볼 환자가 아니에요."
최기석은 고개를 젓고 내과에 전화를 걸었다.
그 모습에 양미라와 조윤지가 입을 떡 벌렸다.
단골 알콜 환자를 당직의에게 노티 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 전화 끊으세요. 이 환자 노티 하면 100퍼센트 욕먹어요."
"선생님, 여기 응급실인데요."
양미라의 조언이 무색하게 통화가 연결됐다.
[네. 번호요.]
내과 당직의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최기석이 환자 번호를 불러 주고 노티 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내과 당직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단골 알콜 환자네요.]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 복통을 많이 호소하고 있고 구토감도 다른 때와 달리 심하다고 합니다."
[최 선생은 태어나서 술을 한 번도 안 마셨나 봐요?]
"······."
[지금 말한 건 멀쩡한 사람이라도 술 마시면 느낄 증상이잖아요. 누가 이런 환자를 노티 하라고 했죠?]
내과 당직의에 말에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하아······ 웬 병신 새끼가 응급실에 와서' 라는 말도 희미하게 들렸다.
"선생님 말씀은 잘 압니다. 그래도 오늘은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최기석의 말투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내려와서 봐 달라?]
"루틴 검사만 내주시면 안 될까요? 요 검사 포함해서요."
[······일단 검사 오더는 냅니다. 대신 환자한테 아무 이상 없으면 오늘 최 선생 노티는 안 받아요.]
탁!
내과 당직의가 으르렁거리며 통화를 끊었다.
"선생님. 왜 그러셨어요?"
양미라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처럼 노티 안 해도 될 환자를 노티 하면 찍혀요."
"걱정 마세요. 다 이유가 있으니까."
최기석은 양미라를 안심시켰다.
이윽고 강용태의 루틴 검사가 시작되었다.
보통 알콜 환자는 시끄럽게 굴고 의료진에게 비협조적이다. 그런데 강용태는 잔뜩 취했음에도 검사를 고분고분 따랐다.
그로 인해 최기석은 뒤늦게 깨달았다.
응급실 밤 근무자들이 왜 그를 알콜의 황태자라고 부르는지를.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가운데 한 중년 여인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강용태의 부인 고진희다.
"죄송합니다. 이 양반이 또 술을 퍼마셔서······."
고진희는 스태프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강용태에게 다가갔다.
강용태는 몸을 새우처럼 만 상태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아이고. 또 처마셨냐? 또!"
팡! 팡! 팡!
고전희가 강용태의 등을 후려쳤다. 이에 강용태가 악 소리를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놈의 여편네가 돌았나?"
"그래. 나 돌았다. 당신 때문에 완전히 돌았다고! 술도 하루 이틀을 마셔야지. 그것도 아니면 적당히 퍼 마시던가. 허구한 날 이게 뭐하는 짓이야!"
"속이 편하면 술을 마시겠어? 엉?"
"답답한 양반아. 술을 끊어야 속이 편하지.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고전희의 속사포 공격에 강용태가 얼굴을 확 구겼다.
"에이. 씨발. 세상도 좆 같고 마누라도 좆 같아서 못 살겠네."
강용태가 휘청거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게?"
"한잔 더 할 거야."
"진짜 나 죽는 꼴 보려고 그래?"
"몰라. 알아서 해."
강용태가 손을 휘저으며 고전희를 뿌리쳤다. 하지만 최기석이 앞을 가로막아 나아가지 못했다.
"의사 양반. 비켜."
"못 비킵니다. 환자분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해요."
"치료오? 나 건강해. 건강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강용태가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저기. 의사 선생님. 남편은 제가 집으로 잘 데려갈게요. 더 피해를 끼칠 수도 없고······."
"아니요. 두 분 다 응급실에 계셔야 합니다."
"네?"
"지금 남편분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아마 오늘 하루는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 씨발!"
강용태가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눈알을 부라리며 최기석에게 바짝 다가갔다.
순간 응급실의 분위기가 폭발한 것만 같았다.
강용태가 응급실 스태프들과 충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모두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병원에서 나가겠다는데 왜 지랄이야? 엉?"
"잘 생각하세요. 환자분의 몸은 환자분의 것만은 아닙니다."
"그게 뭔 소리인데?"
"가족이 있잖아요. 지금 곁에는 아내분이 있고 집에는 자식분도 있겠죠. 아닌가요?"
"······."
"환자분이 아프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아픕니다."
최기석의 말에 강용태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내가 병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래. 어디 한 번 보자고. 검사에서 아무 것도 안 나오면 가만 안 둬."
"대신 이상이 있으면 제 말을 따라 주세요."
최기석의 대답에 강용태가 콧방귀를 끼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이제 모든 것은 곧 나올 검사 결과에 달렸다. 만약 검사 결과에 이상이 없다면 최기석은 강용태는 물론 내과 당직의에게도 한 방 먹게 될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
최기석은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했다.
"선생님. 검사 결과 나왔어요?"
양미라가 손톱을 깨물며 최기석에게 다가왔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최기석보다 그녀가 더 긴장한 듯한 모습이다.
"네. 나왔어요."
최기석이 담담하게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거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