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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22화 (22/407)

초턴으로 산다는 것(6)

액정에 떠오른 발신번호가 낯설었지만 곧바로 받았다.

혹시 병원 전화일지 몰랐다.

"여보세요?"

[······.]

"아, 네. 선생님.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시죠?"

[······.]

"직접 오셨다고요?"

[······.]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최기석은 가운을 휘날리며 1층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뜻밖의 손님이 병원에 찾아왔다.

원래는 병원이 아니라 따로 약속을 잡아서 보기로 한 사람이다. 하지만 바쁜 인턴 생활로 그럴 수 없게 됐다.

최기석은 카페로 들어가 창가 쪽에 앉은 중년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기석 씨."

송대현이 환하게 웃었다.

송대현은 과거 그가 CPR로 목숨을 살린 한의사다.

감사 표시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맞지 않자 직접 병원에 찾아 온 것이다.

과거 최기석은 본인이 진성대 흉부외과의라고 거짓말을 했다.

당시의 핵심적인 처치인 심낭천자가 레지던트 3년 차에게 어려운 처치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최기석에게는 문제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기석은 나중에 송대현과 통화하면서 본인이 인턴이라는 진실을 밝혔다.

다행히 송대현은 그의 고백에 크게 불쾌해하지 않았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잖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더불어 앞으로는 자격에 맞는 의료행위를 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못 본 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졌네요."

"잠을 좀 못 잤더니······."

"하긴 인턴 생활이 좀 피곤해야죠."

송대현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리에 앉아서 본격적인 대화를 나눴다.

"자. 이건 선물."

대화 도중 송대현이 의자 옆에 두었던 커다란 종이백을 건넸다.

안에는 흑갈색을 띤 한약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원기회복에 좋은 약재들만 골라서 만들었어요. 하루에 세 번, 일주일만 먹어도 금방 효과를 볼 거예요."

"뭘. 이런 것까지 다 주시고."

최기석은 약간의 립 서비스를 하고 종이백을 받았다.

송대현은 탕약강화 스킬이 4단계인 한의사다.

효과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안하지만 이제 슬슬 가 봐야겠어요."

"바쁘신데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죠. 혹시라도 한의학에 대해 궁금한 게 생기면 전화해요."

"네."

"아 참. 그 전에 이것도 받아요."

송대현이 가방에서 반지함 같은 것을 꺼내서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보면 알아요. 프로포즈 하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고."

송대현이 농담을 건넸고 최기석은 한참 반지함을 내려다보다가 뚜껑을 열었다.

함을 열자마자 진한 한약향이 코를 찔렀다.

근처에 앉은 사람들조차 그 향에 눈살을 찌푸릴 정도다.

"역환단이에요.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환약 중 하나죠."

"그렇게 귀중할 걸 왜 제게······."

"생명의 은인이니까."

송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최기석의 등을 두들겼다.

"저는 이런 보답을 받기 위해 선생님을 구한 게 아닙니다. 이건 돌려 드리겠습니다."

"무슨 섭섭한 말을. 거절은 거절하겠어요."

"······."

"보답 받는 걸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도움 받은 입장에서는 순수하게 도와준 사람을 챙겨 주고 싶은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반지함을 닫아 의사가운에 넣었다.

그 순간 알림이 뇌리를 스쳤다.

띠링!

[유니크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뜻밖의 알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송대현과 작별인사 후 병원 내부를 걸으며 아이템을 확인했다.

[역환단]

- 복용 시 최대 체력이 12로 증가합니다.

- 체력회복 능력이 2배로 상승합니다.

- 효과는 영구적으로 지속됩니다.

아이템의 효과는 대박이다.

잠 못 자고 육체적으로 고된 인턴을 위한 아이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날개를 단 것처럼 가벼워졌다.

그런데 도중에 앞서 걷는 정설화를 발견했다.

"설화야."

최기석의 인사에 정설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기석아. 안녕."

"너도 오프?"

"응. 너도 오프지?"

"잘됐네. 나랑 바람 좀 쐬자."

최기석은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사서 정설화와 병원 옥상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난간에 기댄 채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포근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곳에는 잔소리를 할 레지던트도, 눈치 주는 간호사도, 불평을 늘어놓는 환자도 없었다.

두 사람은 모처럼 평화를 맛보았다.

"요새 좀 어때?"

정설화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퐁당당을 많이 해서 죽을 것 같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해. 오늘은 선물도 받았고."

최기석은 손에 든 종이백을 들어올렸다.

"그게 뭐야?"

"예전에 CPR 해 준 한의사 선생님 있잖아. 오늘 병원에 찾아와서 주고 갔어. 넌 연락 못 받았어?"

"아. 그 전화가 그거였구나. 모르는 번호라서 안 받았는데."

"둘이 나눠 먹으면 되지."

최기석은 피식 웃었다.

다시 찾아온 침묵, 정설화가 머리를 귀 뒤로 쓸어내리며 운을 뗐다.

"솔직히 의외였어."

"뭐가?"

"솔직히 난 네가 인턴 생활에 적응 못 할 줄 알았어. PK실습을 썩 잘한 편이 아니었고, 카데바 실습 때도 그렇고······."

정설화가 말을 흐렸지만 그 말뜻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과거의 최기석은 인턴 생활을 버틸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의학 지식은 빠삭했지만 워낙 새가슴이었다.

"그런데 범균 오빠한테 물어보니까 네가 지금 엄청 잘하고 있대. 위장관외과 병동 말고 다른 병동에서도 널 칭찬한다고 하더라."

"뭐. 운이 좋았지."

최기석은 가만히 정설화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달빛을 반사하며 밝은 빛을 뿜어냈다. 바람에 머리가 휘날리면서 하얀 목덜미와 귀가 드러났다.

외모를 가꾼 정설화는 전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왠지 그녀의 모습이 가슴에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아······ 아니. 그냥."

최기석은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줄 게 있어."

"줄 거?"

최기석은 의사 가운에서 반지함을 꺼내서 내밀었다.

역환단을 혼자 먹을 생각은 없었다. 송대현을 살린 것은 두 사람의 합작이다.

"이게 뭔데?"

"한의사 선생님이 환을 주고 갔어. 나눠 먹자."

최기석이 반지함을 열자 역환단의 강한 냄새가 주변을 휘감았다.

"이거 쓴 거 아니야? 나 안 먹을래."

정설화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세 살배기처럼 투정부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건 꼭 먹어야 돼."

최기석은 역환단을 반으로 쪼개서 정설화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정설화가 벌레 보듯이 역환단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설화 착하지. 환 먹고 나서 사탕 먹자."

최기석은 병동에서 챙겨 놓은 사탕으로 정설화를 달랬다.

고민하던 정설화가 역환단을 삼키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우 써! 사탕!"

최기석은 정설화에게 사탕을 건네고 본인도 역환단을 삼켰다.

[아이템을 복용하셨습니다.]

[최대 체력이 11로 증가합니다.]

[체력회복 능력이 영구적으로 1.5배 빨라집니다.]

반쪽을 먹어서 그런지 능력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의 수치만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히이잉. 그래도 써!"

정설화가 발을 동동 굴렀고 최기석은 모습을 지켜보며 웃었다.

* * *

위장관외과 수술실.

최기석은 수술 스크럽을 서는 중이다.

평소와 같이 리트랙터로 환자의 복부를 벌려 수술 시야를 넓히는 역할을 맡았다.

장시간의 수술임에도 힘들어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수술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경우도 없었다.

보조의 끝판 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다.

'젠장.'

최기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도 매의 눈 스킬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정명운의 방법대로 수술의 진행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눈알이 빠질 것 같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지만 그래도 의지로 버텼다.

고통 없이 얻는 건 없는 법이니까.

이윽고 수술이 끝났다.

최기석은 선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저절로 한숨이 터졌다.

위장관외과 인턴 생활은 내일이 마지막이다.

그런데 그토록 바라던 매의 눈은 아직 얻지 못했다.

"최 선생님!"

휴게실 문이 열리고 소독간호사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B 로젯 환자 중환자실로 옮기면 되죠?"

"센스쟁이. 역시 말 안 해도 척척이라니까."

소독간호사가 윙크를 하고 사라졌다.

이후 최기석은 환자를 SICU(외과 중환자실)로 옮긴 후 MICU(내과 중환자실)를 찾았다.

구석 자리에 있는 최미순이 눈에 들어왔다.

최미순은 눈을 감은 채 조용한 잠에 빠졌다.

나뭇가지보다 앙상한 그녀의 몰골을 보는 순간 가슴이 저릿했다.

최미순은 위암 수술을 잘 마치고 퇴원했지만 폐렴으로 금방 다시 입원했다.

'힘내세요.'

최기석은 최미순의 쾌유를 바라며 다시 수술실로 이동했다.

곧바로 긴 수술에 스크럽을 서게 되었지만 최기석은 너끈하게 보조를 끝마쳤다.

"최 선생님. 안 피곤해요?"

"아직까지는 버틸 만해요."

"우와. 진짜 대단하다. 당직을 연속으로 두 번이나 섰잖아요. 게다가 일곱 시간짜리 수술을 끝냈는데요?"

소독간호사가 혀를 찼다.

최기석은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뎌냈다.

그래서 수술 중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또한 긴 수술에서도 보조가 빈틈없었다.

"이제 최 선생님을 알파 최라고 불러야 될 것 같아요. 이제 보니까 완전 로봇이네."

"이제 아셨어요?"

최기석은 빙긋 웃으며 수술복을 정리했다.

강철 체력의 비밀은 송대환이 준 역환단에 있었다.

역환단을 복용한 이후로는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얼마 전 정설화와 이야기해 보니 그녀도 같은 효과를 보고 있다고 했다.

지이이잉.

휴게실 소파에 기대 쉬는데 콜폰이 울렸다.

"그만 좀 괴롭혀라."

최기석은 콜폰을 흘겨보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선생님. 여기 MICU인데요. 빨리 좀 와 주세요!]

"네? 무슨 일인데요?"

최기석은 얼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강효정 간호사는 평소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없기로 유명했다.

이리 다급하게 전화를 건 것은 처음이다.

[일단 오세요! 빨리요!]

"지금 바로 갑니다."

최기석은 가운을 휘날리며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중환자실에 도착하자 간호사들이 스테이션에 모여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 선생님. 저 사람들 좀 어떻게 해 주세요."

강효정이 검지로 최미순의 자리를 가리켰다.

일곱 명의 남녀가 최미순을 성벽처럼 견고하게 감싸고 있었다. 다른 환자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훔쳐보기 바빴다.

"신령님이 함께하사······."

"악귀가 물러나고 병이 나아······."

일행의 기도가 저주처럼 중환자실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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