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시험(2)
여직원 두 명이 창가에 서 있었다.
비명 소리에 비해서 상당히 차분한 모습, 살짝 맥이 빠졌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일이죠?"
최기석은 성큼성큼 긴 생머리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한쪽 팔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 양진희라는 명찰 목걸이가 걸렸다. 옆에 서 있는 여자는 강유진이다.
"벌에 쏘였어요."
"상처 좀 볼 수 있을까요? 인턴시험 보러 온 의사입니다."
양진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고 최기석은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벌침 박힌 자리 주변이 붓고 빨갛게 부어올랐다.
최기석은 지갑에서 교통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양진희의 팔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교통가드를 사선으로 눕혔다.
그 모습에 양진희와 강유진이 눈을 깜빡거렸다.
교통카드와 벌침.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조금 아플 수도 있어요."
최기석은 교통카드로 상처 부위를 쓱쓱 밀었다. 팔뚝 살이 밀리면서 작은 침이 조금씩 위로 삐져나왔다. 작업을 몇 번 반복하자 침이 쏙하고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됐어요. 이제 비눗물로 깨끗이 씻어 주면 됩니다. 혹시 불편한 데가 있나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양진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괜찮아요?"
"아. 네. 벌 때문에 너무 놀랐나 봐요. 약간 현기증이······."
양진희의 말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5/10
주 증상: 현기증 / 호흡곤란 / 안면홍조
아픈 부위: 전신
현재 상태: 비응급 ---> 응급.
경과: 불량
[패시브의 레벨이 낮아 더 자세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의료모드를 사용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응급이 막 응급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양진희의 상처를 살피자 피부에서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응급실에 가세요."
"겨우 벌에 쏘인 걸로요?"
"겨우가 아니에요."
최기석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었다.
양진희에게 찾아온 것은 아나필락시스 쇼크.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으로 30분 이내에 급성의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방치했다가는 응급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빨리 가 봐. 내가 다른 선생님한테 이야기해 줄게."
"알았어."
최기석은 양진희와 헤어진 후 7층 대강당으로 향했다.
강당의자에는 수험번호가 붙어 있었으며 번호에 맞게 인턴 지원자들이 앉아 있었다.
지원자들은 크게 두 패로 나뉘었는데 한쪽은 끼리끼리 뭉쳐서 신나게 떠들었고 나머지는 조용히 책을 읽거나 휴대폰을 만졌다.
전자는 의진대를 졸업한 의대생, 후자는 다른 학교 졸업생이다.
최기석은 자리를 찾던 중 조태호 패거리를 발견했다.
그쪽 패거리도 최기석을 발견했지만 서로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속된 말로 쌩 까는 사이가 된 것이다.
'잘됐다.'
최기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더 이상 조태호와 엮이는 건 사양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조태호와 같이 있으면 나쁜 물에 들게 뻔했다.
최기석은 조태호와 다섯 칸 떨어진 곳에 앉았다.
다행히 조태호와 가까운 쪽에 다른 대학 지원자가 있었고 옆에는 안면 있는 동기 김건우가 앉았다.
"안녕."
김건우가 먼저 살갑게 인사했다.
그러더니 검지로 조태호 쪽을 가리켰다.
"왜 쟤들 쪽으로 안 가냐?
"얼마 전에 싸웠어. 앞으로도 안 볼 거고. 근데 넌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그냥 국시 실기 다시 봐."
"걱정도 팔자야. 설마 우리 의대 시험에서 떨어지겠어?"
"아닐 수 있어. 적어도 오늘은."
"뭐. 주워들은 게 있구나."
"당연하지."
김건우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 아는 선배한테 따끈따끈한 정보를 얻었어. 오늘 시험감독 중에 헤이야치가 있대."
"헤이야치?"
"우리 의대 출신 위장관외과 조교수래.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모교 출신이라도 맘에 안 들면 자른다더라. 재작년에도 헤이야치 손에 선배 두 명이 날아갔대."
"어떻게 생겼는데?"
"뭐랄까. 산적 같은 이미지에 머리에 M자 탈모가 있다고 하던가?"
"말만 들어도 대단한 분이네."
최기석은 피식 웃었다.
설명만 들었는데도 마주쳤을 때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김건우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남강준이 최기석 쪽으로 다가왔다.
"잠깐 나 좀 보자."
남강준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쌩 하니 바깥으로 나갔다.
최기석은 별 말 없이 남강준의 뒤를 따랐다. 남강준이 자판기 앞에 서서 캔 커피를 뽑아 내밀었다.
"야. 너 진짜 태호 안 볼 거야?"
"내가 왜 그 인간을 계속 봐야 하는데?"
최기석은 뚜껑을 따서 캔 커피를 마셨다.
"우리 6년 동안 함께한 친구잖아."
"친구가 아니라 꼬붕이겠지. 넌 일방적으로 비위 맞춰 주는 걸 친구라고 부르냐?"
"하아······."
남강준이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들겼다.
"솔직히 네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조금만 버티면 걔 밑에서 편하게 먹고 살 수 있어. 너도 알잖아."
"모르겠는데?"
최기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새끼 벽창호 다 됐네. 근데 한 가지만 기억해라. 오늘 결정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그럼 나도 한마디 할까?"
"······."
"원래 똥 묻은 휴지는 버리는 법이다. 너 이용만 당하다가 내팽개쳐질 거야."
"씹 새끼가 생각해 주니까."
남강준이 이를 갈다가 대강당으로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기준은 그 자리에서 남은 커피를 다 마셨다.
남강준도 조태호 못지않게 삐뚤어진 녀석이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대강당으로 돌아가려는데 멀리서 눈이 돌아갈 만한 미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였으며 몸매가 잘 드러나는 세미 정장을 입었다.
TV 속 여배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최기석은 한동안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녀가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껴졌다.
"안녕."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고 최기석은 놀라서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던 중 여자가 멘 가방에 시선이 갔다. 분명히 예전부터 본 적이 있는 가방이다.
저 익숙한 가방은 설마······.
"너······ 설화니?"
"새삼스럽게 왜 그래?"
정설화가 피식 웃었다.
최기석은 정설화를 보고 진심으로 놀랐건만 정설화는 장난을 치는 줄 아는 모양이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예뻐져서."
"고마워."
정설화가 몸을 배배 꼬며 말을 이었다.
"전에 네가 나한테 좀 꾸며 보라고 했었잖아. 그래서 조금 신경 써 봤는데 반응이 좋더라."
"반응?"
"응. 이렇게 꾸미니까 가족이나 친구들도 확 달라진 것 같다고. 오늘 오는 사이에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정설화가 말을 얼버무렸지만 최기석은 그 뜻을 알았다.
분명 낯선 남자가 연락처를 달라며 집적거렸을 것이다.
지금의 설화는 어떤 남자라도 용기를 내서 접근해 보고 싶을 정도다.
"강준이하고는 무슨 이야기했어?"
정설화가 화제를 돌렸다.
"조태호한테 사과하라고 하길래 꺼지라고 했지. 앞으로는 말 섞을 일도 없을 것 같아."
"그럼 나도 그쪽하고는 볼 일 없네."
"너는 왜?"
최기석이 놀라서 되물었다.
비록 원년 멤버는 아니지만 정설화도 일 년 가까이 조태호 패거리와 어울렸다.
"그냥 그런 게 있어."
정설화가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최기석이 먼저 운을 뗐다.
"저번 일은 진짜 고마워."
정설화 덕분에 정진명을 소개받았으며, 정설화의 압박으로 정진명이 움직였다.
그 도움이 없었다면 소송이라는 길고 지루하고 힘든 싸움을 치러야 했다.
"별거 아닌데 뭐."
정설화가 수줍게 웃었다.
"그럼 들어갈까?"
"응."
두 사람은 함께 대강당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