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시험(1)
"그 말인즉 보육원 쪽에서는 환자의 체질적인 요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문제를 일으킨 건 병원입니다. 우리가 왜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죠?"
"계속 그렇게 나온다면······."
강태산이 박철을 응시하자 박철이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테이블에 놓았다.
"합의서입니다. 양쪽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 표시예요."
최기석과 손양희가 합의서를 읽었다.
복잡한 내용과 전문용어가 엉켜서 읽기 힘들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보상액이 천만 원이라는 것이다.
"지금 장난합니까?"
최기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 지금은 합의를 하는 게 맞다.
소송에서 이긴다고 해도 승소하기 전까지 김정혁의 재활비와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만 원이라는 헐값은 용납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사용한 치료비, 앞으로 재활에 필요한 금액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쪽에서 억지를 부리니 우리도 어쩔 수 없죠."
박철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천만원이라도 보상을 받으실 겁니까? 아니면 빈손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이런 조건이라면 둘 다 못합니다."
"그럼 소송이라도 걸겠다는 건가요?"
박철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재활비도 모자란 판국에 소송비용이 잘도 나오겠습니다. 어디 한 번 싸워 보죠. 둘 중 하나가 먼저 나가떨어질 때까지."
병원에서 아픈 곳을 찌르자 손양희가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었다.
하지만 최기석의 표정은 도리어 차가워졌다.
중요한 타이밍이 됐다.
병원 쪽은 논리에서 밀리는 것을 깨닫고 결국 힘 싸움으로 택했다.
그렇다면······.
똑! 똑! 똑!
"들어갑니다."
무거운 침묵, 팽팽한 긴장감 속에 한 중년 남자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남자는 키가 땅딸막했으며 시골 아저씨 같은 인상을 풍겼다.
입고 있는 정장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최기석의 눈빛은 유독 반짝였다.
구세주 등장이다.
"반갑습니다. 양태철 로펌 의료전문변호사 정진명입니다."
정진명이 병원 사람들에게 명함을 돌렸다.
정진명의 등장에 병원 쪽 관계자들은 잔뜩 긴장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유명 로펌의 변호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야. 박철이를 여기서 보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정진명의 인사에 박철이 소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 밑에서 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출세 많이 했어."
"······."
"진행은 어디까지 됐지?"
정진명이 최기석을 응시했다.
"병원에서 천만 원 받고 떨어지랍니다. 싫으면 소송을 걸라고."
"미친."
정진명은 속으로 생각할 법할 말을 여과 없이 뱉어 냈다. 그리고 박철이 작성한 합의서를 단숨에 훑었다.
얼굴이 종이장처럼 일그러졌다.
"하아······ 빡쳐."
"······."
"박철. 이번에도 이름 값하는 구나."
정진명은 거친 언사로 테이블 분위기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부드러운 매너에 청산유수의 달변.
보통 사람들이 변호사에게 기대하는 점을 그에게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거친 야생마 같은 냄새를 풍겼다.
정진명이 분위기를 휘어잡으면서 후배인 박철은 호랑이를 만난 강아지처럼 껌뻑 죽었다.
병원 관계자조차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양태철 로펌을 건드렸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툭!
정진명이 무심하게 서류를 테이블에 올렸다.
최기석이 보내준 의무기록에서 문제의 요지가 있는 부분을 발췌한 것으로 병원 쪽의 문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지막 장에는 이번 사건과 비슷한 케이스로 환자 쪽이 승리한 판례가 첨부되었다.
"두말하면 입 아프니까 법정으로 갑시다. 그게 좋겠죠?"
"······."
"일단 소송 들어가면 매스컴에서 보도 빵빵 때릴 거고 그러면 병원 이미지 개판 돼서 환자도 끊기고 병원도 망하고. 그림 참 좋죠?"
"저기, 변호사님. 그게······."
"합의를 볼 생각이면 성의를 보여야지. 이게 뭡니까? 이게?"
정진명이 박철의 합의서를 북북 찢었다.
"그럼 변호사님이 원하는 조건은 어떻게 되십니까?"
"이제 좀 말이 통하겠네."
정진명이 씨익 웃으며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 역시 미리 합의서를 써 온 것이다.
합의서를 읽어 가는 세 사람의 표정이 점점 흙빛으로 변했다.
"합의금이 1억 5천이요? 금액이 너무 큰데······."
"거기에 관련자들이 보육원에 와서 환자에게 사과하는 것까지 추가."
"······."
"병원이 망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낫지 않나? 한 2년 동안 양쪽 병원에서 매달 각각 300만 원씩만 주면 되는데······. 싫으면 관둡시다. 괜히 입만 아프네."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병원 관계자들이 테이블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만으로는 답이 안 나왔는지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
제법 시간이 지나고 관계자들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보육원 쪽 의견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합의금에서 5천만 원 정도만······ 그게······."
"깎아 달라고요?"
"······네."
"참 나. 여기가 병원인지, 동네 문방구인지."
박철의 제안에 정진명이 불쾌하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석아. 가자. 이 재판은 내가 특별히 무료로 쏜다."
"네!"
최기석과 송양희까지 일어나자 관계자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 합의하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쿵! 쿵!
병원직인과 송양희의 도장이 찍히면서 합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기석 씨."
"이제 끝났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최기석은 울먹이는 송양희를 달랬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행여나 이 친구 건드릴 생각 마요."
정진명이 최기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3개월 전 여기 산부외과에서 산모 죽은 케이스, 내가 서류 고스란히 갖고 있는데. 얘한테 안 좋은 소문 돌면······ 알죠?"
정진명이 해맑게 협박했다.
"가자."
"네."
정진명이 앞장서고 최기석과 손양희가 그 뒤를 따랐다.
* * *
병원 근처 카페.
최기석과 손양희는 정진명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에 바빴다.
정진명이 없었다면 병원의 배짱에 굴복하거나, 힘든 소송을 준비해야 했다.
고맙다는 말은 백번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은 설화한테 해. 널 도와주라고 귀가 터지도록 말했으니까."
"네."
최기석은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정진명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 정설화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정진명에게 통화하고 도움을 받아도 되겠냐고.
정설화는 흔쾌히 허락했고 미리 정진명에게 압력까지 행사한 모양이다.
"솔직히 제 걱정까지 해 주셔서 감동했습니다."
최기석은 합의가 끝난 후 정진명이 했던 말로 화제를 돌렸다.
정진명은 좁은 의료계에서 최기석에게 안 좋은 압력이 들어갈까 봐 일종의 방패 역할을 자처했다.
"원래 일처리는 뒤끝이 없어야지."
정진명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말이야. 이번 한 번은 내가 막았지만 그것도 소용없을 것 같다."
"무슨 뜻이죠?"
"너, 상대가 맘에 안 들면 들이받는 스타일이잖아. 맞지?"
"······네."
"앞으로 계속 싸우고 다닐 텐데, 내가 니 보모도 아니고 어떻게 다 커버 치냐."
"제 앞가림은 제가 해야죠."
최기석의 대답에 정진명이 커피를 쭉 들이켰다.
"알아서 잘해라. 하는 거 보니까 잘할 것 같고. 그나저나 저번에 봤을 때 그걸 안 물어봤네?"
"말씀하세요."
"너 혹시 설화랑 사귀니?"
정진명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펄펄 날리는 한기.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 아니요. 저희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렇지. 하긴 우리 설화가 어렸을 때부터 아빠밖에 모르고 자라서 말이야."
정진명이 대놓고 안심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도중 다시 표정이 확 바뀌었다.
"설화랑 사귈 생각도 없지?"
"아. 네. 저희는 그냥 친구 사이라······."
"그럼 됐다."
정진명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명과 대화가 끝나고 최기석은 손양희와 보육원으로 돌아갔다.
문득 바라본 하늘이 호수처럼 푸르렀다.
* * *
나흘 뒤 아침.
최기석은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반찬에 신경을 쓰는 어머니지만 오늘은 유독 상이 화려했다.
대부분 스태미나에 좋은 음식들이다.
"이것 좀 먹어 봐."
"네."
최기석은 어머니가 밥 위에 올려 준 장어구이를 먹었다.
"컨디션은 어때?"
"아주 좋아요."
최기석이 자신만만해하자 어머니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결전의 날이다.
의진 대학병원에서 인턴 시험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어느 병원에 인턴으로 가야 할까.
지난 며칠간 최기석은 심사숙고했다.
과거의 기억과 아는 사람들이 있는 진성대병원?
아니면 최근 떠오르고 있는 울선병원?
그것도 아니면 무난하게 모교인 의진대병원?
오랜 고민 끝에 의진대병원을 선택했다.
소중했던 동료들과 롤 모델인 김태식이 있던 그곳, 진성대병원에 대한 유혹이 컸지만 끝끝내 뿌리쳤다.
이번에는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다시 한 번 그들의 밑에 들어가기보다는 당당하게 그들과 마주 서고 싶었다.
식사가 끝난 후 아버지가 모는 승용차를 타고 의진대병원으로 향했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예전부터 말수가 적고 무뚝뚝했으며, 최기석도 새로운 아버지와 있는 게 데면데면했다.
"괜찮겠냐?"
아버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몸으로 인턴 생활 할 수 있겠어?"
"네. 힘들어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신호가 멈춘 사이 아버지가 최기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술이 들썩거리며 무슨 말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기석은 아버지와 헤어진 후 의진대병원에 들어섰다.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것은 의진대병원을 상징하는 열쇠 모양의 동상이다.
동상이 아침 햇살을 반사하며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그 모습이 꼭 게임 아이템처럼 보였다.
'별일 없겠지?'
최기석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의진대 의과대 졸업생은 매년 50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의진대병원에서 매년 필요로 하는 인턴은 160명 정도다. 그래서 어지간한 바보짓을 하지 않는 이상 모교 출신 지원자는 떨어지지 않는다.
시험 시작까지 여유가 있어서 병원 주변을 둘러보았다.
빅5 병원 중 하나라서 그런지 아침부터 직원들과 환자들로 붐볐다.
최기석은 구경을 끝내고 별관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꺄아아아악!"
복도 끝에서 비명이 터졌다.
주변 사람들은 비명이 터진 곳을 힐끔 볼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거기다 본관 응급실과 별관은 거리가 제법 있는 편.
만약 응급상황이 벌어졌다면 도움을 받기 쉽지 않을 듯했다.
최기석은 일단 소리가 난 쪽으로 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의료 상황이 벌어져 다른 사람이 진료를 보고 있거나, 별일 없다면 돌아가면 그만이다.
"무슨 일이죠?"
비명이 터진 행정실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