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나무 보육원(4)
최기석은 보육원을 떠나 강철병원으로 이동했다.
오늘의 만남은 일종의 전쟁선포다.
양쪽 병원에게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 의료사고를 범했는지 알려 줄 예정이다.
아니, 이미 아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겨 준다고 해야 할까.
강철병원에 도착해서 진단서를 뗀다는 명목으로 진료를 예약했다.
"김정혁 환자. 들어가세······ 또 오셨네요?"
외래간호사가 최기석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담당 선생님하고 할 말이 있어서요."
최기석은 심호흡을 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또 진단서가 필요해요?"
엄재웅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아니요. 사실 오늘은 진단서가 필요해서 선생님을 보러 온 게 아닙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선생님은 정혁이에게 의료사고를 범했습니다. 아닙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엄재웅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금방 감정을 추스르고 휘휘 손을 내저었다.
"헛소리할 거면 나가요. 환자 보기 바쁘니까."
"이래도 헛소리로 들립니까?"
탁!
최기석은 강포병원 의무기록을 꺼내서 엄재웅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엄재웅이 의무기록과 최기석을 번갈아 응시했다.
"이건······."
"강포병원 수술기록지입니다. 거기 뭐라고 쓰여 있죠?"
"······."
"복부를 절개하고 감염 부위를 살피는데 충수돌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충수돌기는 선생님이 절제했을 텐데 어떻게 남아 있을까요?"
최기석의 지적에 엄재웅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두 사람을 짓눌러 가는 가운데 엄재웅이 간신히 입을 뗐다.
"나······ 난 몰라요. 분명히 충수를 잘랐으니까."
"아직도 발뺌을 하시겠다?"
최기석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수술기록지를 제대로 보시죠. 기록지에는 S상 결장 문합 부분에 천공이 생겼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선생님은 S상 결장을 충수돌기로 착각하고 수술한 겁니다. 그리고 수술 부위가 터지면서 문제가 생겼고요."
최기석의 지적에 엄재웅이 입술을 깨물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타입인지 낭패라는 기색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럼 이번에는 조직검사지로 가 볼까요?"
"······."
"선생님이 절제한 부위를 검사한 결과, 조직이 대장 조직의 일부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
"이래도 시치미 뗄 겁니까!"
최기석이 일갈을 내질렀다.
엄재웅이 본인의 살아날 구멍만 생각하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실수를 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사과하고 적절한 보상책을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상황에서도 어떻게 저런 파렴치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당신 때문에 한 아이의 인생이 망가졌어. 뭐라고 말을 해 봐!"
"모······ 몰라. 난 몰라."
엄재웅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책상에 놓인 의무기록지를 손에 쥐었다.
부우우욱! 부우우욱!
엄재웅의 손에서 의무기록지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최기석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혀를 찼다.
"진짜 구제불능이네."
"그······ 그게 뭐 어때서? 나만 살면 그만이지."
"자, 선물."
최기석은 가방에서 똑같은 기록지를 꺼내 책상에 던졌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의무기록은 넉넉하게 복사해 두었다.
"넌 대체 뭐야?"
엄재웅의 얼굴이 새까맣게 죽었다.
"그건 알 필요 없고. 더 중요한 건 진짜 게임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거지."
"······."
"이틀 뒤 정확히 이 시간에 다시 오겠어."
최기석은 명함 한 장을 책상에 올려놓고 자리를 떠났다.
엄재웅은 최기석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늦게 명함에 시선을 주었다.
[양태철 로펌]
[의료소송전문변호사 정진명]
"아······."
현기증이 몰려왔다.
* * *
강철병원 원장실.
엄재웅은 병원장 배용석에게 낮에 있었던 사건을 설명하는 중이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배용석의 표정은 돌처럼 굳었다.
엄재웅은 배용석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머저리 같은 새끼! 아뻬 하나 제대로 못해서."
배용석이 달력을 집어던졌다.
엄재웅은 달력에 맞고서도 찍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수술 끝나고 S상 결장 절제한 거 알았어? 몰랐어?"
"아······ 알았습니다."
"아이고 병신아. 나가서 콱 뒤져라. 엉?"
배용석은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엄재웅에게 던졌다.
방 안이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그놈이 벌써 의무기록까지 확보했다며?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그걸 상의드리려고······."
엄재웅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니 애인이야! 왜 속삭이고 지랄이야!"
"죄송합니다."
"찾아온 놈이 어떤 놈인지는 알아봤어?"
"네. 최기석이라고 올해 의진대 의대를 졸업했습니다. 심부전증을 앓아서 최근 심장이식을 받았는데 그걸로 기사도 떴습니다."
"근데 그놈이 왜 이제 와서 깽판을 쳐?"
"감사 인사를 하려고 보육원에 갔다가 환자를 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씨발. 귀찮게스리."
배용석은 한숨을 쉬며 턱을 쓸어내렸다.
의진대 의대 쪽으로는 연줄 닿는 사람이 없었다.
압력을 행사할 수 있으면 일이 쉽게 풀릴 텐데······.
"가 봐."
배용석은 엄재웅을 쫓아내고 동기인 강포병원 원장 양경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요즘 별일 없지?"
[없었는데 오늘 막 생겼어.]
"최기석이라는 얘가 그쪽도 쑤셨어?"
[너도 당했어?]
양경환의 씁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놈이 충수돌기 절제술이 잘못됐다는 걸 알리지 않았다는 거랑 간호관리가 엉망이었던 걸로 책임을 묻겠단다. 너희 쪽 병신 감싸다가 우리도 피 보게 생겼어.]
"미안하게 됐다. 난들 이럴 줄 알았나."
배용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
중요한 건 지금부터 어떻게 수습하느냐다.
"의무기록을 미리 복사해서 조작도 못 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할래?"
[의진대 쪽에 아는 사람 없어? 살짝 밟아 주면 편하게 갈 것 같은데.]
"그게 되면 벌써 손을 썼지."
배용석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일이 커질 것 같아. 그놈 양태철 로펌 명함 두고 갔잖아. 양태철 로펌이면 의료소송 쪽으로는 원톱인데."
[괜히 쫄지 마.]
양경환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 로펌에 연줄이 있다면 지가 지 발로 병원에 올 이유가 없잖아. 그냥 겁만 주는 거야.]
"하긴 그것도 그러네. 인턴도 시작 안 한 좆만이가 못된 것부터 배워 가지고······."
[너희 쪽에도 이틀 뒤에 다시 온다고 했어?]
"어."
[우리 병원 일반외과 전문의 보낼 테니까. 말로 찍어 누르고 정 안되면 그 방법으로 가자. 어때?]
"알았어."
배용석은 통화를 끊었다.
* * *
"다 왔네요."
최기석은 강철병원 앞에서 본관 건물을 응시했다.
10분 후 강철병원과 강포병원의 관계자들과 미팅을 가지기로 했다.
드디어 김정혁의 원수를 갚아 줄 때가 왔다.
"정말 괜찮을까요?"
곁에 선 손양희가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느낌이 들어서······."
"불안하시겠지만 저를 믿어주세요. 여기까지 온 건 확신이 있어서입니다."
최기석은 손양희를 안심시켰다.
지이이잉.
병원 본관에 들어서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네. 지금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할게요."
최기석은 간단하게 통화를 끊었다.
"누구랑 전화를······."
"비장의 무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최기석이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미팅이 열릴 6층 회의실에 도착했다.
노크를 하고 안에 들어가자 긴 테이블에 3명의 병원 관계자가 앉아 있었다.
"여기 앉으시죠."
중앙에 있는 남자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간단한 인사와 더불어 소개가 시작됐다.
제일 좌측에 앉은 사람은 충수돌기 절제술을 한 엄재웅.
중앙에 앉은 남자는 강포병원 일반외과 전문의 강태산.
왼쪽에 앉은 남자는 병원 측 법률대리인 박철이다.
"김정혁 환자의 일은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병세가 그렇게 나빠질 게 아니었는데······."
강태산이 운을 뗐다.
"이제 와서 뻔뻔한 소리를."
"그 어떤 욕이라도 달게 먹겠습니다. 이렇게 늦게 자리를 만든 것도 저희 쪽 불찰입니다."
손양희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강태산은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서로에 대한 오해를 깨끗하게 풀었으면 합니다."
"저희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가요? 오진료와 오처치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잠자코 있던 최기석이 나섰다.
"그거야 앞으로 이야기하면서 달라지겠죠."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일단 충수돌기 절제 건부터 말씀드리죠."
강태산이 청산유수처럼 의학지식을 늘어놓았다.
엄재웅이 충수돌기가 아니라 S상 결장을 절제한 이유.
그중 하나는 바로 김정혁이 비만이라는 점이다.
비만 환자는 체지방이 많아서 수술 시야를 확보하기 어렵다.
김정혁의 경우 수술 당시 키가 167센티미터에 체중이 85킬로그램이었다.
체질량을 보면 고도비만이다.
그로 인해 엄재웅이 제대로 수술 부위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두 번째 이유는 김정혁의 특이체질 때문이다.
보통 S상 결장은 좌측 하복부에 위치한다.
그런데 김정혁의 S상 결장이 특이하게 우측 하복부로 이동해 있었다.
"전부 다 핑계네요."
이야기를 다 들은 최기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비만 환자의 시야 확보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죠. 그렇다면 오히려 더 신중을 기했어야 합니다."
"······."
"무엇보다 결정적인 게 있어요. 충수돌기 앞쪽의 결장유를 따라가면 충수돌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병원에서 제대로 확인 안 한 거 아닙니까?"
최기석의 반박에 강태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생각보다 저항이 거셌다.
"본인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서 애먼 환자를 탓하지 마세요."
최기석이 쐐기를 박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자. 그럼 이제 강포병원 쪽 변명을 해 보시죠."
"흠흠."
강태산이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감염관리에 있어서 저희가 소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환자분의 체질적인 면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는 걸 알아주세요."
"······."
"정혁 군이 앓은 괴사성 근막염의 경우 비만이 위험요인 중 하나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비만 환자가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학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사실입니다."
강태산은 몸에 축척된 체지방이 T세포의 수와 기능을 감소시킴을 덧붙였다.
또한 김정혁의 면역력이 떨어져서 글로불린을 사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놈의 비만, 비만. 이거 뚱뚱한 사람은 서러워서 못 살겠네."
최기석이 비웃음을 날렸다.
"일단 면역 문제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정혁이가 비만이라서 면역력이 떨어졌다고 하셨는데요."
"······."
"단순히 비만 하나로 모든 문제를 귀결시키는 건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글로불린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염증이 있어서 글로불린을 쓰는 것이지 비만 환자라서 글로불린을 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인과관계가 잘못됐어요."
최기석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애초에 발단은 원내 감염인 항생제 내성균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괴사성 근막염이 생기고 패혈증으로 발전했고요."
"······."
"어디 항생제 내성균도 비만 때문이라고 해 보시죠."
최기석은 유유히 도발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