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10화 (10/407)

일상으로(5)

"너희 집에?"

최기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가는 건 상관없지만 괜히 귀찮게 하는 거 같은데."

"아니야. 괜찮아."

정설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굳혔다.

고생한 최기석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알았어. 그럼 갈게."

두 사람은 몇 분 정도 걸어 정설화의 원룸에 들어갔다.

10평 정도 되는 원룸은 아담했다.

창가 쪽에 침대가 위치했으며 우측 벽으로 세탁기와 책상, 냉장고들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문득 빨래 건조대에 고정되었다.

건조대에 검정색, 호피무늬 속옷들이 정신없이 널려 있었다.

얌전한 외모와 달리 속옷 취향이 화끈했다.

"자······ 잠깐만!"

정설화가 번개처럼 건조대로 달려가 속옷을 걷었다. 그리고 옷장에 속옷들을 쑤셔 넣았다.

"네가 올 줄 알았으면 미리 정리하는 건데. 잠깐 TV 보고 있어."

정설화가 TV를 켜며 최기석의 주위를 돌렸다.

"배고프지? 내가 요리해 줄까?"

"이 시간에 요리까지야······ 괜찮으면 라면이나 끓여 줘."

"라면으로 되겠어?"

"나 라면 좋아해."

"그럼 잠깐 편의점 다녀올게."

정설화가 원룸을 떠났다.

최기석은 TV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일어나서 방을 훑었다.

또래 여자의 방에 온 것은 처음이다.

특별한 게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방에 있는 물건을 살피던 중 화장대에 놓인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 인물은 모두 오늘 술을 마셨던 멤버들로 과거 해수욕장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가장 중앙에 조태호가 서 있었다.

그 옆에 최기석과 남강준이 있었고 양쪽 사이드에 오혜정과 정설화가 있었다.

최기석은 사진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이런 그림이 나올 일은 없으리라.

"나 왔어."

정설화가 돌아와서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정말 배가 고팠는지 라면 냄새를 맡는 것으로도 왕방울만 한 침이 목젖을 지나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상을 펼치고 라면을 먹었다.

후루루룩.

면발 넘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미치겠네.'

최기석은 라면을 먹으면서도 어쩔 줄 몰랐다. 어색한 분위기가 원룸을 짓누르고 있었다.

정설화의 방에서, 정설화와 단둘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정설화도 마찬가지인지 아무 말 없이 라면만 깨작거렸다.

"그거 안 먹어?"

최기석이 정설화의 그릇을 응시했다. 처음 그릇에 올려놓은 라면이 거의 그대로 있었다.

"아까 많이 먹었더니 별로 생각이 없어."

"그럼 내가 먹을까?"

최기석은 염치 불고하고 나섰다.

배가 너무 고팠다.

"이거 내가 먹던 건데."

"괜찮아."

최기석은 정설화의 그릇을 가져와 남은 라면을 해치웠다.

순간 정설화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식사가 끝나고 최기석은 설거지를 자처했다.

대접을 받았으면 최소한 뒤처리는 해야 하는 법이다.

"······."

"······."

설거지가 끝나고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함께 TV를 보면서 실없는 가끔씩 이야기만 주고받을 따름이다.

"아. 맞다. 내가 옷 빨아 줄게."

"옷?"

"옷이 지저분한 것 같아서······. 포피돈도 묻었고."

"이거 안 지워질걸?"

"그래도 해 봐야지."

정설화는 옷장으로 가서 집에서 입는 헐렁한 박스티를 최기석에게 건넸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옷이 재밌네."

최기석은 박스티를 보고 피식 웃었다.

티 중앙에 있는 노란 병아리 캐릭터가 귀여웠다.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안경을 쓴 게 꼭 정설화 같다고 해야 할까.

"돌아보고 있을 게."

"어."

기존 상의를 벗고 박스티를 입었다.

워낙 넉넉한 옷이었기에 편하게 입을 수 있었다.

이윽고 정설화가 옷을 받아서 욕실로 들어갔다.

"봐봐."

정설화가 자신만만하게 욕실에서 나왔다. 활짝 펼친 상의가 어느새 깔끔해졌다.

"어떻게 지웠어?"

"희석한 락스 물에 잠깐 담갔다가 빨래 비누로 빨았어."

"대박인데. 완전 주부 9단이야."

최기석이 웃으며 농담을 했고 정설화도 활짝 웃었다.

빨래가 끝난 후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어색한 분위기가 얼마간 날아가면서 그나마 대화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최기석은 말을 하며 벽걸이 시계를 바라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새벽 두 시가 넘어갔다.

"이 시간이면 택시도 잡기 힘들 텐데······."

정설화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두 뺨이 어느새 잘 익은 복숭아 빛으로 물들었다.

"오······ 옷도 안 말랐는데 그냥 자고 가."

"그래도 되나?"

최기석은 민망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여자 동기의 방에서 같이 잠을 잔다니, 과거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 상황이 어쩔 수 없잖아."

"그럼 오늘만 신세 질게."

최기석은 정설화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확실히 나가서 택시를 잡기도 힘들었고 라면을 배부르게 먹었더니 졸음이 쏟아졌다.

"먼저 씻을래?"

"너 먼저 씻어."

최기석의 말에 정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설화는 속옷과 잠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샤워를 시작했다.

쿵. 쿵. 쿵.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심장소리를 듣고 놀릴 것만 같았다.

샤워를 끝낸 정설화는 속옷을 갈아입고 잠옷을 걸쳤다.

최기석이 같이 자게 돼서일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계속 신경 쓰였다.

'뭐. 이만하면······.'

예전부터 몸매는 자신이 있었다.

가슴은 큰 편이었으며 잘록한 허리에서 이어지는 엉덩이 라인도 훌륭했다.

여자동기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몸매를 부러워하곤 했다.

잠시 후 최기석이 세면을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바닥에서 잘게. 이불 어디 있어?"

최기석이 먼저 나섰다.

"아냐. 네가 침대에서 자. 오늘 고생했잖아."

"고생은 같이 했는데? 자꾸 이러면 내가 계속 미안하잖아."

"그럴 필요 없다니까."

누가 침대에서 자느냐를 두고 옥신각신 충돌이 벌어졌다.

좀처럼 해결책이 나지 않는 상황.

"그러면······ 가······ 같이······ 침대에서 잘까?"

정설화가 칼을 뽑았다.

언제까지 잠자리 문제로 지지고 볶을 수는 없을 노릇이다.

하지만 말을 꺼내놓고도 그녀의 얼굴은 당장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둘이 잘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빠······ 빨리 자자."

정설화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최기석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딸칵!

불이 꺼졌다.

화장대 위에 놓인 램프에서 주황빛이 은은하게 흘렀다.

"잘 자."

"좋은 꿈꿔."

인사를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설화는 두 눈을 뜬 채로 최기석의 기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심장은 여전히 방망이질 쳤고 손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야릇한 감정이 뱃속을 간지럽혔다.

"으으으음."

최기석이 신음을 흘리며 정설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동시에 한쪽 손이 정설화의 오른손 위로 살짝 포개졌다. 최기석의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정설화는 슬쩍 최기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최기석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자도 너무 잘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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