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2)
최기석은 장군이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6/10
주 증상: 관절 통증
아픈 부위: 다리
현재 상태: 비응급
경과: 보통
[패시브의 레벨이 낮아 더 자세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장군이의 정보가 떠올랐다.
의료모드가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최기석은 잘하면 흉부외과의뿐만 아니라 수의사도 노려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이이잉.
소파에 앉아서 쉬는데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의대 동기 중 한 명인 남강준이 메신저를 보냈다.
[야. 지금 홈페이지 가 봐. 합격자 발표됐어.]
[결과 발표 내일 아니야?]
[하루 당겨졌대. 참고로 난 붙음. ㅋㅋㅋ]
[합격률이 90퍼센트가 넘는데 당연히 붙어야지.]
[눼눼. 알겠습니다. 태호가 오늘 저녁에 강남에서 보자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있다 연락할게.]
[ㅇㅇ]
최기석은 방에 들어가서 컴퓨터를 켜고 사이트에 접속했다.
이름과 주민번호를 두드리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남강준에게 허세를 부렸지만 내심 걱정됐다.
흉통과 호흡곤란으로 시험에 완전히 집중하지 못했기에.
딸칵!
개인정보를 타이핑하고 마우스를 눌렀다.
* * *
최기석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약속장소를 서성거렸다.
현재 위치는 강남역 9번 출구.
하늘에 밝은 달이 무색하게 거리에 있는 각종 간판들이 달보다 밝은 빛을 뿌렸다.
야근을 끝낸 직원들, 회식에 나서는 세일즈맨들로 인해 거리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최기석은 휴대폰을 확인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약속시간인 9시가 됐다. 그럼에도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오늘은 의대동기들과 의사고시에 합격한 기념으로 뭉치는 날.
혹시나 떨어지면 어쩌나 고민했던 것은 기우였다.
석차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이 인간들을 어떻게 처리한다?'
약속장소를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말이 친구들이지 오늘 만날 인간들은 조태호를 중심으로 기형적으로 뭉친 관계다.
오늘 술을 마시자고 제안하는 것부터 어이없지 않은가.
막 수술을 받은 그를 이런 자리에 부르다니······.
과거의 최기석은 생각 없이 조태호 패거리와 어울렸지만 지금의 최기석은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웬만하면 오늘 건수를 잡아서 뛰쳐나올 생각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야. 얼굴 좋아 보인다."
누구지······.
최기석은 상대를 한참 살피다가 그가 남강준임을 알아차렸다.
"뭐야. 친구가 왔는데 인사도 없냐?"
"오랜만이다."
최기석은 덤덤하게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남강준과 친했던 건 과거의 최기석이지 지금의 최기석이 아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낼 생각도 없고.
"오늘따라 표정이 뚱한데? 왜 그래? 아직 몸이 안 좋아?"
"그럼 좋겠냐?"
최기석의 말에 남강준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라면 헤실헤실 웃을 최기석이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저기. 태호 온다."
남강준이 멀리서 오는 조태호를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조태호는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이마 뒤로 넘겼으며 고급스런 코트를 걸쳤다.
주변에 있는 여자들이 조태호를 훔쳐보기 바빴다.
"바깥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다. 시험도 합격했는데 분위기 좀 내 보자고."
조태호가 최기석을 보며 낄낄 웃었다.
세 사람은 거리를 걷다가 고급 선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술과 안주가 나오고 본격적인 이야기꽃이 피었다.
화제는 두 가지에 집중되었다.
어떤 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할 것인지, 선배들에게 들은 인턴 생활이 어떤지 듣는 것이다.
"아는 선배가 인턴은 삼신이라고 하던데. 눈치 보는 데는 귀신이고 먹을 때는 먹신, 일하는 건 등신이래."
남강준의 이야기에 조태호가 이를 드러내며 낄낄거렸다.
"야. 넌 안 웃기냐?"
"별로."
최기석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의 그는 이미 인턴을 겪고 레지던트 3년 차에 접어들었다.
조태호와 남강준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이미 경험한 셈이다.
'니네가 인턴 해 봐라. 그딴 소리는 뻥긋도 못할 걸?'
최기석은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과는 결정했어?"
조태호가 술잔을 비우며 화제를 바꾸었다.
"응급의학과가 당기기는 하는데······."
남강준이 말끝을 흐렸다.
응급의학과는 최근 의대생들이 많이 지원하는 인기 과 중 하나다. 일은 힘들지만 다른 과와 달리 입원환자를 돌볼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동료끼리 의견만 맞추면 2주 가까이 쉬는 것도 가능했다.
최근 정부 정책 또한 응급의학과의 인기를 높이는데 한몫 거들었다.
"아무래도 태호 너 가는 쪽으로 따라가야지."
"그래. 성형외과로 와."
조태호가 술잔을 비우고 말을 이었다.
"전문의 따고 바로 개업할 거다. 아빠가 이 근처에 병원 차려 준다고 했으니까. 그땐 이 몸이 너희 둘 다 받아 줄게."
남강준과 조태호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지만 최기석은 한 마디도 껴들지 않았다.
"너 오늘 이상하다?"
조태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렇게 말이 없어."
"그냥."
최기석은 짧게 대답했다.
이제 갓 면허를 딴 친구들이 하는 병원 이야기가 끌릴 리가 없었다.
그는 나름 산전수전을 겪어 레지 3년 차까지 생활해 봤으니까.
최기석은 가만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남강준이 따라 준 술잔이 여전히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수술받은 것을 아는 두 사람도 딱히 술을 권하지는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남강준이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넌 무슨 과 갈 건데?"
"흉부외과."
최기석이 짧게 대답했다.
과거도, 지금도, 미래도 그에게는 항상 흉부외과뿐이다.
"미쳤어? 병원 최고의 3D 과를 제 발로 간다고?"
남강준과 조태호가 다른 과로 가라면 설득했지만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애초에 이 둘과 최기석은 시작점부터 달랐다.
대화가 잠시 끊어진 사이, 술집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여자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의대 동기 오혜정과 정설화다.
"자기야. 나 왔어."
오혜정이 조태호의 곁에 앉았고 조태호는 익숙하게 오혜정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았다.
정설화는 오혜정의 옆자리인 좌석 끝에 앉았다.
"좋아 죽네. 좋아 죽어."
"부러우면 너도 애인 만들던가.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오혜정이 남강준을 놀리며 조태호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자 조태호가 테이블 밑으로 팔을 내려 오혜정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아······ 안녕."
정설화가 수줍어하며 맞은편의 최기석에게 인사를 건넸고 최기석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퇴원했다더니 좋아 보인다."
"그래? 살만 쪘는데?"
"아니야. 지금이 더 보기 좋아."
정설화는 이미애가 했던 말을 똑같이 했다. 마치 이미애와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것처럼.
최기석은 잠시 정설화를 응시했다.
뭔가 아쉬웠다.
얼굴을 가리는 커다란 안경과 한 듯 안 한 듯한 화장.
지나치게 수수한 복장만 손보면 오혜정보다 훨씬 예쁠 것 같은데 말이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정설화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아. 미안."
최기석은 민망해서 남강준의 이야기에 껴들었다.
정설화와 오혜정이 합류하면서 분위기는 한층 화기애애해졌다.
술잔이 정신없이 오고 갔고 대화는 끊이질 않았다.
최기석은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종종 정설화를 힐끔거렸다.
정설화는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적당히 맞장구쳐 주며 이따금 싱긋 웃었다.
진흙 속의 진주.
이렇게 막돼먹은 패거리에 그녀가 속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대체 이유가 뭘까.
최기석은 화장실을 다녀오던 중 조태호와 마주쳤다.
"잠깐 바람 좀 쐬자."
"좋을 대로."
두 사람이 가게를 나와 외딴 골목에 자리를 잡았다.
"후우우······."
조태호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야. 나 수술받은 지 얼마 안 됐다. 술은 안 마셨으니까 상관없는데 이건 아니잖아."
최기석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고 조태호는 얼굴을 찡그리며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너 설화한테 관심 없냐?"
"뭐. 딱히."
"솔직히 말해. 너 설화가 너 좋아하는 거 모르지?"
조태호의 말에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이에 조태호가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참 대단하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연애세포가 없는 것 같아."
"······."
"강준이가 설화 좋아하는 것도 모르겠네?"
"······알아. 방금 들었거든."
"크크크크큭. 하긴 연애야 당사자들끼리 몸 가는 대로 하면 되는 거고."
조태호가 담배를 비벼 끄며 최기석을 바라봤다.
"너 요새 좀 변한 것 같다? 전에는 내 눈도 똑바로 못 쳐다봤는데."
"친구끼리 말하는데 눈을 안 보면 그렇잖아. 거짓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가? 난 네가 눈 내리까는 거 좋아했는데."
"변태 새끼. 이상한 버릇 고쳐라."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조태호가 최기석에게 향한 시선을 거뒀다.
"확실히 변했어."
'당연하지. 나는 네가 알던 호구가 아니거든.'
최기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술집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두 사람은 우연히 골목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몸이 한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골목 끝에 누군가가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