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1)
"아들!"
"오셨어요?"
최기석은 어머니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면 어머니는 손을 흔들며 최기석을 살갑게 맞았다.
"몸은 괜찮지?"
"네."
"또. 또. 존댓말 쓰네. 갑자기 왜 그래? 엄마가 불편해?"
"아니에요."
입은 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으로 살 때는 고아원에서 부모 없이 살았다.
그런데 최기석이 되면서 새 부모님을 얻었다.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낯선 게 당연했다.
새 부모님과의 기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그것은 일주일 전에 첫 만남이다.
무균실에서 의식을 차리고 면회하던 날, 부모님은 최기석을 보며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말했다.
눈을 떠 줘서 고맙다고.
다시 곁에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그들의 진한 사랑이 최기석은 어리둥절했다.
누군가가 그를 위해 울어준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단 한 사람 그를 길러 준 보육원장을 빼면 말이다.
"옷 가져왔으니까 입고 나와."
"네."
최기석은 어머니가 건넨 종이백을 받고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병실에서 짐을 챙겼다.
"이제 진짜 가는구나. 부럽네."
"건강해라. 짜샤."
같은 병실 환자들이 한마디씩 건넸다.
"가냐?"
윤문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형님 덕분에 병실 생활 즐겁게 했습니다. 꼭 건강하게 퇴원하세요."
"암. 그래야지. 가기 전에 휴대폰 번호 불러 봐라."
윤문재가 그의 전화번호를 얻은 후 씨익 미소를 지었다.
"형아가 뜨면 꼭 여배우 소개시켜 줄게. 좀만 기다려."
"네. 기대하고 있을 게요."
최기석은 병실환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몸이 좋다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피로하거나, 식욕이 떨어지거나, 구토 증상이 일어나면 곧바로 병원을 찾으세요. 퇴원약은 일주일치니까 잊지 말고 챙겨 드시고요."
이미애의 퇴원 안내가 끝났다.
최기석은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눈 후 병원을 나갔다.
휘이이이잉.
바깥으로 나오자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최기석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병원을 응시했다.
언젠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다만 그때는 환자가 아닌 의사가 되어 있으리라.
* * *
최기석은 어머니와 병원 인근 중국집을 찾았다.
점심 먹기에는 이르다고 했지만 어머니가 아득바득 우겼다.
퇴원 기념으로 최기석이 평소 좋아하는 중국집에 꼭 가야한다는 것이다.
"짜장면에 탕수육이면 되지?"
어머니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고 최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짜장면, 짬뽕, 탕수육 주세요."
주문이 끝나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어머니가 질문하면 최기석이 대답하는 식이었다.
일이 끝나면 매일같이 문병을 오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병실을 찾았던 어머니다. 그런데도 뭐가 궁금한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이런 게 진짜 부모의 마음일까.
어머니의 관심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기석아. 근데 너 정말 이상해진 것 같아."
어머니가 화제를 돌렸다.
"뭐가요?"
"수술 끝난 후부터 엄마한테 계속 존댓말 쓰잖아. 전에는 안 그랬는데."
"아. 그거요?"
최기석은 괜히 물을 마시며 머리를 굴렸다.
"수술받고 나서 철 든 거죠, 뭐."
"안 쓰던 존댓말을 쓰는 게 철든 거니?"
"그······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엄마는 왠지 거리감이 느껴져서 싫은데. 그래도 아들이 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
어머니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이미애라는 간호사,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니니?"
"아닐 걸요?"
"하긴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둔한 네가 그걸 알아차릴 리가 없어."
"······."
"면회 올 때마다 널 힐끔거리는 걸 몇 번이나 봤는지 몰라."
"잘못 보셨어요."
"아이고. 답답해. 이러다가 손주도 못 보고 죽을까 봐 겁난다."
어머니의 탄식에 최기석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과거 이 몸의 주인공이었던 최기석도, 정해진도 여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해진은 연애를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천연기념물이었고 최기석은 연애 경험이 단 한 번뿐이었다.
"자리 잡을 때까지는 연애도 못할 텐데.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전 의사잖아요. 환자가 애인이죠."
"그래. 할 수 있으면 환자라도 만나 봐. 엄마는 그랬으면 좋겠어."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음식이 나왔고 최기석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
괜히 TV에 소개된 맛집이 아니었다.
든든하게 끼니를 챙긴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뭐해? 안 들어오고?"
거실로 들어간 어머니가 최기석을 바라보았다.
"그냥 오랜만에 오니까 이상해서요."
최기석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그가 살 곳은 80평의 아파트다. 아파트는 전철역과 5분 거리에 있었으며 베란다에 서면 주변 경관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었다.
넓은 거실에는 소파와 벽걸이 TV가 놓였고 전자제품과 가구는 다 번쩍번쩍했다.
최기석의 기억을 흡수해서 집이 잘사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직접 들어와 보니까 느낌이 또 달랐다.
"멍! 멍! 멍!"
장군이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어머니를 쫓아다녔다.
장군이는 믹스견으로 3년 전부터 키운 애완견이다.
"엄마는 약속 있어서 나가야 하는데 혼자 있을 수 있지?"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혹시라도 아프면 참지 말고 전화해."
어머니가 떠난 후 최기석은 천천히 집을 훑었다.
그러던 중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이 눈에 띄었다.
단란한 네 가족의 모습, 그중에서 그보다 어린 남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동생이라······."
최기석이 중얼거렸다.
동생의 이름은 최준기다.
최기석보다 네 살이 어렸으며 지방에 있는 대학에 다니며 자취생활 중이다.
부모님을 대하는 것도 편치 않은 상황.
갑자기 생긴 동생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다.
최기석은 방을 훑다가 소파에 앉았다.
"······."
"······."
문득 장군이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장군이는 고개를 휙 돌려 최기석의 시선을 피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과거의 최기석은 장군이를 없는 셈치고 살았기 때문이다.
"장군아. 이리 온."
최기석이 혀를 튕기며 장군이를 불렀지만 장군이는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했다.
무거운 엉덩이도 일어날 줄 몰랐다.
이른바 개무시.
최기석은 포기하지 않고 서랍에서 간식을 꺼내 흔들었다.
아직은 낯선 집안과 가족이다.
상대가 설령 강아지라도 친해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니까.
"장군아. 이거 봐라."
최기석의 끝없는 구애에 장군이가 마침내 움직였다.
장군이는 설렁설렁 걸어와서 최기석이 주는 육포를 받아먹었다.
그러더니 원래 있던 자리에 배를 깔고 누웠다.
이른바 먹튀.
최기석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최기석은 장군이와 기 싸움을 벌이다가 문득 재미있는 발상을 떠올렸다.
"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