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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5화 (5/407)

귀환(5)

아침식사와 회진이 끝나면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최기석은 침상에 기대 달력을 바라보았다.

오늘 날짜에 그려진 빨강색 동그라미를 발견한 순간 미소가 피었다.

손꼽아 기다렸던 퇴원 날.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싱글벙글 웃던 최기석이 짐 정리를 시작했다. 세면도구를 비롯한 잡다한 용품들을 백팩에 담았고 간식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부럽다. 부러워."

"난 언제쯤 퇴원하지?"

짐 정리하는 최기석을 보고 장기영과 권준호가 푸념을 흘렸다.

"짜식. 벌써 갈 준비 하냐?"

윤문재가 세면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다.

"갈 사람은 가야죠."

"기왕이면 나도 같이 데려가."

"형님은 좀 더 계셔야 해요."

"나 쌩쌩한데?"

"마음만 쌩쌩한 게 아니라 여기도 쌩쌩해야죠."

최기석은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수술도 잘 끝났는데 뭐가 문제야. 난 이제 멀쩡하다고."

윤문제가 툴툴 거렸다.

"진심이세요?"

"뭐가?"

"멀쩡하다는 말이요."

최기석의 말투가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러자 윤문제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아직 흉통이 남았고 가슴도 뻐근하잖아요."

"그거야 수술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픈 거지. 그런데 내가 아픈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제 혼자 중얼거리는 거 들었어요."

최기석은 대충 둘러댔다.

사실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윤문제의 상태를 파악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에도 윤문재의 경과는 좋지 않았다.

의료진이 수술 중 약간의 실수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통증의 원인이 죽상경화증 하나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후자 쪽의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형님. 오늘 아침 회진 때 멀쩡하다고 거짓말 하셨죠?"

"어? 어. 그게······

"오후 회진 때는 불편한 거 다 말씀하세요. 의사는 신이 아니에요. 환자가 말해야만 아는 것도 있어요. 그리고······."

"······."

"치료는 의사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환자랑 같이 하는 거지."

"너. 알고 보니까 마누라보다 더 독하다?"

윤문재가 미소를 지으며 최기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네."

최기석은 짐을 반쯤 꾸리고 스테이션으로 갔다.

이미애가 입구 쪽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선생님. 저 체중계 좀 주세요."

"몸무게 재시게요?"

"네. 요새 살이 많이 쪄서요."

최기석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무균실을 나온 후 열흘가량 일반 병동 생활을 했다.

짬짬이 먹는 간식으로 살이 부쩍 붙었다.

슬리퍼를 벗고 체중계에 올라가자 눈금이 사정없이 올라갔다.

최종 몸무게는 72킬로그램.

무균실에 있었을 때보다 5킬로그램이 더 쪘다.

최기석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쩐지 배가 나왔다 했어."

"왜요? 저는 지금이 더 보기 좋은데."

이미애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키를 생각하면 지금이 정상 체중이에요."

"······."

"그리고 기석 씨 혹시 그거 알아요?"

이미애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요새 정말 보기 좋아요. 수술받기 전에는 다른 환자랑 이야기도 안 했는데, 최근에는 잘 어울리잖아요. 마치 수술이 끝나고 사람이······ 변한 것 같아요."

"당연히 변했죠."

"네?"

"여기가 변했으니까요."

최기석은 왼쪽 가슴을 가리키고 병동으로 돌아갔다.

나이 많은 환자들이 자리를 비우면서 병실에는 30대 남자 환자 박유빈과 최기석만 남았다.

"보고 싶은 거 있어?"

박유빈이 리모컨을 잡았다.

"아니요."

"그래? 그럼 내가 보고 싶은 거 본다?"

박유빈이 정신없이 채널을 돌렸다.

채널은 음악방송에서 멈췄고 4인고 걸그룹이 음악에 맞춰서 춤을 췄다.

"지금부터 우리의 시간이죠.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대는 몰라요."

발랄한 멜로디가 귀를 사로잡았다.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TV를 응시했다.

"······."

순간 말문이 막혔다.

걸그룹 중앙에 서 있는 아이돌의 얼굴이 낯익었다.

기억을 뒤지던 중 아이돌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 깨달았다.

연예인이 꿈이라던 그녀 강은하.

진성대병원에서 진료를 봤던 환자가 아이돌로 데뷔했다.

TV 속에서 춤을 추는 강은하의 모습이 놀라웠다.

"형. 저 그룹 이름이 뭐에요?"

"너 슈퍼 비너스 몰라?"

박유빈이 혀를 차며 설명을 이었다.

슈퍼 비너스는 막 데뷔한 그룹으로 최근 가장 핫한 걸그룹이다. 데뷔곡 '사랑을 넘어서'가 빵 터지면서 각종 CF도 찍고 있다고 한다.

"난 강은하가 제일 좋더라. 강은하가 청순 갑이지."

박유빈이 실실 쪼갰다.

최기석은 설명을 다 듣고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은하가 성공적으로 데뷔했다는 것은 분명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행복해 보이지 않을까.

분명 그에게는 춤추고 노래 부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었는데.

비록 화면 속 모습이지만 이상 기류를 포착할 수 있었다.

슈퍼 비너스의 무대가 끝나고 나이 든 환자들이 병실로 돌아왔다.

리모콘이 윤문재에게 넘어갔다.

채널은 바뀌었지만 최기석은 계속 TV를 응시했다.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던 강은하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 * *

병실은 평화로웠다.

환자들이 TV를 보면서 깔깔 거렸고 최기석은 적당히 대화에 껴들며 웃음을 나눴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며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여학생이 병실 환자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윤문재에게 다가갔다.

여학생의 이름은 윤다혜로 윤문재의 딸이다.

"다혜 왔어?"

"어."

윤다혜가 짧게 대답했다.

"넌 이 친구 처음 보지? 최기석이라고 내가 병실에서 제일 예뻐하는 동생이야."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최기석은 윤다혜와 인사를 나눴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윤문재와 달리 윤다혜는 곱고 단아한 이미지를 풍겼다.

어머니를 많이 닮은 모양이다.

"공부는 잘 돼?"

"그럭저럭."

부녀간의 대화가 이어졌다.

윤문재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윤다혜가 짧게 답하는 식이다.

당연히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다혜야. 아빠가 오렌지 주스가 먹고 싶은데. 편의점에서 한 박스만 사다 줄래?"

"아빠가 가면 안 돼? 나 이제 고3이잖아. 빨리 가서 공부해야 돼."

"잠깐이면 되는데······."

윤문재가 만 원짜리를 내밀었다.

휙!

윤다혜가 낚아채듯이 돈을 챙겨 병실을 떠났고 윤문재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원래 착한 애인데. 요새 예민한가 봐."

윤문재가 다른 환자가 들으라는 듯 한마디 했다. 하지만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최기석은 잠깐 시간차를 둔 뒤 병실을 나갔다.

편의점 근처에서 서성이자 오렌지 주스를 사고 나오는 윤다혜가 보였다.

체력: 5/10

주 증상: 여드름

아픈 부위: 피부

현재 상태: 비응급

경과: 보통

[패시브의 레벨이 낮아 더 자세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주의! 이 환자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상태창으로 윤다혜를 확인한 순간 피식 웃음이 터졌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병실까지 같이 갈까?"

"······네."

윤다혜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최기석은 날씨나 학교생활 같은 일상적인 주제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던 중 본론으로 치고 들어갔다.

"아까는 아버지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니?"

"왜 참견이세요?"

윤다혜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네 말이 맞아. 쓸데없는 참견이기는 한데 그래도 내 말 잠깐만 들어 볼래?"

최기석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가끔은 네 기분을 내세우기 전에 생각해 봐. 부모님도 사람이야. 네 행동에 상처 받을 수 있다고."

"······."

"네가 그렇게 나가고 너희 아빠가 얼마나 속상해 했는 줄 알아?"

최기석의 조언에 윤다혜는 침묵을 지켰다.

입에 자물쇠라도 채운 것처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병실에 도착했다.

최기석은 침상에 앉았고 윤다혜는 병실환자들에게 오렌지 주스를 돌렸다.

"드세요."

윤다혜가 주스 병을 따서 윤문재에게 건넸다.

"아니. 우리 딸이 이런 서비스를?"

"드······ 드시고 싶다고 했잖아요."

"고맙다."

윤문재가 빙긋 웃었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최기석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봐봐. 우리 딸이 원래는 이렇게 착하다니까. 말도 안 했는데 주스를 돌리고 나 마시라고 뚜껑도 따 주잖아."

윤다혜가 떠난 후 윤문재는 팔불출 아버지가 되었다.

잠시 후 일단의 사건이 마무리되고 시간이 흘렀다.

"기석 씨. 어머님 오셨어요!"

이미애의 외침에 최기석이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퇴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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