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백색의 긍지(2)
(331/332)
331. 백색의 긍지(2)
(331/332)
331. 백색의 긍지(2)
2022.06.28.
새하얀 악마가 나타났다.
그런 소문이 마계에 알음알음 퍼졌다.
사실 그건 악마들에게 있어 도발이나 마찬가지였다.
악마가 천사를 싫어하듯, 천사를 상징하는 백색은 악마들에게 있어 죽여 달라는 표식과도 같았다. 누가 미쳤다고 감히 마계에서 새하얀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흐음.”
7대 악마 중 하나이자, 마계의 대공.
마계에서 가장 위대한 재능을 지닌 자.
나태의 악마, 벨페고르.
그 역시 백색의 악마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흥미로워.”
단순한 관종이라고 보기엔, 생각보다 백색의 악마는 오래 살아남았다.
이렇게 소문이 퍼질 때까지 살아 있는 걸 보면 상당히 강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벨페고르는 그 악마의 강함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어지간한 강함 ‘따윈’ 취급조차 하지 않는 자였으니까.
애초에 루시퍼를 제외한다면 이 마계에서 벨페고르의 적수가 될 자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폭식의 악마가 좀 귀찮게 하지만 그냥 좀 귀찮을 뿐이다.
정리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정리할 수 있었다.
“백색의 아름다운 악마라…… 꽤 가지고 싶군.”
벨페고르는 소문의 악마에게 강함보단 외견에 흥미를 느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아름다운 악마.
그 외견은 색욕의 악마인 마라 파피야스조차 극찬했을 정도라고 한다.
“하얀색은 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지.”
그 어떤 색보다 더럽힐 때 큰 쾌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벨페고르는 그렇기에 천사들의 싸움에서 늘 가장 앞에서 싸웠으며, 가장 많이 백색을 더럽힌 자였다.
“피올로.”
“예, 전하.”
“그 계집을 내게 데려와라. 할 수 있겠지.”
벨페고르의 곁에 서 있던 흑색의 거한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만약 다른 마족이 본다면 경악했을 인물이다.
흑살왕 피올로.
마계 서열 9위의 강자.
7대 악마의 직위에 관심이 없어서 9위에 머무를 뿐, 그의 실력은 마계에서도 자자했다.
그런 강대한 악마도 벨페고르의 앞에선 순한 양처럼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물론입니다. 바로 전하의 앞에 머리를 가져다 바치지요.”
“이런, 나는 그 계집을 죽이라는 게 아니야. 되도록 더럽히지 말고 말끔하게 데려와라.”
더럽히는 건 내가 할 터이니.
그런 말뜻을 단번에 이해한 피올로는 재차 허리를 숙인 후 조용히 사라졌다.
“그래도 조금은 앙칼진 계집이면 좋겠군.”
벨페고르는 피올로가 실패한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7대 악마라도 쉽게 볼 수 없는 강자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 하얀 계집애만큼 더럽히는 맛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오래 전에 만났던 한 긍지 높은 천사를 떠올리며 벨페고르는 웃었다.
너무나 긍지가 높았기에 추락할 때도 아름다웠지.
추락한 천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 추락한 천사들은 스스로의 분함을 참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으니까.
***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피올로가 백색의 악마를 잡아 왔어도 진작 왔어야 할 시간이었다.
벨페고르는 지루함에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늦어.”
벨페고르에게 주어진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나태의 의무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유롭고, 쾌락을 탐하며 살아간다.
벨페고르가 그런 방자함을 이해받을 수 있는 건 오직 그의 강함 때문이었기에, 나태의 영역은 다른 7대 악마들의 영역보다 조용했다.
다른 지역은 7대 악마의 자리를 탐하는 악마들로 시끌시끌했지만, 벨페고르에겐 누구도 감히 그런 생각을 품지 못했으니까.
거기다 잔혹한 성정을 지닌 탓에, 누구도 나태의 영토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았다.
“흐음, 오랜만에 재미 좀 보려고 했건만. 설마 죽여 버린 건 아닐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옥좌에 앉아 잠을 청했다.
아니, 청하려 했다.
나태의 궁전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드디어 왔나.”
천천히 옥좌에서 일어나며 몸을 풀었다.
피올로가 잡아온 백색의 악마를 가지고 놀 생각에 벌써부터 흥분되었다.
그 계집은 어떤 식으로 울부짖을까.
덜컹!!
“……응?”
거대한 문이 열리며, 대공의 홀에 한 명의 악마가 들어왔다.
고풍스런 하얀 드레스에 치렁치렁한 프릴이 달린 양산을 쓴 아름다운 아가씨.
백색의 악마.
“흐응.”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청초한 미모를 지닌 여성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하게 홀의 안을 훑었다.
그리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벨페고르와 눈을 마주쳤다.
“역시 당신이었네.”
“당신?”
나태의 악마, 벨페고르에게 감히 누가 ‘당신’이라는 호칭을 쓰겠는가.
그 낯선 호칭에 벨페고르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묘한 말이야,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구나.”
“알지.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만.”
“피올로는 어디에 있지? 녀석이 너를 여기에 데려온 건가?”
“피올로? 아아, 그 귀여운 악마를 찾는 모양이네.”
아자젤은 그렇게 말하며 왼손을 들어, 벨페고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붕 날아와 바닥을 구르는 그것은 놀랍게도 공포에 질린 피올로의 머리였다.
“갑자기 덤벼서 놀랐지 뭐야. 실수로 죽여 버렸어.”
“실수로? 하, 하하하! 너는 정말로 재밌는 녀석이로구나.”
흑살왕이라 부리던 강대한 악마가 죽었음에도 벨페고르는 그저 웃었다.
확실히 느껴지는 힘의 크기가 제법 크긴 했다.
백색의 악마는 생각보다 강한 악마였다.
피올라조차 감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하지만, 자신에 비하면 아니었다.
“오랜만에 즐거워지겠어. 역시 이런 앙칼진 계집이 좋단 말이지.”
벨페고르의 눈이 붉게 물들며, 붉은 마기가 치솟았다.
나태의 영역 전체를 크게 흔들만한 막대한 마기의 방출이 퍼져나가며 백색의 악마의 옷깃을 흔들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아자젤.”
“아자젤? 흠, 마치 천사 같은 이름이군. 더욱 좋구나.”
벨페고르는 하얀 드레스를 번들거리는 눈으로 보았다.
벌써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짙은 쾌락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부디, 간단히 죽지 말거라.”
적색의 뇌전이 쏘아지며 아자젤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번뜩이는 붉은 눈, 그의 팔에서 치솟은 갈퀴와도 같은 손톱들.
“…….”
아자젤의 양산이 변화하며 두 자루의 검으로 변했다.
양손에 각각 쥔, 고풍스런 검으로 벨페고르의 공격을 연신 튕겨내었다.
‘묘하게 익숙한 검술이군.’
쌍검을 사용하는 것도 흔치 않지만, 검술도 낯이 익었다.
“그 검술을 누구에게 배웠지.”
“어머니.”
“호오…… 응?”
소리의 벽을 깨부수며, 두 명의 공방이 치열하게 오갔지만 둘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했다.
벨페고르는 아자젤의 답변에 꽤 오래 전에 있었던 전투를 떠올렸다.
멸종했으리라 알려진 천사를 발견하고 가지고 놀았던 일.
꽤나 즐거웠던 일이었기에 벨페고르의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설마, 그 천사계집. 자결하지 않았던 건가?”
“예상외네, 당신이 어머니를 기억할 줄이야.”
“큭큭큭! 이거 아주 재밌구나, 설마 날개가 꺾이고 긍지가 더렵혀진 천사가 살아남아 아이를 낳았을 줄이야.”
만약 그 정도의 집념을 가진 천사인 줄 알았다면 그냥 버리지 않았을 텐데.
“제법 강한 악마라 생각했건만, 과연 나의 딸이라 그랬나.”
천사와 악마의 혼혈.
결코 있을 수 없는 존재.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이라고 했어.”
“그래서 나를 죽이러 온 건가? 인형처럼?”
“응.”
여태 무표정하게 벨페고르의 공격을 받아던 아자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런 목적마저 없으면, 나의 삶은 너무나 따분하거든.”
“흠?”
콰아앙!!
아자젤의 검격에 벨페고르의 몸이 크게 밀려나갔다.
‘이상하군. 저 계집의 몸에 담긴 마력은 나보다 한참 아래일 텐데?’
근데 힘 싸움에서 자신이 밀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중해진 벨페고르를 보며 아자젤은 검을 쥔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살며시 잡아 올렸다.
마치 춤을 신청하는 귀부인처럼.
“자, 춤을 출 거야. 부디 템포를 잘 따라오길 바랄게.”
이상했다.
분명 강한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공포를 느꼈다.
‘공포? 이 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자세를 잡았다.
순수한 악마도 아닌, 천사와의 잡종에게 공포를 느꼈다고?
우습다.
왜 자신이 나태의 악마라 불리는지.
왜 자신에게 이런 자유가 주어졌는지.
저 건방진 딸에게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이럴 수가.’
벨페고르는 크게 경악했다.
자신이 공격은 아자젤에게 닿지 않았다.
‘저 계집의 힘은 끝이 없는 건가?’
분명 아자젤의 힘을 아득히 넘어서는 힘으로 짓누르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자젤은 그 이상으로 강해졌다.
계속.
계속.
계속.
벨페고르의 힘을 넘어서 그를 벌레처럼 짓뭉개버릴 때까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단순히 아자젤이 자신보다 강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악마의 힘은 감정에서 나온다.
감정이 옅은 악마는 그 힘에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벨페고르가 본 아자젤은 극히 감동의 동요가 적었다.
그렇다면 대체 저 무한에 가까운 힘은 어디서 나오고 있는 건가.
악마로서의 능력?
하지만 그것을 가동하기 위해선 결국 그에 걸맞은 큰 감정이 필요하다.
“아. 그랬군.”
벨페고르의 목에는 백색의 검이 겨누어져 있었다.
그의 양팔은 잘리고, 전신은 상처투성이였다.
반면 아자젤의 드레스는 여전히 새하얀 순백이었다.
“너는 강하구나, 아자젤.”
“당신은 생각보다 약하네.”
“크, 크크크. 그래. 이제 나태의 악마의 자리를 놓아줄 때가 된 모양이군.”
죽음을 앞둔 상황에도 웃는 벨페고르는 마치 아자젤을 비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담하지. 너는 두 번 다시 지금처럼 강해질 수 없을 것이다.”
“……설마 추하게 정신승리라도 할 생각이야?”
“그럴 리가. 내 말은 사실이다. 너의 능력은 이제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벨페고르는 보았다.
무한하게 강해지던 아자젤의 눈동자를.
그녀 본인도 알지 못한 그녀가 가진 힘의 근원을.
“너는 스스로가 결여되었다고 생각할 테지.”
“…….”
“하지만…….”
너는 그저 모를 뿐이야.
‘우습군, 이제 나태의 악마가 될 녀석이 가진 근원이.’
설마 ‘공포’였을 줄이야.
‘너는 겁쟁이구나, 아자젤.’
그저 그 사실을 모를 뿐.
물론 그 공포는 단순히 자신을 두려워하여 커진 게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큰 것.
어머니의 소망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녀의 공포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공포였다.
“크, 크큭. 허나 아쉽군. 너의 절망하는 얼굴도 보고 싶었…….”
벨페고르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자젤은 이 이상, 그의 방자함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내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궁금하지 않아.”
굳이 악마로서의 힘이 없어도 자신은 강하다.
“흐응.”
아자젤은 벨페고르의 시체를 넘어, 홀을 둘러보았다.
고요했다.
나태의 위(位)란 너무나 고독한 자리였다.
“조용하네.”
어머니가 바라던 소망도 이뤘다.
이제 아자젤에게 남은 목표는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도 없었으며, 그저 삶을 연명할 뿐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나태의 악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할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이 지루함을 잊기 위해 돌아다니다 보면 무언가 재밌는 걸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부디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건, 아자젤로선 드물게 간절한 말이었다.
***
탁.
아자젤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당시 상황을 유추해 지어낸 이야기였다.
분명 벨페고르는 그때 자신의 근원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겠지.
“아자젤의 근원이 공포였을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응, 나도 몰랐어.”
“아자젤은 그럼 언제 안 거예요?”
지수는 꽤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 도도한 악마가 언제 그녀의 근원을 알았을지 궁금했다.
“줄곧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 그러니 너에게 악마의 힘에 대해 가르쳤던 거고.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아자젤은 언제 인정했던 건가요?”
지수의 질문에 아자젤은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역시 이 녀석이라면 이런 짓궂은 질문을 할 거라 예상했다.
“이젠 전부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아자토스가 나타났을 때군요.”
“맞아. 그때, 나는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처음으로 느꼈지.”
그 공포는 너무나 컸다.
외신의 왕을 향해 대항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아자젤은 제 근원에 뭐라뭐라 할 입장이 아니었네요.”
“……부끄러우니까 그만해.”
얼굴을 붉히며 찻잔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백색의 악마를 보며 지수는 옅게 웃었다.
그러고 보면 아자젤은 지수와 비슷했다.
감정이 결여되었으며 결여된 걸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만 아자젤은 감정을 몰랐을 뿐이고, 지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고 할까.
‘그래도 이제 전부 해결됐으니까.’
아자젤도, 자신도.
그러니 이제 분명, 평범하게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영원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