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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백색의 긍지(1) (330/332)


330. 백색의 긍지(1)
2022.06.28.


한지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마왕의 일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며,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간다.

지수의 입장에선 언제나 꿈꾸던 일이었던 일이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침 시간은 좀 심심하네요.”

마왕의 일이 대충 정리된 건 끝났고, 사사로운 일은 루시퍼에게 넘겨둔 상태였다.

그동안 워낙 일을 몰아서 해버린 탓에 한가해진 지수는 조금 심심했다.

세한이 일을 하겠다고 아카데미의 교사로 취직해 버린 덕에 특히 상당한 시간을 혼자서 보내야만 했다.

“이드라도 이제 그만 일해도 될 텐데.”

시스템이 사라졌지만, 신과 인간이 공존하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일들이 남아 있었다.

불안해진 차원간의 균형으로 몬스터도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던전과 같은 것들도 여전히 존재했다.

솔직히 세한과 이드라의 힘이라면 그것을 모두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강철의 시대로 돌리는 일도 가능했다.

하지만 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 절대자의 힘에 의해 세계의 운명이 좌우되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둘은 자연스럽게 세계의 흐름을 현재에 엮어냈고, 그저 작은 도움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이드라의 이름을 부를 정도면 정말 심심한 모양이네.”

그런 지수와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던 아자젤은 살짝 놀랐다는 듯 말했다.

본래 이드라와 지수의 사이가 어땠는지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다.

“어쨌든 이드라도 이젠 가족이니까요. 저는 가족에게는 다정해요.”

“그래, 넌 그런 아이였지. 뭐어, 나는 아무래도 좋지만.”

따뜻한 차를 우아하게 마시는 아자젤의 자태를 보며 지수는 무심코 물었다.

“근데 아직 임신하진 않은 거예요?”

“푸흡!!”

빠꾸라고는 존재하지 않은 지수의 질문에 아자젤은 무심코 마시던 차를 뿜어냈다.

“……너, 너는 무엇을 말할 때 돌려 말하는 법이 없니?”

“제가 이상한 걸 물은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지수가 이상한 질문을 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여자들만 있는 장소였으니 특별히 민망할 구석도 없다.

하지만 묘하게 부끄러워하며 아자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자젤 님은 아직이에요. 아마 마왕님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민수아!”

“그렇게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옅은 민수아의 미소에 아자젤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정말, 너는 하루가 다르게 능글맞아지는구나. 이대로라면 정말 그 미래처럼 되고 말 거야.”

“세한 님이 보고 온 미래의 저라면 이미 날짜까지 말했을지도 몰라요.”

“점점 귀여운 맛이 사라져가네.”

그렇게 말했지만 내심 아자젤은 아이가 태어나는 날이 언제인지 내심 궁금했다.

하지만 그걸 알게 되면 미래에 변화가 일어날까 봐 차마 묻지 못할 뿐이었다.

“그보다 아자젤. 심심해요.”

물론 지수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미 아이에 대한 주제는 관심이 없어진 모양이다.

“요즘 너는 내 앞에선 아이가 되는 거 같네.”

“가끔은 저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특히 지난 번 결혼식 이후, 더욱 그런 게 심해진 것 같다고 지수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아자젤에게 부모의 역할을 맡겼을 때.

그때는 그냥 아자젤은 지수에게 있어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으니 그런 것도 괜찮다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때 부여한 의미가 더 커진 것 같았다.

요즘 지수는 아자젤의 곁에 있을 때, 오래전 어머니의 옆에 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아직 어머니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무렵.

그때의 따스한 마음을 지금 아자젤에게 받고 있었다.

“나중에 아자젤이 아이를 낳으면 질투할지도 모르겠네요.”

“무서운 말하지 마렴. 네가 질투한다는 말을 하면 정말로 무서워.”

“네? 저는 언제나 착한아이라 무서워할 필요 없는데요.”

“그 특성,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깰 수 있잖아?”

“그건 그렇긴 해요.”

이미 특성이라는 건 그녀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악마가 되었고, 이젠 마왕이 된 그녀가 특성에 구애받는 것도 우습다.

뭣보다 루시퍼와의 싸움에서 착한아이와 얽힌 트라우마는 모두 극복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아자젤은 왜 악마가 된 거예요?”

“참 갑자기도 묻네. 그건 왜?”

“그냥 제가 악마가 되었을 때가 떠올라서 생각났어요. 제가 알기로 아자젤은 신과 악마의 혼혈이었잖아요.”

“정확히는 천사와 악마의 혼혈이지만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나태의 악마가 된 거죠?”

천사와 악마.

상극인 둘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건 지극히 드물다.

단순히 천사와 악마가 적대관계라서가 아니라 임신하는 것 자체가 극도로 확률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런 낮은 확률로 탄생한 아이가, 7대 악마의 자리에 오른 건 마계 역사상 아자젤이 유일하다.

“저도 궁금했는데 말해주시면 안 되나요?”

민수아도 내심 궁금했는지 옆에서 거들었다.

아자젤은 워낙 자신의 과거를 숨기는지라 이런 때가 아니면 듣기 힘들었다.

“……뭐어, 말 못할 것도 없지. 말하지 않으면 우리 마왕님이 계속 귀찮게 할 테고.”

결국 아자젤은 그렇게 운을 띄우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을 회상했다.

굳이 기억할 필요 없었던 자신의 옛 이야기를.

‘그러고 보니 내 과거를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네.’

여태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자신의 과거였다.

딱히 말할 일도 없었고, 들어줄 상대도 없었으니까.

‘한 번쯤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자신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두 아이들을 향해 아자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

자신이 아직 마계의 슬럼가에 있을 시절이었다.

***

아자젤이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했을 때, 이미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기였던 아자젤을 기른 건, 천사인 어머니뿐이었다.

한쪽 날개가 반으로 찢겨진 상처투성이 천사.

“아자젤, 너는 절대로 나처럼 돼서는 안 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아자젤과 그녀의 어머니는 마계의 외각.

슬럼가의 구석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만 했다.

‘왜 엄마는 천사인데 마계에 있는 걸까?’

영특했던 아자젤은 아직 아기였을 때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다른 마족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좀 더 큰 이후엔 어머니가 천사라는 걸 알았으며, 그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천사의 힘은 날개에서 나온다고 들었는데. 엄마는 왜 날개가 한쪽만 있지?’

한쪽 날개만을 지닌 자신의 어머니는 천사로서도 이질적이었다.

천사가 마계에 있다는 건, 분명 어떤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 또한 평범한 천사나 마족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슬럼가에서 신격을 흘리고 다니던 것이 네년이었구나!!”

당연히 위험도 있었다.

슬럼가의 마족들은 대체로 수준이 높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마족.

아무리 어머니가 신격을 숨기려고 해도 찾아오는 자들이 있었다.

“내가 아무리 영락하였으나, 천한 것들에게 질 정도는 아니다.”

그런 마족들은 남김 없이 어머니의 손에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처음엔 재미로, 나중엔 호기심에. 점차 덤비는 마족들의 숫자는 늘어났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마족들을 모조리 격퇴했다.

신성하게 빛나는 두 자루의 검.

백색으로 물든 검이 빛날 때면 마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이, 이 천사년 격이 낮은 천사가 아니잖아?!”

“왜 저런 게 여기 있는 거야, 젠장!!”

욕설을 내뱉으며 도망친 마족들이 늘어나고, 불어났던 도전자들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어머니가 얼마나 강한 천사인지 알게 되자, 도전하려는 마족들은 사라졌다.

오히려 어머니가 나타나면 숨을 죽이고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마계는 강자지존의 세계란다. 힘만이 모든 걸 증명하지. 이전에는 그걸 야만적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슬럼가에서 자유를 얻은 어머니는, 본격적으로 아자젤을 가르쳤다.

검술을 가르쳤고,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아자젤에게 물려줬다.

“아자젤, 너는 악마다. 하지만 천사이기도 하단다. 그러니 이 백색의 긍지를 있지 말렴.”

백색은 천사의 상징과도 같은 색이다.

아름답고 고결한 순백.

천사는 백색에 가까울수록 강하며, 신격을 나타내는 금안을 타고난다.

아자젤의 외형은 그 어떤 천사보다 희었으며, 별과도 같이 반짝이는 금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천사가 지녀야 할 날개를 아자젤은 지니지 못했다.

천사의 머리 위에 존재해야 할 성관(聖冠)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두 자루의 검이 너의 날개다. 이 하얀 드레스가 너의 헤일로(halo)야. 너는 누구보다 강한 악마이며, 무엇보다 아름다운 천사가 될 수 있어.”

마치 최면을 걸듯, 늘 어머니는 아자젤에게 그렇게 말했다.

너는 천사이며 악마라고.

무엇보다 위대해질 수 있는 재능을 지녔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고.

“마치 인간처럼.”

“인간이요? 그들은 너무나 약하지 않나요?”

어째선지 어머니는 인간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셨다.

하지만 아자젤은 그런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나약하며, 악마들에겐 먹이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으니까.

“아니란다, 아자젤. 인간은 강해. 천사보다도 선해질 수 있으며, 악마보다 악해질 수 있지. 그러니 너라면 할 수 있단다.”

아자젤은 알고 있었다.

늘 다정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눈은, 광기에 물들어 있다는 걸.

“누구보다 강해지고 위대해질 수 있어.”

또한 아주 오래전부터 미쳐 있었다는 사실을.

아자젤, 자신은 어머니에게 있어 사랑스런 딸이 아니었다.

“언젠가 너의 하얀 드레스를 누구도 더럽힐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신은 복수를 위한 가장 날카로운 검이었다.

무엇보다 날카로운, 복수의 칼날.

“너의 아버지를 찾아서 죽여라.”

그것을 완성시키는 게 어머니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 증오스런 악마를 너라면 죽일 수 있다, 아자젤. 천사의 긍지를 가지고, 악마의 집념을 가지고, 반드시 그자를 죽여.”

“네, 엄마.”

“너라면 할 수 있다. 분명 너라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은 우습게도 따뜻했다.

“사랑한다, 아자젤. 네가 나의 전부야.”

거짓말,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이란 건 뭘까.’

언제나 어머니가 자신을 안아주며 이야기하는 사랑.

그것이 무엇인지 아자젤을 궁금했다.

부모의 사랑.

남녀간의 사랑.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알 뿐이다.

아자젤의 가슴에는 어떤 것도 와닿지 않았다.

“네, 저에게 맡겨주세요, 사랑하는 엄마.”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의도야 어쨌든 자신을 기르고, 보호해 준 건 사실이었다.

‘어차피 그런 목적이라도 없으면 지루하니까.’

태어났을 때부터 아자젤은 세상을 오시(傲視)했다.

무엇이든 간단히 할 수 있었으며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과연 못하는 게 있을지 궁금할 정도다.

그러니 지루했다.

남들이 무언가를 익힐 때 느끼는 달성감도 느낄 수 없었다.

특별히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없고, 막연하게 쾌락을 쫓았다.

그런 아자젤에게 어머니가 부여한 ‘목표’는 꽤 달콤한 것이었다.

우습지만, 어머니의 광기는 아자젤에게 너무나 달았다.

“아자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나의 사랑하는 딸이라는 걸 기억하렴.”

어머니는 매일 밤 자신을 안아주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무척 갑작스러웠다.

언제와 같이 눈을 뜨고, 어머니와 검술을 수련하기 위해 나온 아침.

어째선지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

평소라면 먼저 공터에 나와, 검을 닦고 있을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자젤의 눈에 들어온 건, 공터의 중앙에 꽂혀 있는 두 자루의 검뿐이었다.

“…….”

처음 보는 아름다운 검.

새하얀 순백의 쌍검.

어머니의 검은 아니었고, 자신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자젤은 그것을 망설임 없이 뽑아 들었다.

어째선지 따스한 온기가 자신의 손을 타고 흘렀다.

그 온기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아자젤은 그것을 태연히 품에 갈무리했다.

검을 하나로 합치자, 새하얀 양산이 된 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새하얀 드레스에 어울리는 고풍스런 양산이었다.

“떠나야겠네.”

이제 어머니는 볼 수 없을 테지.

그러니, 이제 어머니가 자신에게 맡겼던 목표를 이루러 가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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