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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가족(1) (322/332)


322. 가족(1)
2022.06.28.


“마왕님, 이대로 내버려 두셔도 괜찮습니까?”

“…….”

세한의 방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지수의 곁에 루시퍼가 나타났다.

지수는 새삼 이 악마가 정말 눈치가 없다는 걸 상기했다.

“내버려 둬야죠. 그럼 제가 뭔가를 할 것이 있나요?”

“아니요. 마왕님이라면 당연히 바로 결혼식을 올리시리라 생각했는데, 굳이 틈을 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눈치가 없기는 하지만, 루시퍼는 마계 전역을 관리하고 지켜보던 전지(全知)에 가까운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세한과 이드라에게 일어나고 있는 묘한 기류도 눈치 챘을 것이다.

“틈을 준 게 아니에요.”

“그럼?”

“할 일을 할 뿐이죠.”

“그건 동정입니까?”

위대한 외신을 동정하여 이런 선택을 한 것이냐는 말에, 지수는 눈을 흘겼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을 것 같았으니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지수는 그런 루시퍼에게 차분히 말을 이었다.

“먼저 만난 게 내가 아니라 이드라였다면, 분명 오빠는 이드라를 선택했을 거예요.”

“그건 세한 님이 이드라를 더 좋아한다는 뜻이군요.”

“죽고 싶나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하던 루시퍼는 살벌한 지수의 말에 입을 닫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대답이 틀렸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단순히 순서의 차이라는 거죠. 저는 단지 오빠를 먼저 만났을 뿐이고, 게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신이나 인간이란 건 사실 큰 의미가 없어요. 오빠가 가장 먼저 믿었던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갈렸을 뿐.”

어차피 의미 없는 가정이다.

이드라는 자신보다 먼저 세한을 만날 수 없다.

그녀가 세한을 인식했던 건 게임이 시작된 후이니까.

“왜 제가 틈을 주었냐고 했나요?”

“예.”

“그건 제가 빚이 있기 때문이에요.”

무시할 수도 있었다.

솔직히 여태 무시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식을 앞두고 생각이 많아지니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오빠도 알고 있던 것 같고.”

그 반응을 보면 확실하겠지.

다만 자신을 위해 굳이 입에 담지 않았을 뿐이다.

“……하아, 다른 세계의 저희도 잘 살고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그건 참, 마왕님답지 않은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흔들리고 동요하며 당황하는 이런 감정은 지수에게 낯선 것이다.

악마가 되니 더욱 감정적이 된 자신이 우스웠다.

‘뭐어, 그 여자라면 이걸 빚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만.’

사실 정말 짜증나는 건 그거였다.

아마 이드라는 지수가 자신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건 작은 생색내기에 가까웠다.

“그나저나…….”

지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도 가봐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높이 솟아 있는 건물.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그곳에선 지금 이질적인 파동이 발생하고 있었다.

***

그곳은 끝없는 어둠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공간이기도 했다.

내가 혼돈의 틈새에 끼었을 때도 그랬고, 아자토스가 머물던 혼돈의 옥좌도 비슷했다.

다만 그것과 다른 점은 이곳에는 이드라가 머물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마치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드라…… 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어두운 공간이 요동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딱 봐도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다.

‘나를 내쫓아버리겠다 이건가?’

태아처럼 웅크린 이드라를 중심으로 어둠이 움직였다.

거대한 무언가가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그녀의 몸을 감싸고 그 크기를 한없이 부풀려가기 시작했다.

“……이드라네.”

잠든 이드라를 핵으로 삼아 형태를 취한 거대한 촉수의 집약체.

그 크기는 족히 거대한 산보다 컸지만, ‘진짜’를 생각하면 이건 무척 작게 의태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저 어둠이 취한 형태는 ‘아우터갓’ 이드라의 본체였으니까.

내가 그걸 알 수 있었던 건, 니알라토텝과의 싸움에서 1회차 이드라의 본체를 잠시나마 보았기 때문이다.

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이드라의 본체도 지금 눈앞의 것보다 거대했다.

‘하지만 크기가 작다고 힘까지 약한 건 아니니.’

식은땀을 흘려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드라의 힘은 나의 힘이며, 반대로 나의 힘도 이드라의 것.

즉, 아자토스의 편린도 거의 동일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나에게 우선권이 있을 뿐이지.

‘그나마 의식이 없다는 게 행운이군.’

그러니 질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만만하지도 않았다.

외신 꿈의 마녀 이드라.

전성기의 그녀보다 강한 본체가 지금 나를 향해 매우 화를 내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너와는 싸운 적이 없었나.”

나와 이드라는 싸운 적이 없다.

내가 일방적으로 싫어했을 때도 이드라는 내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지수 때문에 삐진 적은 있었지만, 이드라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화를 내진 않았다.

단 한 번도.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니야. 오히려 좋은 거지.”

분명 그런 인간관계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와 이드라는 좀 달랐다. 이드라는 언제나 참는 쪽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애써 외면했다.

여러 가지 변명을 하며.

‘지수와는 한번 싸웠었고.’

지수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참고 인내하며 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덕분에 그녀의 마음엔 앙금이 쌓였고, 끝내 한계를 넘은 순간 폭발했다.

그리고 나와 지수는 그 과정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교류하고 벽을 하나 넘었다.

아마 내가 지수를 이성으로 자각한 시점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전까진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자, 하나뿐인 친구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드라는 내게 있어 뭐라 정의할 수 있을까.’

나의 신.

나의 아바타.

전생에는 결코 믿지 못했으나, 지금은 가장 신뢰하고 있는 대상 중 하나.

가족이 없는 내게 가장 가족과 같은 존재이며.

누나라고도 할 수 있고, 여동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관계다.

“어쨌든…….”

나는 거대한 이드라의 본체를 보며 옅게 웃었다.

“나는 너를 이런 곳에 놔둘 생각은 없어.”

반드시 녀석을 데려간다.

뺨을 얻어맞고 까이더라도 간단히 놔줄 생각은 없었다.

“이번엔 이름을 불러도, 그리 간단히 대답해줄 것 같지는 않네.”

콰콰콰콰!!

거대한 촉수가 움직이며 거대한 공간이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나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사방팔방에서 나를 노렸다.

‘잡히면 분명 지금 이드라와 같은 꼴이 될 거야.’

저 촉수는 단순한 물리력만 가진 게 아니다.

이드라가 가진 힘은 꿈과 환상.

저 촉수에 닿게 되면 나는 지금 이드라가 그런 것처럼 꿈에 빠지게 될 거다.

그리고 영원히 이드라의 곁에서 함께 꿈을 꾸는 처지가 될 테지.

‘이런 거 보면 지수나 이드라나 비슷한 면이 있다니까.’

나는 혀를 내두르며 촉수를 피했다.

환상을 실체화시켜 거대한 검으로 촉수를 잘라내며 기회를 기다렸다.

[~~~~!!]

내가 저항하자 촉수가 마치 화가 난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그래, 화가 나겠지.’

그건 단순히 내가 촉수에 저항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저 거대한 이드라의 본체 자체가 여태 이드라가 마음에 쌓아둔 분노이자 질투의 집약체다.

언젠가 이드라는 내게 말했다.

자신은 생각보다 질투심이 심한 것 같다고.

나를 독점하고 싶다고 말이다.

이드라는 감정을 배웠고, 늘 내게는 자애로운 여신이었으나 인간이었다.

언제나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던 지수와 달리 이드라는 언제나 그걸 꾹꾹 눌러 참았다.

‘녀석은 아마 자신이 참고 있는 건지도 몰랐을 거야.’

감정을 모르는 외신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그것을 억눌렀을 때 어떻게 되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니알라토텝이 그러했듯, 이드라도 계속 아팠다.

아프지만 이유를 몰랐다.

‘너는 순수하니까.’

이드라가 처음 내게 진심으로 웃었던 건 이름을 불렸을 때였다.

현실도 아닌 몽상의 신전에서 내게 이름을 불리고 정말 꽃과 같이 활짝 웃었다.

그런 사소한 것에 행복해할 정도로 순수하고, 나약하다.

하지만 그런 나약한 마음으로도 나를 위해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 요그소토스를 쓰러트렸다.

과거로 회귀했고, 도달할 수 없었던 길을 제시했다.

“이드라.”

촉수를 베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의 물결을 헤치고, 촉수의 파도를 넘어.

“이드라.”

잠들어 있는 이드라의 귀가 움찔했다.

하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어쩌면 무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의식을 가라앉히고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지수에게 했던 것처럼 해야 하나?’

의식을 공유시켜 서로의 기억을 공유했던 방법.

외부의 자극이라면 힘들어도 내부에서 흔든다면 다를지도 모른다.

‘아니.’

하지만 이드라와 나의 정신은 연결되어 있었다.

설령 신체접촉을 한다고 해도 지수처럼 정신세계에 간섭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 외부적인 요인으로 깨워야 한다는 건데…….

“제게 방법이 있어요.”

“……!”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검은 왕관을 현현시킨 지수가 둥둥 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어쩐지 이런 느낌이 들어서요.”

그렇게 말한 지수는 검은 촉수에 둘러싸인 이드라를 올려보았다.

“저 여자는 은근히 저랑 비슷한 부분도 있으니까요.”

독점욕이나 질투심은 비슷하긴 하지.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

“그런데 방법이라니?”

“확실하진 않아요. 하지만 분명 해결될 거라 생각해요.”

이렇게까지 지수가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면 분명 뭔가 수가 있는지도 모른다.

“좋아, 그럼 어떻게 하면 돼?”

“제가 저곳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지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은 이드라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핵이었다.

‘왕관의 힘을 이용하려는 건가?’

왕관에 깃든 열쇠의 힘을 사용한다면, 이드라에게 자극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게 얼마나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겠지만 해보지 않는 것보단 낫겠지.

“좋아.”

나와 지수는 눈빛을 교환하고 이드라가 웅크린 핵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자 잠시 멈춰있던 촉수들도 재차 우리를 향해 마구잡이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만 방금 전과 달리 촉수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사로잡으려고 하는 반면, 지수를 향해 덤벼드는 촉수들은 지극히 살벌했다.

“저는 때려죽이려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 하지만 평소처럼 맞으면서 싸우면 안 돼.”

“네, 알고 있어요.”

단순히 육체적으로 타격을 받는 것 만이라면 지수가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드라의 촉수는 그것에 닿는 것만으로 환상이나, 꿈속에 정신을 가둬버릴 확률이 높았다.

콰콰콰콰!!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촉수들을 베어내며 날아갔다.

지수에게 닿으려는 촉수들을 베어내고, 허수공간을 열어 방어하며 그 거대한 육신의 끝에 도달했다.

“이드라!!”

이드라의 이름을 부르며 핵에 접근하자, 수백 개의 촉수가 우리를 향해 감싸듯 날아들었다.

하지만 우리 쪽이 좀 더 빠르다.

나는 지수의 왼팔을 잡고 그대로 앞으로 던졌다.

이제 지수가 열쇠의 힘을 사용하면…….

“응?”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수의 머리 위에 있는 왕관은 딱히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저, 지수의 오른팔이 뒤로 당겨지며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이드라를 향해 휘둘러질 뿐이다.

참고로, 지수의 손가락에는 약혼반지가 끼어 있다.

그 반지가 무엇이냐, 이미르의 머리를 쪼갰던 반지다.

불멸자를 죽이는 힘이 담긴 반지.

“자, 잠깐만!!”

황급히 소리쳤지만 그보다 지수의 주먹이 빨랐다.

콰차앙!!

이드라의 몸을 감싼 핵을 부수며 거대한 충격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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