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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엔딩, 그 후에(3) (318/332)


318. 엔딩, 그 후에(3)
2022.06.28.


“아빠!!”

붉은빛이 감도는 흑발의 소녀가 큰 소리로 한번 더 소리쳤다.

‘저 아이가 수진인가?’

나이는 수연이와 비슷해 보였지만, 어른스러운 수연이의 인상에 비해 훨씬 아이 같았다.

“와! 정말 다른 세계의 아빠구나!! 자운 아저씨가 말해줬는데.”

“자운 아저씨?”

“응, 나 방금 전까지 자운 아저씨랑 놀고 있었거든!”

참 기운찬 아이구나 싶어 바라보자, 수진이가 양팔을 벌렸다.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바라보자, 수진이가 다시 외쳤다.

“안아줘! 정말 아빠 아니랄까 봐 눈치가 없네!”

“그, 그래.”

양손으로 안아 올려주자 그 작은 팔로 내 목을 꽉 껴안으며 헤헤 웃었다.

정말로 순진한 아이와도 같은 모습이다.

“훗.”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

수진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기분이었지만, 바라보자 그저 순진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다.

잠깐 순진한 눈망울 속에 묘한 기색이 스쳐지나간 느낌이겠지만 착각이겠지?

“처음에는 그냥 순진한 아이인가 싶었는데…… 그래. 과연 지수의 딸인게로구나.”

“네, 수진이가 좀 영악한 게 있죠. 확실히 지수 엄마를 닮았어요.”

이드라가 수연이 뭐라 대화하는 말이 들렸지만, 나는 수진이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대는 통에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우리를 잠자코 지켜보던 민수아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아직 아이가 없으시죠?”

“풉!!”

차를 마시던 나는 무심코 뿜어버렸다.

수진이는 그 기색을 어찌 알았는지 작은 손으로 내 머리를 이드라 쪽으로 돌려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게 물을 뱉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

“미, 미안하다.”

이드라는 탁자에 놓인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었다.

“그만 놀리거라, 보다시피 나와 계약자는 아직 그런 관계가 아니다.”

“어머나, 이드라 님. 아직이라는 말은 언젠가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네요?”

“뭣?”

예상치 못한 발언에 이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무얼 말하던 민수아에게 놀림 받으리라 판단한 거겠지.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어서 빨리 마왕인 나를 만나 돌아가야겠군.’

나는 이 묘한 분위기를 계속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마왕은 지금 어디에 있지?”

“마왕님이라면 지금 여행에 가셨어요, 오랜만에 연인과의 여행이라 두 따님도 아자젤 님께 맡겨두신 거죠.”

“뭐, 그건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아자젤과 나는 서로 아이를 돌봐줄 정도로 친해진 건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수연이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쇠의 기운을 떠올렸다.

“근데 왜 수연이의 몸에 마계의 열쇠가 있는 거지?”

“그건 수연 님이 차기 마왕이기 때문이랍니다. 말하자면 후계 수업과 같은 거죠.”

“과연.”

하기야 이미 나는 마계의 열쇠가 없더라도 충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내가 린에게 그랬던 것처럼 미리 어린 수연이의 몸에 열쇠를 넣어 마계의 열쇠를 다루는 권능에 익숙해지게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바로 마왕을 만나러 가도록 하지.”

“아빠 벌써 가는 거야?”

수진이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나를 꽉 안았다.

그런 수진의 행동에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여기에 있다가는 영영 떠나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쉽다, 아빠가 둘이라 좋았는데.”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는 수진이의 말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내 착각이겠지.

……아마도.

***

광기의 마왕.

긴 시간 동안 그렇게 불렸고, 그 호칭이 잊힌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퍼블리셔와 결판을 내고, 이 세계를 뒤늦은 해피엔딩에 도달한 지 10년.

원하던 바를 모두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흠…….”

나는 두 아내가 해변을 걷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해변에 다른 사람들로 북적였겠지만, 오늘만큼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런 게 대체 얼마만인지.’

최근 10년 동안 평화로웠다지만 평온했던 것만은 아니다. 수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때마다 우리는 누구보다 앞에 나서서 그 일을 해결해야만 했다.

거기에 두 딸은 기운이 넘쳐서 자신이 나타나면 지칠 때까지 덤벼들곤 했다.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역시 가끔은 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아자젤이라면 잘 돌봐줄 테니.”

나태의 악마 아자젤.

마계의 정점 중 하나라 불리는 그녀를 마치 보모처럼 부리는 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딸 아이를 감당하려면 아자젤 정도가 아니어서야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안 보이니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 음?’

문득 익숙한 기운이 내 감각권 내에 들어왔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기척.

나는 단번에 그 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뭐어, 언젠가는 오리라 생각했다만.”

천천히, 나는 등을 돌려 해변에 나타난 두 명의 인영을 응시했다.

“가장 위대한 왕을 죽인 자여.”

“……괜히 거창하게 부르지 마라. 오글거리니까.”

녀석은 심히 피곤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그 표정을 보니, 대략 이곳에 와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 두 딸아이를 만난 모양이군.”

“그래, 마계의 열쇠를 설마 딸에게 줬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이젠 굳이 열쇠를 몸에 지니지 않아도 마왕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어서 말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녀석은 영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또 다른 ‘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히 보였다.

어쨌든 나 역시 여러모로 ‘나’에게 할 말이 많았다.

저기에 서 있는 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심히 위험한 상황까지 내몰릴 수 있었으니까.

“우선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우리 세계에 외신이 나타나지 않은 건 네가 한 일 때문이겠지?”

퍼블리셔는 분명 외신의 세력을 이 세계로 끌고 오려 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실패하고, 우리의 힘에 압도적으로 짓밟혔다.

만약 외신들이 왔다면 이렇게 쉽게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 그래.”

녀석은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답했다.

“아자토스를 죽였고, 그 편린을 내가 흡수했어.”

“……과연, 그러리라 예상하기는 했다만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자신이 DLC를 통해 안배한 건 시스템을 죽이는 부분까지다.

외신의 왕은 오롯이 그의 힘으로 죽였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

설명하기 싫어 둘러대는 말이 아니었다.

나이기에 안다.

아마 정말로 운이 좋았기 때문일 터다.

간담이 서늘한 말이었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었다.

결국 전부 해냈으니 해피엔딩이 된 것 아닌가?

“외신의 왕의 힘이니 온전히 흡수할 수 없었겠군. 이곳에 온 건 우리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고 생각해도 되겠나?”

“맞아. 이 세계가 우리 세계와 가장 가까우니, 도약한다면 여기가 가장 적절했거든.”

“하긴 아자토스를 죽인 세계이니, 아무리 왕의 편린을 흡수한 너라도 간섭할 수 없었을 테니까.”

일반적인 세계라면 아자토스의 편린을 흡수한 세한이 이드라의 도움을 통해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세한의 세계는 무려 아자토스를 죽인 세계다.

이 수많은 다중우주의 서열을 결정짓는 건 그 우주에서 달성된 위업에 따라 갈리는 법.

모든 다중 우주에 영향을 미치는 위업을 달성한 세계이니, 아무리 아자토스의 힘을 지닌 세한이라도 간단히 돌아갈 수 없었다.

“이곳에 온 건 옳은 선택이었다. 이 세계의 나, 그리고 이드라와 지수의 도움이 있다면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녀석을 보았다.

‘나’는 머리를 느릿하게 끄덕였지만, 묘하게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습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어쨌든 ‘나’였으니까.

“김세한.”

그렇기에 ‘나’를 불렀다.

“너는 한지수를 선택한 모양이군.”

“그건 또 어떻게 안 거냐?”

“네 옆에 있는 이드라의 얼굴을 보면 그 정도는 간단하지.”

세한의 곁에 있는 이드라는 갑작스런 내 발언에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뭐가 특별할 게 있냐는 얼굴이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드라는 정말 행복하면 표정에 나타난다. 너도 알고 있을 테지. 신이란 순수하니 말이다.”

“…….”

녀석은 반박하려던 입을 천천히 닫았다.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바로 이해했을 테니까.

“우리 딸들은 어떻던가? 귀엽지 않던가?”

“그건, 뭐. 그래. 귀여웠지.”

나와 결혼한 이드라와 지수의 딸.

그것을 본 ‘나’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뻔했다.

“확실히 네가 보기에 나는 이상해 보일 수 있다. 지수와 이드라를 동시에 아내로 받아들인다니. 너로선 이해하기 힘든 일일 테지. 물론 이해한다. 납득하지는 못한다만.”

“납득하지 못한다고?”

“그래.”

‘나’의 고민은 이쪽도 했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 동안.

해답을 내놓는 것도 긴 시간이 걸렸다.

광기의 감옥에 갇혀 있던 탓에 더더욱 오래 걸리고 말았지.

하지만 ‘나’까지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김세한. 적어도 너는 그래선 안 된다.”

“……뭐?”

“‘나’는. ‘우리’는 그래서는 안 돼. 절대로 말이야.”

어떤 세계의 김세한이라도 같다.

이건 나이기에 한 선택이 아니다.

“네가 지수를 선택하는 건 당연하다. 지수는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해가며 나를 도왔지.”

1회차.

이 세계가 게임이 된 직후, 지수는 내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지만, 고블린의 검에 찔린 지수는 죽지 않았고 줄곧 내 주변을 맴돌며 나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2회차 역시 비슷했다.

지수는 언제나 나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했다.

그건 그녀가 자라온 가정환경 때문이었지만, 그건 하나의 이유일 뿐.

언제나 지수는 나를 위해 희생했다.

분명 그건 어떤 세계의 지수라도 같을 테지.

해피엔딩에 도달한 ‘나’의 세계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내가 겪지 못했던 더 큰 희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녀석이 지수를 택한 건 옳다.

“하지만 김세한.”

‘나’는 내 이름을 조용히 읊조렸다.

“그렇다면 이드라는 어떻게 할 테냐.”

“…….”

“수십, 수억 년을 버텨 2회차의 너를 만나러 온 이드라를. 언제나 자신을 희생하며 너를 위한 건 지수만이 아니다. 너는 그런 이드라를 그냥 곁에 둘 생각인 것이냐? 영원히 방치하고 곁에 있는 인형으로 만들 생각인 건가?”

처음, 이드라는 나에게 적이었다.

아니, 일방적으로 내가 녀석을 적이라 단정지었다.

적어도 나는 엔딩을 본 이후, 뒤늦게 이드라가 돌아와 회귀를 시켜주었지만 녀석은 아니었을 것이다.

DLC를 통해 회귀한 세한은 이드라가 자신을 왜 떠났는지도 모른 채 회귀했다.

그러니 그저 이드라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망가진 엔딩을 수습하고,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걸었던 것도 모른 채.

그럼에도 이드라는 무지한 ‘나’를 쫓았다.

작은 고마움만으로도 기뻐했으며, 스스로의 모든 걸 걸고 자신을 희생했다.

스스로 존재의 소멸 따윈, 이드라에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 모든 어리광을 받아주고 언제나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녀는 나의 신이었고, 나의 아바타였다.

“너는 이드라가 곁에 없다는 걸 상상할 수 있겠나?”

과거에는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이기에 안다.

지금의 녀석은 결코 그럴 수 없다.

“아니면 지수가 너를 떠나는 걸 상상할 수 있겠나?”

눈앞의 ‘나’는 이드라가 아닌 지수를 마왕의 시험으로 잊었었다.

그때는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지났다면 분명 나와 같이 미쳐버렸을 것이다.

지수를 기억하지 못한 미래.

민수아에게 들은 대로라면 지수를 기억하지 못한 녀석이 도달하게 될 미래는 「흩어진 세계」.

지수를 잊고 퍼블리셔에게 패배한 엔딩은 트루엔딩조차 아닌 ‘배드엔딩’이었으니까.

“잘 생각해라, 김세한. 애초에 너에게 선택권은 없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며 말했다.

“너는 둘에게 많은 빚을 졌다. 해피엔딩은 결코 너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엔딩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알아.”

“너는 그 둘에게 평생에 걸쳐 빚을 갚아야 한다. 지수가, 그리고 이드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말한 ‘나’는 천천히 손을 떼며 웃었다.

“물론 지수를 설득하려면 꽤나 힘들 거다.”

몇 번쯤은 죽을 수도 있지.

녀석은 그렇게 뒷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물론, 나는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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