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3. 이루어진 꿈(1) (313/332)


313. 이루어진 꿈(1)
2022.06.28.


어둠, 새까만 세상만이 눈에 비친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장소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줄곧 나는 이 속에 있었으며, 물속의 공기 방울처럼 흐름을 따라 유영할 뿐이었다.

그래, 나는 깊은 바다에 빠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건 나를 비롯한 수많은 공기 방울, 거품뿐이었다.

손가락만 살짝 가져다 대면 사라질 저 작은 공기 방울들이 하나의 세계라는 걸 인지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정확히는 기억났다고 하는 게 좋다.

마지막, 정말 모든 게 끝나기 직전, 나는 ‘신’을 쓰러트렸다.

신성을 가진 존재를 살해하면, 신성이 간직했던 권위와 존재는 살해한 자에게 넘어간다.

내가 까마귀를 죽이고 별자리를 얻었듯.

니알라토텝을 쓰러트리고 최상급 신격의 힘을 손에 넣었던 것처럼.

‘불가능해.’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무심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유일하게 ‘신’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를 죽였으며, 그 존재의 힘은 나에게 깃들었다.

그러나 다룰 수는 없었다.

‘인간’인 내가 다루기엔 너무나 큰 힘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그 힘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난 인간을 벗어나고 말 테니까.

그가 가진 힘, 권능, 권위.

그것들은 지성을 가지고, 인격을 가진 존재가 감내할 수 없는 힘이다.

그러니 나는 그것을 이 물속에 떠돌게 내버려 뒀다.

그 일말의 파편만을 조금씩 나의 것으로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고작 파편.

신의 파편만으로 나는 나의 세계로 돌아가기에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쉬운 게 아니네.’

외신의 힘을 컨트롤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외신의 왕인 아자토스의 힘이 아닌가?

고작 그 편린이라도 내겐 감당하기 벅찼다.

‘누군가 알려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이 텅 빈 공간에서 누가 내게 알려줄 수 있겠는가. 그동안 나는 내가 외신의 힘을 제법 잘 다룬다고 생각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내가 그동안 외신의 힘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던 건, 언제나 곁에 이드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신 후에도 바로 곁에 붙어 있었던 건가.’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지만 고맙다는 말을 전할 수도 없었다. 말을 전하고 싶어도 우선 이 공간을 빠져나가야 할 수 있는 일이니.

‘이렇게 많은 세계가 있는데, 간섭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니.’

나는 어두운 공간에 떠도는 수많은 공기 방울들을 응시했다.

내가 다루는 외신의 힘만으론 다른 세계에 간섭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나마 몸이라도 외신의 육신이라 다행이지…….’

이드라의 몸이었기에 망정이지, 인간의 몸이었다면 역으로 신격에 잡아먹혀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멍하니 어두운 공간을 바라보던 그때.

‘……저건.’

내 눈에 작은 공기 방울이 눈에 띄었다.

‘저게 왜 남아 있지?’

수많은 거품 속에 끼어 있는 작은 공기 방울이 보였다.

저 작은 거품들이 신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세계’라는 걸 생각할 때 유독 작은 공기 방울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저건 내가 한 일로 일어난 작은 분기.

곧 자연스럽게 스러질 세상이었으니까.

‘단순한 환상이 여기까지 살아남다니.’

물론 이 공간에서 시간이란 무의미하니, 저 공기 방울이 사라지기 직전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마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세계는 나에게 있어 큰 미련이 남은 세계이기 때문이겠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일반적인 세계라면 내가 간섭할 수 없지만, ‘환상’으로 점철되어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라면 어떨까?

‘저 정도의 세계라면, 거기다 환상을 다루는 건 제법 익숙하니.’

나는 아직 저 커다란 거품들에 간섭할 만큼 신의 힘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여태 이드라의 힘을 다뤄오며 익숙해진 몽상을 다루는 힘.

그리고 미약하게 흡수한 아자토스의 편린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터.

‘좋아.’

나는 작디작은 공기 방울을 향해 다가갔다.

‘진짜’가 아닌 환상.

그러나 분명히 내가 겪었던 현실.

이 세계라면, 지금의 내가 살릴 수 있다.

뭣보다 이 세계엔 녀석이 있었다.

내게 외신의 힘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줄 존재가.

‘느껴진다.’

나는 작은 공기 방울에서 느껴지는 어떤 존재의 기척을 느꼈다. 따뜻한, 하지만 쓸쓸한 녀석의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

이 세계는 환상이다.

꿈과 환상을 다루는 마녀인 이드라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나의 계약자는 말이야.”

하늘을 올려보면, 오랜만의 맑은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이 세계가 게임이 되고, 절망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사람들은 누구도 하늘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이곳의 기억을 받았을 「나」에겐 조금 질투가 느껴질 정도야.’

몽상의 던전이라고 했던가.

김세한은 그것을 통해 이 세계에 들어와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를 얻었다.

왜 그것이 필요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계약자라면 그것을 사용해 분명 대단한 일을 해낼 것이다.

아니, 이미 해냈을지도 모르지.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정말로 아쉬웠다.

‘양자택일’ 퀘스트 후,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쓰러진 그에게 모여들었다. 수많은 신들이 눈을 감고 쓰러진 그, ‘세한’을 보고 있었다.

이 세계를 되살린 그의 기적은 누구도 알 일 없이 한 줌의 환상이 되어 사라질 테지.

그래, 그랬을 텐데.

“……?”

세계는 끝나지 않았다.

세한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끌려 치료를 받기 위해 사라졌고,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린과 세한의 싸움을 보고 복귀한 신들, 그리고 새로운 신들이 하늘에 모여들어 저마다 자신의 아바타를 찾기 위해 사라졌다.

역주행을 시작한 게임.

전무후무한 세상이 된 이 세계에 모여든 신들은 ‘지구’가 처음이 게임이 되었을 때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신들로 인해 모여든 신성(神聖)으로 지구가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황폐해진 대지가 활력을 되찾았다.

그 기이한 현상에 퍼블리셔는 당황했고, 시스템은 침묵했다.

‘에, 에엥?’

당황한 이드라는 그런 세계를 멍하니 응시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세한의 병실의 앞에 서 있었다.

“이, 이상하구나.”

이미 세계는 끝나도 진작에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몽환은 끝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 세계는 계속되고 있었다.

‘계약자라면 알고 있을까?’

이드라는 병실의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왜 세계가 계속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 세한은 별개다.

‘양자택일’ 퀘스트를 함께했던 세한은 본래 자신의 계약자인 세한이 아닌, 몽환의 던전을 통해 들어온 2회차의 세한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 세한은 분명 몽한의 던전을 클리어한 순간 이 세계에서 떠났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세계의 세한은 나를 미워하고 있는 1회차의 세한일 터다.’

미워한다? 아니, 정확히는 신뢰하지 않는다는 게 옳으려나.

어쨌든 이드라에겐 썩 좋은 느낌은 아니다.

양자택일에서 그에게 신뢰를 받았던 이드라로선 상당히 씁쓸한 상황이었다.

‘열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2회차의 세한을 알기 전이었다면 그냥 뻔뻔하게 나섰을 것이다.

1회차의 세한은 이드라가 무슨 짓을 하든 없는 사람처럼 대했으니까.

‘어쩐지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이런 ‘감정’들을 알아갈 때면 이드라는 점점 더 자신이 인간으로 영락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정말 바라던 일일 텐데도, 좋지만은 않았다.

‘인간의 감정이란 본디 복잡한 법이라고 했으니.’

양자택일 퀘스트의 후유증으로 찾아오긴 했으나, 문을 열지 망설여졌다.

자신이 찾아가 봐야 괜히 컨디션만 망가트리는 게 아닌가 걱정된 것이다.

덜컹.

“!”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은 채, 차마 그것을 잡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문이 열렸다.

“문 앞에서 계속 뭐 하냐?”

당황하는 이드라에게 문을 열고 나온 세한이 피식 웃었다. 평소와 달리 새하얀 환자복을 입은 세한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

근데 뭔가 달랐다.

이드라는 바로 깨달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한의 시선에 늘 보이던 적의가 없음을.

아니, 호감이 담겨 있다는 걸.

‘어어어?’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신으로서 인간의 마음을 알게 되었지만 ‘당황’이라는 감정을 이토록 강렬하게 느낀 건 처음이었다.

“거, 검에 찔린 곳이 잘못되었느냐?”

혹시 상처가 덧나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그런 이드라의 모습에 세한은 낮게 웃었다.

‘눈에…… 다크서클도 좀 사라진 것 같고?’

이 세계가 게임이 된 후, 저렇게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한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또한 자신을 향해 저토록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세한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2회차의 세한도 저 정도로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진 않았다.

“우선 들어와서 이야기하자.”

“자, 잠까…….”

세한은 문고리를 잡기 위해 뻗었던 이드라의 손을 자연스럽게 움켜잡고 당겼다.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세한의 온기에 당황한 이드라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바르작거리며 그를 따라 병실에 들어왔다.

“어, 어디 아픈 것이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거나…….”

세한은 자신을 따라 들어온 이드라를 자신의 병실 침대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리곤 태연히 그 옆에 앉았다.

이 또한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드라가 먼저 장난을 치며 옆에 앉으면 정색을 하며 일어나던 게 그녀가 아는 세한이었다.

“이드라.”

“네, 네?”

“……갑자기 왜 존댓말인데?”

“그게, 아니…….”

이드라는 목구멍까지 평소의 너를 생각하면 이 상황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혹시 내 계약자가 아니라 가짜인가?’

그 변신 능력을 가진 계집애라거나.

하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한을 잘못 볼 리가 없었다.

다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남자는 분명 세한이다.

확실하다, 이건 분명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상한 건 이상한 거다.

정말 죽을 때가 된 건가?

혹시 치료를 위해 사용한 엘릭서에 환각제나 이상한 독이 타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자신을 살리고 죽었다는 그 여자로 보인다거나.’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분명 세한은 자신을 ‘이드라’라고 똑바로 불렀다.

“뭐,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세한은 이드라의 마녀 모자를 침대 옆에 내려놓으며 부드러운 금발을 쓸었다.

그 행동을 이드라는 저지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 왜 그러는 거냐. 계약자여.’

현재 이드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얼음동상이 되어 입을 뻐끔거리는 게 전부였으니까.

세한은 그런 이드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사람이 많이 그립긴 했던 모양이야.’

이드라는 알지 못했지만, 세한은 이드라를 보고 굉장히 감회에 젖어 있었다.

몽환의 던전으로 되살렸던 ‘환상’.

잘못을 바로잡은 1회차의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세한은 아자토스를 쓰러트린 후, 기나긴 시간 동안 혼돈의 틈에서 떠돌았다.

거품으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긴 시간 동안 발버둥 치며 살았다.

그리고 간신히 세상으로 도약해 처음으로 만난 이가 바로 이드라였던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세한 본인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모든 근심과 번뇌, 걱정이 사라진 세한은 여태 미뤄두었던 감정표현에 망설임이 없었다.

‘진짜 이드라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어 있는 이드라의 모습은 퍽 우스웠지만, 동시에 정겹기도 했다.

2회차의 이드라는 이미 완벽히 인간이 되고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숨기지 않고 표현했기에, 만약 자신이 이렇게 행동해도 조금 당황은 해도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1회차의 이드라의 입장에선 자신을 적대하던 상대가 하루아침에 자상해진 격이니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이드라는 괜찮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드라라면.

이미 세한에게 있어 이드라에 대한 신뢰도는 더 이상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높았다.

이것에 비견되는 사람은 지수 말고는 없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세한은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늘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던 자신의 신이 이렇게 당황하다니.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이렇게 약할 줄이야.

‘천천히 말해도 상관없으려나.’

세한은 이 세계를 또 하나의 엔딩에 도달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 세계에는 아자토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차원, 모든 시간대에 아자토스는 단 하나만이 존재하니까.

아자토스가 없다면 자신이 겪었던 수준의 전투는 일어날 일이 없었다.

다른 외신이 이곳에 올 일도 없을 테고, 설령 오더라도 요그소토스 정도가 아니라면 현재 자신이 가볍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요그소토스도 이드라가 쓰러트렸지.’

말하자면 무적 치트키를 사용한 채 게임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미르……는 만만한 녀석이 아니지만 솔직히 지금의 자신이라면 어려운 상대는 아니다.

‘그러니 지금은.’

눈앞에 얼어 있는 자신의 신을 좀 더 놀려주기로 하자.

이전의 세한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이런 것도 좋을 것 같았다.

16599258764081.png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