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312화 (에필로그) (312/332)

# 312

312. 에필로그

“본체로 오는 건 오랜만이네.”

연보라색 머리칼을 지닌 여성이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퍼블리셔를 물리쳤을 때였다.

지구의 인간들과 함께했던 성대한 연회.

신의 입장에선 아직도 눈에 선한 일이었지만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겨우겨우 복구되었던 서울의 모습은 이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하늘 높이 솟은 건물에는 최근 화제가 되는 길드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으며, 던전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가고 있었다.

‘시스템이 사라졌지만, 결국 많은 건 달라질 수 없었던 거겠지.’

시스템은 분명 사라졌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는 플레이어 신분에서 해방됐고, 더 이상 퀘스트와 같은 절대자의 시나리오에 휘둘릴 일은 사라졌다.

하지만 시스템의 잔재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강제성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의 힘은 플레이어라 불리던 이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었다.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었고, 그들은 새로운 인류의 지평이 되어야만 했다.

또한 시스템에 의해 생겨나던 던전들도 그대로였다.

이전처럼 위험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지만, 시스템이 사라지며 생겨난 엔트로피의 변화로 각 차원에는 그 영향이 가해졌다.

결국, 이전과 같이 플레이어들이 매번 생겨나는 던전들을 파괴해야 되는 위치가 된 것이다.

여전히 ‘본래’의 세계와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덕분에 좋은 점도 많았다.

던전에서 채취되는 자원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고, 인류는 다시 도약할 기회를 얻었다.

또한, 신들과의 관계도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달라졌다.

어쨌든 던전이나 몬스터와 같은 위협은 남아 있었다.

갑작스런 에너지 변동으로 생겨난 던전은, 제때 해결을 하지 못할 경우 몬스터가 터져 나와 큰 재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고로 그것에 대응할 플레이어, 이제는 ‘헌터’라 불리는 이들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신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헌터를 탄생시키기 위해선 신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당연한 일이다.

“아, 이번에 린에게 부탁해서 좀 쓸 만한 애를 우리 쪽에 영입시켜야겠네.”

게임은 사라졌지만, 신들은 여전히 지구에서 나름 즐겁게 지냈다.

헌터라는 새로운 요소가 나타나면서 이전보다 오히려 경쟁이 치열해졌다,

그때는 게임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이 되어버렸으니까.

재능 있는 인간을 ‘헌터 아카데미’에서 찾아 신의 힘을 내려 헌터로 만들었다.

플레이어와 비슷했지만, 마찬가지로 강제성이 없다는 점에서 달랐다.

그건 지구나 다른 별도 비슷한 성향이었고, 신들은 이전과 같이 ‘옵저버’를 통해 세계를 관망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하계에 본체로 직접 강림하는 건 불법이었다.

“로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살며시 내리자, 멀리서 달려오는 민아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깔끔한 단발머리였지만, 복장은 교복이 아닌 반팔 티에 핫팬츠라는 굉장히 시원스런 옷차림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다른 녀석도 아니라 아자젤의 결혼식에 늦을 정도로 난 간이 크지 않아.”

사실상 현 우주에 대적할 자가 없는 악마다.

마왕이 없었으면 누가 그 악마의 고삐를 쥘 수 있을까.

정의의 여신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리라.

민아는 그런 로키의 말에 씩 웃었다.

이전에는 신과 아바타의 관계였지만 지금은 거의 절친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반말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자, 타.”

“……네가 운전할 줄 알았나? 그냥 날아가는 게 빠르지 않아?”

“왜 그러셔. 나 이래 보여도 운전 잘하거든?”

아무래도 새로 뽑은 자동차를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민아는 고급스런 자동차에 기대서 로키를 바라보았다.

‘하긴 괜히 신인 걸 티낼 필요는 없겠지.’

오늘 로키가 지구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아자젤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아자토스를 쓰러트리고 잠들었던 아자젤은, 깨어난 지 1년 만에 자신의 계약자이자 분노의 악마인 신자운과 결혼을 발표했다.

‘본래라면 족히 100년은 잠들어 있어야 할 텐데, 하여간 괴물 같은 년.’

그때 아자젤이 사용했던 힘을 생각하면 100년은 잠들었어야 했지만, 아자젤은 2년 만에 눈을 떴다. 인간에게는 꽤 긴 시간이었을지 모르나 신들에게는 황당할 정도로 빠른 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용이라면 낮잠만 자도 지나가는 시간이었으니까.

“자, 다 왔어. 나는 잠시 친구들 데리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알겠지?”

“그래, 그래.”

예식장에 도착한 민아는 로키에게 사고치지 말라는 주의를 준 뒤, 자신의 친구를 데리러 가기 위해 사라졌다.

‘너무 빨리 왔나, 사람이 별로 없긴 하네.’

물론 ‘사람’이 없을 뿐이다.

악마들은 아주 바글바글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합이 들어간 모습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결혼식 준비를 돕고 있었다.

“오.”

적당히 앉을 곳을 찾던 로키의 눈에 익숙한 이가 보였다.

로키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조용히 않아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부하의 결혼식이라 그런가?”

“……?”

그녀는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리며 멀뚱멀뚱 로키를 바라보았다.

로키는 가볍게 인사한 손이 조금 민망해지는 것 같았다.

“나름 인사한 건데, 받아줄래?

“안녕하세요, 로키.”

“응, 오랜만이야. 마왕님.”

“그냥 지수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당신은 오빠와 꽤 친했으니.”

그 목소리는 늘 그렇듯 무척이나 무미건조했다.

로키는 지난 3년간 그녀의 목소리에 감정이 깃든 적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세한에 대한 소식은 없어?”

“네.”

3년 전, 세한과 7대 악마들은 아자토스를 쓰러트리기 위해 외우주로 향했다.

아자토스를 쓰러트리고 기적적으로 생환했지만 단 한 사람. 세한만은 돌아오지 못했다.

3년이 흐른 시점에서 대부분은 그가 죽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아직도 그의 생존을 의심치 않는 이들이 남아있었으니까.

로키는 후자였지만, 3년쯤 되니 슬슬 전자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린과 백설이는?”

“학교가 끝나고 온다고 했어요.”

“굳이 둘 다 아카데미에 다닐 실력이 아닐 텐데.”

“학교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둘의 정체는 인간들에게는 비밀이었다.

그녀와 함께 싸웠던 플레이어들이라면 정체를 아는 이들도 있겠지만, 아직 어린 학생들 중에서 린에 대해서 아는 이는 없었다.

이드라가 철저하게 정보를 은폐했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네.”

고요한 눈으로 분주히 예식장에 돌아다니는 악마를 지켜보는 지수의 모습에 로키는 내심 안쓰러움을 느꼈다. 어찌 이리도 한결같은 존재가 있는지.

“참, 이드라는 안 오는 거야?”

“아마 안 올 거예요. 정말 큰 문제가 생긴 게 아닌 이상 방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요.”

지수는 그의 생존을 확신하기에 이전과 달리 큰 변화가 없었지만 이드라의 경우는 달랐다.

마지막에 세한을 배웅한 게 그녀이기 때문인지, 이드라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물론, 부탁할 일이 있으면 잘 들어주고 린이나 백설이가 찾아가면 잘 대해주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수조차 3년 간 얼굴 한번 본적이 없었다.

“알겠어. 그래도 나름 결혼식이니 조금은 웃는 게 좋을 거야.”

로키는 그렇게 말하며 지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라졌다.

‘언제 웃었더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로키의 등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늘 바라보던 새하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이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던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건만, 여전히 허전하게만 느껴졌다.

“……너무 늦게 돌려주면 화낼 거예요.”

멍하니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지수는 계속해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지수의 세계는 잿빛으로 변했다.

무엇을 보더라도 감정이 움직이지 않았다.

크나큰 사랑은 무엇보다 강한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어떤 것보다 가혹한 시련이 되기도 한다.

예식장에 사람들이 들어차고 시끌시끌해지고 나서야 지수는 고개를 들었다.

어쨌든 부하의 결혼식이다.

이곳에서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마왕으로서의 일을 최선을 다하고, 기쁘게 웃어줄 생각이었다.

착한 아이의 연기를 하는 건 지수의 특기였으니까.

그래야, 그가 돌아왔을 때 칭찬을 해줄 테니.

“하객분들은 식장으로 들어와 둘의 결혼을 축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자 지수는 결혼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안은 하객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자젤은 지수가 주례를 서주길 바랐지만, 그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고로 그 일은 마왕의 바로 밑에 있는 루시퍼가 맡았다.

“흥.”

하얀 의자에 앉아 식이 진행되기를 기다리던 지수의 옆에 누군가가 털썩 앉았다.

‘누구지?’

마왕인 지수의 곁에는 감히 누구도 앉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직위도 직위지만, 지수는 타인에게 지극히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차가운 그녀의 시선을 받으면 대부분의 이들은 설설기며 물러섰다.

그건 신이나 악마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었구나.”

시큰둥한 목소리에 지수는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오늘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드라였다.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마녀의 정복을 입고 앉아있었다.

“폐인이 되어버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하네요.”

“흥, 이 육신은 불로불사이니 말이다. 얄궂게도 변할 수 없지.”

시니컬한 이드라의 말에 지수는 새삼스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지난 3년 동안 지수는 이드라와 만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만나지 못했다.

이드라가 지수를 만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간 얼굴도 보이지 않더니, 무슨 바람이 분 거예요?”

“…….”

이드라는 입을 꾹 다물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식이 시작되며 긴장된 얼굴의 신자운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면목이 없었다.”

“면목?”

“그때 내가 남았어야 했으니까.”

지수는 그런 이드라의 말에 굉장히 의외였다.

설마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제가 당신을 원망하리라 생각했나요?”

“……조금은.”

“설마 계속 틀어박힌 것도 그래서?”

“그건 아니다. 그냥…… 인간을 보면 그가 생각나서 인간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지수는 그녀의 말이 공감이 됐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굳이 방으로 틀어박힐 필요가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성향의 문제였으니 가볍게 넘어갔다.

“전 원망하지 않아요.”

“세한이 돌아오지 못하는 게 모두 내 탓일 지도 모르는데도?”

“돌아올 거예요.”

그 한결 같은 믿음에 이드라는 헛웃음마저 나왔다.

자신도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아직도 그녀는 눈을 감으면 멀어져가던 세한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만약 당신이 남았다면, 정말 짜증나게도 오빠는 슬퍼했을 거예요. 전 그걸 보고 싶지 않아요.”

“너라면 내가 사라져서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구나.”

“다른 세계의 제가 견디지 못했으니까요.”

광기의 마왕에서의 자신이 그러했듯이 분명 자신도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어떤 세계의 지수라도 세한을 생각하는 마음은 같을 테니까.

지수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런가.”

이드라의 표정은 읽기 힘들었다.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자운의 곁에는 행복한 얼굴의 아자젤이 서있었다.

지수는 저렇게 행복하게 웃는 아자젤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늘 여유롭고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던 그녀가 평범한 인간처럼 웃었다.

반지를 받고, 입맞춤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근엄한 얼굴로 주례를 읊는 루시퍼의 모습은 꼴불견이었지만, 그의 앞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는 신자운과 아자젤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일어나자꾸나.”

이드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식이 끝났을 때였다.

우글우글 모여 있는 하객들 사이로 부케를 든 아자젤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제 부케를 던지는 순서인 모양이었다.

보통 부케를 받는 건 다음 결혼을 할 이가 받는 경우가 많았다.

지수와 이드라로서는 그다지 연관 없는 일이었기에 먼저 식장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가는 건가?”

그런 지수의 앞에 정장을 입은 신자운이 서있었다.

그는 아자젤을 한번 바라본 후, 식장에서 나가려던 이드라와 지수의 앞을 막았다.

“네, 이제 더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으니까요.”

“과연.”

딱딱한 지수의 말에 신자운은 옅게 웃었다.

“그는 네가 받아주기를 바라던데.”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신자운의 말에 이드라도 의외라는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너 새로 남자가 생긴…… 것 같지는 않다만. 저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당연히 알 리가 없다.

하지만, 하나. 추측 가는 게 있었다.

신자운이 ‘그’라고 지칭할 자는 많지 않았으니까.

“……그라니요?”

당혹스런 어조로 묻는 지수의 말에 신자운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턱짓했다.

그가 가리킨 장소는 방금 지수와 이드라가 들어왔던 식장의 입구였다.

지수는 홀린 것처럼 그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식장의 입구는 상당히 붐볐지만, 지수에게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깔끔한 검은 양복을 입었지만,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는 남자.

이런 장소가 어색하다는 얼굴로 걸어 들어오는 그가 보였다.

“……!!”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움직이고 싶은데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분명, 지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수는 촉촉이 젖어가는 볼을 느낄 수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가득 차,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눈을 비비면 여전히 그가 있었다.

사라지지 않고 그곳에 서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 조금, 아니 많이 늦었네.”

언제나 보아왔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런 그의 모습이 지수는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릴 만큼.

“……세, 한 오빠.”

잿빛으로 변했던 지수의 세계가 변했다.

멈춰있던 시간이 움직이며 이제야 지수는 이야기의 끝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언제나 세한이 말하던 해피엔딩을 넘어.

우리들의 에필로그에.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