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309화 (309/332)

# 309

309. 불완전한 미래를 향해(2)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고요한 눈으로 이미르는 세한을 향해 말했다.

“내가 패배할 경우는 생각해 뒀다. 그러니 아자토스에게 핵을 회수시킨 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볼 요량이었지.”

이미르의 죽음은 퍼블리셔의 파멸.

그렇게 되면 이미르와 시스템이 바라는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나았다.

그러니 아자토스에게 부탁한 것이다.

모든 걸 최초로 되돌리기 위해서.

“헌데…… 아자토스를 죽이다니.”

반쪽만 남은 핵의 안에서 이미르는 상황을 줄곧 지켜보았다.

육신은 전부 부서져 사라졌지만 정신은 남아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이 짜둔 계획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아자토스를 이길 자는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자토스가 아자젤이 가한 필사의 일격에 ‘인간’이 되고.

도망친 아자토스를 쫓아 무명의 방에 세 명의 인간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덕분에 나는 이렇게 되살아날 수 있었다.”

아자토스와 연결되어있던 시스템의 라인을 따라 이미르는 신의 몸을 차지했다.

우주를 호령하고 지배하던 절대자의 육신이었지만, 이미 그 몸에 ‘아자토스’는 남아 있지 않았다.

빈껍데기를 차지하는 건 지극히 간단했다.

“정의의 여신과 마왕, 이미 둘의 힘은 다했지. 그리고 너 역시 지쳤고 말이야.”

이미르는 싱긋 웃으며 경계하는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지배하는 마계의 군세도 이곳에는 도달할 수 없으리라.

“이미르. 하나만 묻자.”

“얼마든지.”

“너 지금 자신 없지?”

훅 던지는 세한의 말에 이미르의 입이 닫혔다.

여유를 부리던 기색도 옅어졌다.

“아자토스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어. 그것을 통해 억지로 부활해 봤자 너 역시 정상일 리가 없지. 설령 시스템에게서 탄생됐다고 해도 소모된 힘이 채워지는 건 아니니까.”

세한은 아까 이미르가 이야기했던 말에 동의했다.

이미르와 세한은 닮았다.

그러니 지금 이미르의 생각은 훤히 보였다.

“……그래.”

이미르는 그 말에 긍정했다.

세한의 말처럼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다. 억지로 부활한 것에 가까우니 남아 있는 힘은 거의 없었다. 아자토스가 마지막에 긁어모았던 힘들도 파일벙커를 완전히 파괴시키며 죄다 소모해버렸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자신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너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지.”

이미르는 태생부터 강자가 아니었다.

거인족이었으니 약자로 태어난 건 아니었으나, 당시 거인족을 이끌던 것은 반고였다.

이미르는 스스로의 힘을 키우고, 세력을 긁어모아 모든 수를 사용하여 반고를 꺾었다.

억지로 손에 넣은 왕의 자리.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위대하다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니 지금밖에 없었다.”

이미르의 자색의 눈동자가 세한에게 고정되었다.

“네놈들을 쓰러트릴 수 있을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라 판단했다.”

분명 지금 이미르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많지 않았다.

열쇠와 시스템의 반쪽을 소유했지만 그것을 다룰 신격자체가 그다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지금만이 그들을 백 퍼센트 이길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불멸자다.”

시스템으로부터 거인왕의 직위를 얻은 순간부터 이미르는 불멸자가 되었다.

죽음이라는 개념이 사라졌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죽지 않는 혼과 육신을 손에 넣었다.

비록 그 육신은 세한의 말뚝에 파괴되었지만, 핵으로 대피해있던 이미르의 혼은 ‘죽음’의 개념을 부여받지 않았다.

“말뚝이 사라진 네가 나를 어떻게 죽일 수 있지?”

1회차의 이드라가 만든 불멸자를 죽이는 말뚝.

이미르는 그것을 가장 먼저 파괴했다.

모든 힘을 쏟아 먼지 하나 남지 않도록 완전히 소멸시켰다.

그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가장 먼저 처리한 것이다.

“……한지수.”

“네?”

“린을 데리고 피해.”

이미르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세한은 지수를 향해 지시했다.

아래로 떨어진 린은 모든 힘을 죄다 소모한 탓에 움직일 기력도 없을 것이다.

이미르가 공격을 가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싫어요!”

하지만 지수는 처음으로 세한의 말을 거부했다.

분명 린은 지수에게도 조금은 ‘동료’라는 의식이 싹튼 이인 건 분명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건 세한이었다.

지수는 손을 뻗어 세한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가고 싶지 않아요, 저를 가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지금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세한은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무명의 방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붕괴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무명의 방이 파괴되면 아자토스의 옥좌도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별은 파괴되고,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혼돈의 소용돌이에 갇히게 될 것이다.

불멸성을 지니지 못한 이들은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선 지수가 모두를 데리고 지구로 향하는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 수 있는 건 열쇠를 지닌 지수와 린만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린은 모든 힘을 소모하여, 문을 열 수 없을 터.

그렇다면 남은 건 오직 지수뿐이다.

“하지만……!”

“괜찮아.”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가고 싶지 않다고 부정했지만, 여기에 남아봐야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상당한 힘을 소모한 것은 분명했으니까.

문을 여는 것도 다른 악마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부탁이야.”

세한의 말에 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른 이들을 구하는 역할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남아 끝까지 함께 있는 게 훨씬 소중했다.

하지만 그건 세한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알겠어요.”

지수는 세한의 양손을 꽉 쥔 후, 눈을 부릅떴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이 물기가 아른거리는 눈이었지만 울지 않았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그렇게 말한 지수는 세한이 만들어준 발판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의 말을 굳게 믿으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수는 린을 안아들자마자 무명의 방의 공간을 부수며 벗어났다.

“혼자로 괜찮겠나?”

이미르는 그런 세한에게 물었고 세한은 그런 이미르에게 씩 웃었다.

“너야말로 보내줘도 괜찮겠어?”

“나는 너만 이곳에서 확실히 죽이면 된다. 나머지는 차차 시간을 들여 무너트리면 되는 일이지.”

“과연…….”

세한은 이번만큼은 그의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 대부분의 힘을 소실하기는 했지만 아자토스의 육신을 얻은 것이다.

시스템과 열쇠의 힘을 사용한다면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천천히, 남은 신격을 점검하며 세한은 이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야, 이미르.”

그의 어깨 위에는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다루는 이드라가 건재했다.

그녀와 세한은 일심동체였으니까.

이드라는 작은 목소리로 세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세한. 시간이 없다.”

“알아.”

무명의 방이 되기까지 앞으로 몇 분.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미르를 쓰러트리고 무명의 방을 벗어나야만 했다.

오직 이미르만을 바라보는 세한의 모습에 이드라는 미처 못 한 말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자토스를 쓰러트리며 과도한 힘을 퍼부은 탓에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은 이리저리 금이 가 있었다. 과연 이것이 이미르를 쓰러트릴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이드라도 알 수 없었다.

‘단숨에 끝낸다.’

공교롭게도 그 생각은 세한도, 이미르도 같았다.

서로 마주보던 둘의 시선이 교차하며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남은 신격을 끌어올렸다.

“이제 마지막이다.”

투콰아아앙!!

세한과 아자토스, 둘의 신형이 앞을 향해 쏘아지며 격돌했다.

“역시 생각하는 게 같군, 김세한!!”

세한의 장기는 환상을 실체화시키는 힘.

그리고 이미르의 장기는 마법과 시스템을 통한 현실조작이다.

까마귀를 통해 시스템의 힘을 방해할 수 있었지만, 아자토스와 달리 이미르는 시스템에게 파생된 존재라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고로 세한이 선택한 건 접근전이었다.

그리고 이미르 역시 세한이 가진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과 시스템의 반쪽을 경계하여 접근전을 선택했다.

‘접근전은 내가 더 강하다.’

라는 서로의 생각이 맞물리며 둘의 주먹이 충돌했다.

수라의 묘를 살린 세한의 주먹이었지만 이미르의 주먹은 그 힘을 온전히 견뎌냈다.

“놀랍군.”

“내가 할 말이다.”

이미르의 말에 세한이 답했다.

설마 완벽하게 동수를 이룰 줄이야. 이미르가 반고를 통해 접근전을 보완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전에 싸웠을 때는 거대한 거인의 모습이라 이런 식으로 겨룰 일이 없었으니까.

촤르르륵!!

세한이 재차 두 번째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이미르의 등 뒤에 있는 시스템이 움직였다.

“이드라!”

그의 외침과 동시에 허공에서 만들어진 자색의 기둥이 마구잡이로 세한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을 이드라가 똑같은 방식으로 기둥을 만들어 상쇄시켰다.

쾅쾅쾅쾅!!

폭죽처럼 부서져나가는 기둥의 파편 틈으로 세한의 몸이 빠져나왔다.

이미르가 급히 왼손을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세한의 주먹이 빨랐다.

“하아아아!!”

세한의 주먹이 이미르의 안면에 적중하여 그의 신형이 유성과 같이 대각선으로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천둥과도 같은 소리가 울리며 땅에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평소라면 여기서 환상을 실체화시켜 연속공격을 가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런 광범위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떨어진 이미르를 뒤따라 땅에 내려서자, 뿌연 연기 속에서 이미르의 주먹이 튀어나왔다.

“컥!!”

세한과 달리 이미르가 노린 건 복부였다.

몸이 기역 자로 꺾이며 뒤로 밀려나는 세한을 향해 이미르가 왼손을 뻗었다.

“흡!”

인력이 움직이며 밀려나던 세한의 몸이 단숨에 이미르의 앞으로 당겨졌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까마귀가 날아들어 당겨지던 인력의 힘을 소멸시켜 이어져 공격하던 이미르의 주먹이 허공으로 스쳐 지나갔다.

덕분에 텅 비어있는 이미르의 옆구리를 향해 세한의 무릎으로 올려 찼다.

그 충격으로 순간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던 이미르였지만, 단번에 균형을 잡고 반대로 세한의 얼굴을 후려쳤다.

‘해보자, 이거지?’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며 둘의 주먹과 발이 서로를 향해 휘둘러졌다.

난타전.

그 말이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온 힘을 쥐어짜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차며 상대의 육신에 조금이라도 더 상처를 만들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콰아아앙!!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페이크.

서로의 주먹과 발에 집중한 틈을 노려 기습적으로 시스템의 힘, 혹은 환상으로 등 뒤를 노렸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빗나갔다.

우습게도 동시에 힘을 사용한 탓에 그들이 만든 날카로운 원뿔형의 기둥과 빛의 칼날이 부딪치며 으깨졌다.

““칫!””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혀를 차며 재차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를 향해 덤벼들었다.

계속해서 근접전으로 몰아붙이며 서로의 틈을 노렸다.

콰쾅! 콰콰쾅!!

하지만 싸움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무명의 방 가득 굉음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이미르나 세한이 사용한 힘 때문에 생긴 소리가 아니었다.

‘붕괴된다.’

하얀빛의 파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곳을 유지하던 아자토스의 힘이 사라지며 무명의 방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곳은 새하얀 방이라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방팔방 새까맣고 흉측한 금이 그어지며 갈라지고 있었다.

콰콰콰쾅!!

결국 세한과 이미르가 서 있던 대지마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치 깨어진 빙상과 같은 모습이었다.

뿔뿔이 흩어진 하얀 조각 위로 착지한 세한은 출렁이는 검은 바다를 보았다.

검은 바다 위에 부서져 흩어진 파편들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혼돈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광경.

세한은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음을 느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이곳에 있는 모든 건 완벽하게 사라지리라.

세한, 자신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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