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
307. 신의 종말(4)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개조하며, 사용했던 시스템의 반쪽.
이드라는 그것을 새롭게 재탄생시켰다.
보다 아자토스를 상대하는 데에 적합하도록.
그 결과가 바로 새장 속에 들어 있는 까마귀였다.
까마귀의 모습으로 만든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단지 까마귀는 세한을 상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철컥.
세한은 까마귀가 갇혀 있던 새장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새장의 안에서 까마귀가 천천히 날아올라 세한의 팔등에 앉았다.
“자, 이것을 받아.”
그런 까마귀를 잠시 바라보던 세한은 까마귀의 몸에서 깃털 두 개를 뽑아 지수와 린에게 내밀었다.
“이걸 몸에 지니면 보다 쉽게 아자토스의 간섭을 떨칠 수 있을 거다.”
겉으로만 보자면 평범한 깃털에 불과했지만, 시스템의 몸에서 나온 것.
평범한 물건일 리가 없었다.
‘아.’
아니나 다를까, 깃털을 받아든 지수와 린은 방금까지 숨통을 조이던 기운이 확연히 옅어지는 걸 느꼈다. 약해졌던 육신이 힘이 들어가며, 몸에 돌아다니는 불쾌한 것들을 점차 지우기 시작했다.
“그럼 이쪽은 해결됐고…….”
세한은 둘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자토스를 올려보았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 몽롱한 눈으로 무명의 방 전체를 그의 권능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미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에 휘둘려 폭주하고 있었다.
니알라토텝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상태는 그보다 더욱 심했다.
여태 누가 아자토스에게 저항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원한다면 세상의 모든 건 지워져 소멸했을 텐데.
언제나 절대자로서 살아온 아자토스에게 이 상황은 그의 모든 걸 부정하는 꼴이었다.
“────.”
남색으로 물들어있던 아자토스의 동공도 점차 자색으로 변하며, 안구까지 모조리 보라색으로 변했다. 이미 홍채와 수정체의 구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입에선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끝없이 흘러나왔고, 그럴수록 무명의 방에 가득 찬 구체와 검은 반점의 숫자가 늘어갔다.
‘보라색, 이라.’
세한은 그것을 보며 천천히 날개를 펼쳤다.
어쩐지 익숙한 상황이었다.
시스템과 싸웠을 때와 비슷하지 않은가.
절대자를 향해 도전한다는 것이.
하지만 그때보다 나았다.
이곳에는 세한과 이드라만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
아자토스의 입에서 괴성이 터졌다.
방금 전까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짐승을 울음소리와도 같고, 괴물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해괴한 소리.
두근, 두근, 두근!
무명의 방이 심장이 뛰듯 맥동하기 시작했다.
“가라!”
그것을 보며 세한은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그의 팔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날개를 펼치고 높이 날아올랐다.
‘사용해보는 건 처음이지만’
완성되자마자 아자토스의 옥좌에 온 탓에 테스트해 볼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사용해 온 ‘까마귀의 눈’과 같은 방식이었으니까.
“윽!”
까마귀의 눈을 처음 사용했을 때의 배는 되는 아릿한 두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잠시 후, 한쪽 눈에 까마귀의 시야가 공유되었다.
‘자, 그럼…….’
한쪽 눈에 비치는 까마귀의 시야에 집중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맥동하는 무수한 구체들과 반점들.
그것을 향해 까마귀를 돌진시켰다.
파직!!
아자토스가 만든 구체가 까마귀의 몸에 닿자, 가볍게 부스러지며 흩어졌다.
현재 무명의 방에 가득 찬 힘은 아자토스와 시스템의 힘이 반반 섞여 있었다.
까마귀를 이용해 그 균형을 무너뜨려 주면 무분별하게 생성된 힘의 파편들을 지워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파직! 파직! 파직!
검은 빛줄기가 이리저리 꺾이며 아자토스가 만들어낸 권능을 마구잡이로 파괴시켰다.
까마귀가 날아간 자리에 남은 깃털들은 검은 반점들을 지워버렸다.
“온다!!”
그러나 까마귀가 아무리 빠르게 아자토스의 힘에 간섭하고 지운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미처 다 지우지 못한 구체들이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드라의 날카로운 외침에 세한도 검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콰아아아앙!!
무명의 방 전체가 거대한 폭발에 휩싸였다.
“큭!!”
세한은 둥근 돔의 형태로 결계를 만들어 지수와 린을 보호했다.
까마귀를 이용해 일정구역을 청소해 둔 탓에 공간을 마련하는 건 성공했지만 결계에 가해지는 충격에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세한 혼자였다면 허수공간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린과 지수를 위해선 그럴 수 없었다.
‘덕분에 공간이 비었어.’
한 번에 모조리 날려버린 탓인지 무명의 방이 본래의 새하얀 색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아자토스의 손이 움직였다.
숙였던 머리와 굽혀졌던 허리가 펴지며 아자토스가 올곧게 섰다.
고고고고!!
그의 몸을 중심으로 외곽선을 그리듯 자색의 빛이 둥글게 회전했다.
작은 실과도 같은 굵기의 빛줄기가 하나둘 늘어나며 아자토스의 몸에 실타래처럼 뭉쳤다.
세한은 날개를 펼치고 아자토스를 향해 날아갔다.
“인간이, 인간 주제에. 인간 따위가.”
작은 중얼거림. 그것은 세한이나 다른 이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자토스 본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가장 위대한 신에게 얽힌 족쇄.
그것을 벗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치고 있었다.
‘위험해.’
아자토스의 몸에 부여된 죽음이 기운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자극시켜 그의 몸에 얽매인 인간의 틀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촤르르륵!!
아자토스를 향해 접근하려 하자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빛의 실타래가 풀리며 세한을 노리고 날아왔다.
“이드라!”
그러나 저것은 기회이기도 했다.
아자토스가 다른 모든 걸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죽음과 인간의 형상에 집착하는 이 순간이 그를 죽일 기회였다.
쾅쾅쾅쾅!!
이드라의 손이 움직이자 세한을 향해 날아오던 실타래들의 방향이 왜곡되며 사방으로 퍼졌다.
흩어진 빛줄기들은 방의 벽을 무차별적으로 두드렸고 방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새하얀 방에 조금씩 금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나를, 방해하지 마라.”
동공이 없는 자색의 눈이 세한을 향했다.
어린아이의 형상을 한 아자토스의 손이 세한을 가리켰다.
부서져 내리는 무명의 방, 그 공간의 틈에서 새까만 직사각형의 기둥이 튀어나왔다.
그 숫자는 대략 다섯. 그것이 세한의 몸을 뭉개기 직전에 세한의 손이 움직였다.
단순한 물질창조나 형상조작이라면 이쪽도 대응할 방법이 무궁무진했다.
가가가각!!
세한의 손짓에 따라 방의 벽이 크게 움직이며 날아오던 기둥들을 분쇄시켰다.
“환상, 꿈, 그런 것으로 만든 것 따위 하찮다.”
아자토스의 등 뒤에 시스템이 움직이며 세한이 만든 환상을 단번에 지워버렸다.
거기에 아자토스를 향해 접근하던 세한의 몸도 우뚝 멈췄다.
“하찮다. 하찮다. 모두 하찮아.”
굳어버린 세한을 바라보던 아자토스는 검지를 들었다.
검지의 끝에는 검은 점이 생겼다. 저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순간, 세한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작은 점을 중심으로 금색 띠가 형성되며 작은 블랙홀이 만들어진 것이다.
“큭!”
저것이 활성화되면 눈 한번 깜짝할 사이 이곳에 있는 모든 건 빨려 들어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활성화되기 전에 까마귀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세한이 뻗은 손에 내려앉으며 검은 점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아자토스 검지 위에 만들어졌던 검은 점이 단번에 사그라지며 사라졌다.
더불어 굳어있던 세한의 몸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아자토스를 향해 다가갔다.
“──?”
그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아자토스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현재 세한이 가진 힘으로는 아자토스의 힘을 이렇게 간단히 지워버릴 수 없었으니까.
‘아자토스의 힘만 사용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 아자토스는 자신의 전능함을 채우기 위해 시스템의 힘까지 활용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부족한 힘을 채우고 죽음의 개념에서 탈피하려면 그것의 힘을 빌리는 게 정답이었다.
이쪽에 시스템의 나머지 반쪽을 지닌 자가 없었다면.
“크으아아아!!”
몸의 속박을 풀고 전진했다.
세한과 개별적으로 분리된 까마귀의 형상을 한 시스템은 아주 간단한 알고리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나머지 반쪽, 즉 아자토스가 가진 시스템이 움직일 때 그것을 강제로 비활성화시키는 것.
사용되는 힘을 흡수하여 먹어치우는 것.
아자토스와 달리 시스템을 온전하게 다루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시스템의 반쪽을 사용해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상대가 사용하는 힘을 방해하는 것뿐이라니.
이드라가 손을 댔음에도 이 정도였다.
이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아자토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알 수 있을 정도.
그러나 지금, 그런 건 무의미했다.
“멈춰라.”
아자토스의 언령이 펼쳐지며 세한의 몸을 속박시키려 했지만 이미 끊어진 실은 더 이상 세한을 막지 못했다.
왜 그런 것인지 아자토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의 아자토스로선 시스템에 감춰진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었으니까.
하물며 대부분의 의식을 죽음의 개념을 탈피하는 데 사용 중인 지금, 아자토스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저 눈앞에 다가오는 필멸자를 밀어내려 할 뿐이었다.
“싫다.”
세한은 짤막하게 답하며, 오른팔을 아자토스에게 향했다.
그의 오른팔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쇠기둥이 빛나고 있었다.
이드라가 만들어낸, 불멸자를 죽이는 말뚝이.
“그건…….”
지구에서 본 기억이 있는 것이다.
아자젤이 자신에게 덤벼들기 전, 저것의 일부를 잘라 품에 간직했다.
“그건……!”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심장에 꽂아 그를 인간으로 추락시켰다.
아자토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저것이 바로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원흉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아아아아!!”
아자토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인간의 절규와도 같았다.
죽음을 향한 분노, 원망. 번뇌.
신으로선 느낄 수 없는 감정이 모두 섞여 있었다.
소년의 모습을 한 아자토스의 형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아닌 차원이 다른 외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세한은 아자토스가 탈피를 끝내기 전에 그를 향해 돌진했다.
철컥!!
파일벙커가 뒤로 당겨지며 장전됐다.
이제 사출하기만 하면 끝이지만 아자토스의 주변에 겹겹이 만들어지는 장벽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돌파할 수 있겠느냐?”
“못해.”
이드라의 말에 세한은 즉답했다.
당연히 이드라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여기서 끝이다! 시스템의 반쪽을 이용하면……!”
“알잖아. 저거, 둘러싼 장벽은 평범한 방어벽이 아니라 아자토스의 껍질이야.”
시스템의 힘은 조금도 돌아가지 않은, 아자토스의 외피.
“내 힘으론 깰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
단언하는 그의 말에 이드라는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이드라를 향해 세한은 피식 웃었다.
“내가 아니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아래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백색의 유성이 보였다.
세계나 세상,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닌 오직 인류의 정의만을 수호하는 정의의 여신이.
천칭검 리브라. 그것을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자가.
‘할 수 있어.’
린은 자기 자신에 최면을 거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할 수 있다. 분명 자신이라면 할 수 있다.
‘아자젤이 했던 것처럼.’
리브라에서 백색의 검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반고를 양단했을 때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질은 차원이 달랐다.
기기기긱!!
다가오는 린에게서 위협을 느낀 것인지 아자토스의 외피에서 자색의 촉수가 뿜어져 나왔다.
아자토스의 외피에서 만들어진 것인 만큼 일반적인 수단으론 작은 생채기도 입힐 수 없는 것들이었다.
수많은 촉수 하나하나가 그레이트 올드원이며 아우터갓과 같다.
그런 것을 향해 린은 직선으로 돌진했다.
린의 눈이 금색으로 물들며 잔상을 남겼고, 한계를 넘어선 그녀의 신격이 넘쳐흘러 반짝이는 금발에서 금가루와 같은 입자가 흩날렸다.
서걱!
린의 머리를 노리는 촉수를 베어냈다.
어깨를, 허리를, 가슴을, 다리를 노리며 수많은 촉수들을 베어낸다.
베고, 또 베어내자 외피에 갇혀 있는 아자토스의 모습이 보였다.
“천칭이여!!”
천칭검 리브라.
정의와 악을 판단하는 여신의 천칭.
본래라면 세계를 위해서 움직였을 그것은, 지금 인류를 위해 천칭을 기울였다.
“──정의를!!”
한계를 넘어 아자토스의 힘을 꿰뚫었던 아자젤이 그러했듯.
백색의 검이 아자토스의 외피에 박혔다.
쩌적, 쩌저적!!
린의 검이 박힌 부분을 중심으로 외피에 거미줄처럼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점차 갈라지기 시작한 균열에서 백색의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아!!
백색의 광채가 폭사되며 아자토스의 외피가 완벽히 파괴됐다.
‘아.’
물론, 폭발의 시발점이 된 리브라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칼날이 완전히 파괴되어 산산이 흩어졌고, 린 역시 그 파편들과 함께 지상으로 떨어져야만 했다.
모든 힘을 쏟아낸 탓에 더 이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린은 그 속에서 또렷하게 보았다.
반짝이는 칼날의 파편에 반사된 신의 민낯을.
공포와 경악으로 물든 그것을.
‘꼴좋다.’
그런 그의 모습이 린은 실로 유쾌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