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
305. 신의 종말(2)
리브라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백색의 검기는 어떤 악마를 상기시켰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아자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순히 닮았을 뿐이다.’
단순히 검에서 흘러나오는 신격의 구현일 뿐 아닌가.
색이 비슷하다고 해서 결코 같으리란 법은 없었다.
‘하.’
거기까지 생각하던 아자토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어찌 이렇게 추할 수 있을까.
그는 아자토스다. 언제부터 아자토스가 그런 사소한 것에 벌벌 떨었단 말인가.
이것도 전부 인간이 되어버린 탓이다.
‘이건 내가 아니야.’
백색의 검기를 볼수록 불쾌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마음이 바뀌었다.”
아자토스는 좌우로 양팔을 넓게 펼쳤다.
그러자 새하얀 공간에 무수히 많은 검은 반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다니.”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아자토스는 린을 응시했다.
린은 그런 아자토스의 시선에 리브라를 꽉 움켜쥐었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해라.”
아자토스의 손짓과 함께 무명의 방을 가득채운 검은 반점에서 묵빛의 광선이 쏘아졌다.
처음 아자토스가 사용했던 광선과 같은 빛줄기가 비처럼 린을 향해 쏟아졌다.
사방팔방을 노리고 쏟아지는 광선은 피할 공간 따위는 없어보였다.
허나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세한이 아니었다.
“린!!”
비록 첫 공격은 놓쳤지만, 그건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공격이 온다는 걸 안 이상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우우웅!!
린의 주변에 허수공간이 만들어지며 빛줄기들을 삼켰다.
세한이 만든 허수공간으로 빈 공간이 생기자 린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허수공간이 막지 못한 광선들은 리브라를 휘둘러 베어내며 단번에 허공을 질주하며 달려 나갔다. 아자젤이 그러했던 것처럼.
“……흥.”
아자토스는 눈을 살며시 찡그리며 오른손을 들고 옆으로 가볍게 밀었다.
그러자 허공을 달리던 린의 신형이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우측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거기에 제대로 균형을 잡기도 전에 날아가는 린의 위아래의 공간이 움직이며 검은 기둥이 만들어졌다. 검은 기둥은 각각 위로, 아래로 움직이며 린을 사이에 두고 격돌했다.
콰콰쾅!!
서로가 부딪친 충격으로 기둥이 부서지며 무수한 파편이 튀었다.
“──!!”
격돌하는 기둥 틈에 끼었을 린의 모습을 찾던 아자토스는 자신의 후방에서 들린 울음소리에 왼손을 들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아자토스가 린에게 공격을 하는 사이 후방에서 접근하던 지수의 주변에 반점이 생겨나며 린에게 쏘아졌던 광선들이 폭사됐다.
콰콰콰쾅!!
허공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지수를 확인한 아자토스는 재차 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목이 움직이는 것보다 빠르게 무언가가 그의 목을 잡아챘다.
콱!!
“호오.”
분명이 산산 조각났을 지수가 아자토스의 목을 붙잡았다.
덜렁거리던 목과 다리가 단번에 재생되었고, 반쯤 찢겼던 하반신이 붙었다.
“과연 그런 능력을 지녔으니 무모하게 돌진할 수 있었던 거겠지.”
불사신. 문득 노스 이디크가 투덜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소멸되어 사라졌어야 할 것도 회복한다 이건가?’
아자토스가 쏘아낸 광선은 단순히 빠르고 위력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지수를 염두한 건 아니었지만,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도록 치유불가의 개념을 부여해 둔 상태였다. 당연히 단순한 재생 능력으로는 회복되지 않았을 터다.
“열쇠의 힘인가.”
지수의 머리 위의 검은 왕관이 빛을 발했다.
아자토스의 목을 잡아챈 지수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형형히 빛냈다.
으득, 으드득!
손에 힘을 넣어 아자토스의 목을 부러뜨리려 했지만, 아자토스 몸을 둘러싼 막강한 장벽에 손가락이 파고들지 못했다.
“꺼져라.”
아자토스의 언령이 발한 순간, 지수가 있던 장소의 공간이 접혔다.
방금 전까지 지수가 있던 장소가 말 그대로 지워지며 사라졌다.
“──!!”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뺀 지수는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지만, 오른팔이 사라져 있었다.
‘상처를 입히는 게 아니야.’
지수는 처음으로 심장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방금 공격은 단순히 지수를 죽이거나 상처 입히려는 게 아니었다.
공간의 먼 저편으로 날려버리려 했다.
죽일 수 없다면 몸을 산산이 부숴 뿔뿔이 흩어버리면 된다.
물론, 그렇게 해도 지수는 어느 한 곳을 기점으로 재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이탈하게 되어 먼 우주의 저편으로 날아가게 되면 다시 이곳에 올 방법이 없었다.
“괜찮아?”
지상으로 떨어지던 지수를 검은 날개를 펼쳐 날아온 세한이 안아 들었다.
“네, 괜찮아요. 하지만 쉽게 접근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설마 세한이 이런 식으로 받아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지수는 이런 상황에서도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그런 지수가 약간 황당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피식 웃은 세한은 옆에서 쏘아지는 광선을 피해 몸을 비틀었다.
피피핑!!
새하얀 공간 내에 무작위로 생성되는 검은 반점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자율적으로 공격을 해왔다. 다행히 허수공간이 있는 세한에게는 그다지 위협적인 공격이 아니었지만 다른 행동을 못 하게 막는 만큼 상당히 귀찮았다.
“아자토스의 능력은 내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 너하고 린은 최대한 아자토스를 몰아쳐.”
“예.”
지수는 어떤 질문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럴 필요가 있는지, 세한의 힘으로 아자토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지 궁금할 텐데도 묻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지수는 세계가 게임이 된 순간부터 그랬다.
무모하다 싶은 세한의 말에도 간단히 수긍했다.
‘연기’를 할 때는 사람다운 반응을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은 후론 더더욱 그런 경향이 심했다.
처음에는 그런 지수가 이상하게만 보였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이런 지수의 행동이 세한을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에서 나온다는 걸.
‘그럼 그 신뢰에 보답해 줘야겠지.’
지수와 시선을 마주친 세한은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곤 떨어져 내리는 지수의 발아래에 발판을 만들었다.
허공을 달릴 수 있는 린과 달리, 지수는 하늘을 자유자제로 날아다닐 줄 몰랐다.
그냥 점프만 해도 날아다니는 것과 같으니 그런 기술을 익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겠지만, 온 사방이 아자토스의 통제에 있는 지금은 그럴 순 없었다.
그러니 세한은 지수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발판을 만들었다.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그런 세한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지수의 머리가 끄덕여지며 아자토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잔재주를.”
아자토스의 손짓에 그의 주변에 둥근 구체가 만들어졌다.
지구에서 아자토스가 우주를 초기화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것과 무척 닮아 있었다.
담겨 있는 힘은 그보다 훨씬 적었지만, 결코 방어할 수 있는 위력은 아니었다.
저 공격에 정면에서 맞고 살 수 있는 건 이곳에서 지수가 유일했다.
세한이나 린은 닿는 즉시 원자단위로 분해되리라.
“……할 수 있겠느냐?”
검은 반점이 움직이고 아자토스의 주변에 가득 만들어지는 구체를 본 이드라가 말했다.
빛의 속도로 쏘아지는 광선과 맞으면 먼지로 변해버리는 구체.
그러나 본래 아자토스의 힘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내가 또 슈팅게임은 좀 하지.”
아자토스는 아직 힘을 전부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열쇠와 시스템의 힘을 빌린 것부터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그럼…….”
세한의 머리 위로 부등변다면체가 출현했다.
열쇠와 동등한 힘을 손에 넣은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
이제 이것을 전력으로 사용해야 할 때였다.
콰콰콰콰!!
그와 동시에 아자토스의 주변에서 나선의 형태로 회전하던 구체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거기에 반점에서 쏘아지는 광선과 아자토스의 손짓에 따라 공간이 갈라지며 무명의 방을 움직였다.
무수한 탄막이 만들어지며 지수와 세한을 향해 쏟아졌다.
‘단번에 끝내야 해.’
아무리 아자토스의 힘이 약해졌다고 해도, 그의 힘이 전부 소모될 리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건 이쪽이다.
거기다…….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세한은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구체를 피하며 허수공간을 열고 닫았다.
자신은 물론, 아자토스를 향해 접근하는 지수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쿵쿵쿵!!
지수는 세한이 만든 발판을 밟으며 아자토스를 향해 접근했다.
그 방향은 모두 세한이 유도한 대로였다.
광선을 피해, 구체의 틈과 틈 사이를 노려 지수가 아자토스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길을 만든다.
“까불지 마라!!”
탄막을 뚫고 접근하는 지수를 향해 아자토스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주변에서 떨어지던 구체들의 방향이 틀어지며 발판을 막 밟고 뛰려던 지수를 집어삼켰다.
“……큭?!”
아자토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대로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 다른 공간으로 전송시키려 했지만, 지수의 육신이 거울이 깨진 것처럼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언제 환상과 바뀐 거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눈을 속이다니!
이드라의 힘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그것은 세한이라는 인간 때문인지, 아니면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속았다는 것만으로 아자토스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아자토스가 쏟아낸 탄막 사이에서 뛰어다니는 지수의 모습들이 보였다.
그 숫자는 하나나 둘이 아니었다. 족히 수십.
‘누가 진짜인지 모르겠다면.’
그의 머리 위에 있는 금색의 왕관이 빛나기 시작했으며, 등 뒤에 있는 금색의 링이 흑색으로 물들며 가시와 같은 요철이 생겨났다.
시스템의 반절이 아자토스의 힘에 침식되며 일어난 현상이다.
“모조리 날려 버려주마!!”
날아다니던 검은 구체들이 단번에 수십 미터로 크게 부풀었다.
백색의 방에 생겨나던 반점들의 숫자도 급격히 증가하며 마치 방 전체가 검게 물든 것처럼 변했다.
그 목표는 자신을 향해 접근하는 지수와, 그런 지수를 돕는 세한에게 집중되었다.
수십 명이었던 지수의 분신들이 갈려나가기 시작했지만 그럴수록 환상들의 숫자도 불어났다.
환상이 만들어지고 부서지고,
만들어지고 부서지고.
처음에는 길항하던 그것이 조금씩 아자토스가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공격을 피하고 막으며 환상을 만들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하나, 단 하나만의 지수가 남았다.
그것은 아자토스의 지척까지 접근하여, 흉성의 학살자를 높이 치켜들었다.
“흥!”
머리 위로 검게 드리운 흉측한 무기를 향해 아자토스가 비웃었다.
이미 늦었다. 아자토스는 오른손을 들어 지수를 가리켰다.
무수한 검은 반점들이 지수를 가리켰고, 아자토스의 손끝에는 검고 둥근 원형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원형이었던 그것은 점차 날카로운 모서리가 만들어지며 회전했다.
불사신인 지수의 몸을 갈가리 찢고 우주의 저편으로 날려버리기 위해 준비해 둔 것이었다.
“린!!”
그것이 지수의 몸에 닿기 직전, 세한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 외침에 아자토스는 잊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순백으로 빛나는 검을 든 소녀를.
‘내가 잊었다고?’
아자토스는 전지전능하다.
전지전능했다.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뭐든지 알 수 있다.
당연히 그 인식능력은 인간 같은 것과 차원이 달랐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모든 걸 알게 되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인간.
더 이상 아자토스는 전지(全知)를 지니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자토스는 다시금 깨달았다.
“큭!!”
굴욕감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자토스의 눈동자가 린을 향했다.
다행히 아직 거리가 있었다. 오기 전에 요격하여 떨쳐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고고고고!!
지수를 향하던 검은 반점들이 움직였고, 퍼트려둔 구체가 사방에서 좁혀졌다.
‘할 수 있어.’
비처럼 쏟아지는 검은 광선을 보며 린은 자신을 타일렀다.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이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려 제대로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세한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린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그때는 그 말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씩 강해지는 자신을 느끼고, 반고를 쓰러트렸을 때에서야 린은 세한이 말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기다려.」
아자토스가 지구에서 세상을 모두 지워버리려 했을 때 린은 가장 먼저 나서려 했다.
인류의 정의를 수호하는 그녀는 본능적으로 저것을 없애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말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자젤이었다.
그녀는 지수에게 가기 전, 먼저 린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여신님이 나설 때가 아니란다.」
그녀는 상냥한 어조로 말하며 린의 등을 두드렸다.
「지금은 그냥,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지켜보렴.」
그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한다.
그녀의 목적은 단순히 아자토스를 인간으로 추락시키는 것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