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
303. 무명(無名)의 방(3)
어두운 남색의 하늘을 밝히며, 작은 태양이 불타올랐다.
게브라, 모든 걸 불태우는 개념을 지닌 불길은 지상으로 떨어져 대지를 불살랐다.
수많은 마물들이 일소되었고, 급이 낮은 그레이트 올드원은 몸이 녹아내리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 힘에 정면에서 맞설 수 있는 자는 오직 외신, 아우터갓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현재 인간의 형상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몸에 익숙하지 않은 외신들은 제대로 힘을 사용할 수 없었고, 그 탓에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는 아우터갓도 있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아우터갓이라도 그 정도 피해를 입는다면 꽤나 긴 시간을 들여야만 회복이 가능하니, 더 이상 이 전쟁에 끼어들 수는 없으리라.
‘설마 저 정도의 여력을 남겨뒀을 줄은!’
디엔드라는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했다.
그의 한쪽팔도 녹아서 사라진 탓에 제대로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피해를 입은 건 디엔드라만이 아니다.
다른 외신들도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슈브니구라스!”
“나도 알고 있다.”
다른 외신들과 달리 슈브니구라스는 비교적 무사한 모습이었다.
입구에 대기하던 외신들은 디엔드라가 강한 이들로 선별해둔 탓에 루시퍼의 무차별적인 공격에도 대부분 멀쩡했다.
문제는 주변 지형이 모조리 날아가 버린 탓에 애써 구성하고 있던 덫과 진형이 모조리 파괴되었다는 점이다.
‘저 빌어먹을 놈. 그때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구나.’
슈브니구라스는 이를 바드득 갈며 하늘에 떠 있는 루시퍼를 올려보았다.
그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설마 이정도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을 줄이야.
이미 벌어진 일, 후회해 봤자 늦다.
그보다 지금 다가오는 기척들에게 집중하는 게 중요했다.
“아버지께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슈브니구라스의 외침에 무사한 외신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디엔드라가 선별한 외신들 중에서도 특별한 힘을 지닌 이들.
이젠 더 이상 하찮은 마물들은 쓸모가 없었다.
소수의 그레이트 올드원과 외신들만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빛을 견디며 싸울 수 있었다.
그만큼 강대하고 위대한 신들이 벽처럼 무명의 방으로 통하는 입구를 막았다.
근처까지 도달한 세한은 그 신격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대략 다섯.’
숫자는 적지만 이곳에 오며 만났던 아우터갓들보다 훨씬 강한 힘이 느껴졌다.
「갸아아아아아──!!」
인간의 형상을 한 존재에게서 나올 수 없는 비명과도 같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장 선두에 선 ‘인간’의 입에 검은 빛이 모여들며 부풀어 올랐다.
“니라카스!”
그것을 본 이드라가 소리쳤다.
“아는 녀석이냐?”
“슈브니구라스의 동생이다!”
“그럼 강한 놈이겠군.”
하기야 이곳에 어중이떠중이를 놔뒀을 리는 없었다.
가득 모여든 검은빛은 대화하고 있을 틈도 없이 정면을 향해 쏘아졌다.
세한이 그것을 막으려고 하자, 언제 다가왔는지 신자운이 끼어들었다.
‘확실히 저건 나보다 저놈이 낫겠네.’
저런 단순한 힘 대 힘의 싸움이 되면 세한보다 신자운이 나았다.
그는 상대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하니까.
“후우.”
그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뒤로 당겼다.
모든 걸 소멸시키며 다가오는 검은 재앙을 상대하기엔 참으로 보잘 것 없어보였다.
그러나 세한은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저런 단순한 공격은 신자운에게 있어 무엇보다 좋은 먹잇감이었으니까.
후우웅!!
지척까지 다가온 검은 빛줄기를 향해 신자운의 주먹이 뻗어졌다.
겉으로만 보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하찮게만 보였던 그의 주먹에 니카라스의 힘이 휘감겼다.
검은 빛은 신자운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비틀렸고, 점차 역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자젤의 힘이 섞여 완전해진 신자운의 카운터가 빛을 발했다.
「……!!」
그 기이한 움직임에 니카라스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콰콰콰콰쾅!!
신자운의 카운터가 작렬하며 폭음이 울려 퍼졌다.
어마어마한 위력이었지만, 이정도 위력으로는 외신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다가오던 외신들의 발을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드라!!”
신자운의 반격에 외신들이 주춤한 틈에, 세한은 입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른 외신들이 반응하기 전에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서다.
입구에 도달한 세한은 곧바로 땅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세한을 중심으로 둥근 벽이 세워지며 다가오던 외신들의 시야를 차단했다.
“그럼 문을 열도록 하마.”
이드라가 양손을 앞으로 뻗자 그녀의 가슴 앞에 허수공간이 열리며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나타났다.
웅웅웅!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회전하며 각 모서리가 오색찬란한 색깔로 물들었다.
“이드라, 네가 감히,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세한이 만든 벽을 으스러트리며 디엔드라가 나타났다.
그의 등 뒤에는 일찍이 보았던 흉측한 촉수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이드라가 이죽거렸다.
“이 상황에서도 인간의 모습인 걸 보면, 아버지의 금제가 강력하긴 한 모양이로구나.”
“닥쳐라! 왜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 않는 거지? 문을 열어 무엇을 하겠다는 거냐!”
“딸이 아버지를 뵙는데 이유가 필요하나?”
“아버지는 신이다!”
전지전능한, 무한한 힘을 지닌 절대자.
외신이라 불리던 이들조차 칭송하던 가장 위대한 존재.
그것이 아자토스다.
인간의 모습에 심취에 그런 당연한 사실조차 잊어버린 건가?
이드라는 자신을 노려보는 디엔드라를 고요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답했다.
“나의 신은 아버지가 아니다.”
쿠웅!!
오색으로 물든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지금까지 어떤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던 ‘입구’가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닿자 마치 융해되는 것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디엔드라는 눈이 뒤집혔다.
“이 미친년이!!”
“오, 인간의 욕설을 제법 구사할 수 있게 되었구나.”
깔깔 웃는 이드라와 더 이상 대화를 해봤자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디엔드라가 촉수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다른 외신들도 일제히 세한을 향해 접근했다.
가장 앞에 선 건, 이미 몇 번이나 굴욕을 맛본 슈브니구라스였다.
“너희를 보낼 것 같으냐?”
검은 반점이 지면을 타고 퍼지며 수많은 눈동자가 생겨났다.
눈동자들이 깜박이며 세한과 이드라를 응시했다.
둘을 응시하던 눈동자의 보라색으로 변하며 무수한 광선을 쏘아냈다.
콰콰콰콰!!
그러나 그 광선은 둘의 몸에 닿기 전에 만들어진 투명한 육각형 형태의 장벽에 모조리 튕겨나갔다.
그뿐 아니라 슈브니구라스와 다른 외신들에 튕겨져 역으로 피해를 입혔다.
“티페레트…….”
세한과 다른 일행들을 감싼 육각형의 장벽에 지수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직접 몸으로 경험해 보았으니까.
루시퍼가 가진 세피로트의 열매 중 하나.
모든 걸 반사하는 장벽 티페레트다.
“…….”
검은 날개의 천사가 그들을 비호하듯 머리 위에 떠있었다.
겉으로는 알기 힘들었지만 지수는 그가 상당히 지쳐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루시퍼라도 외신들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큭!”
루시퍼만이 아니다.
다른 악마들의 상황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한번 공격이 튕겨졌다고 멈출 외신들의 공격이 아니었기에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외신들의 파상공세를 온몸으로 막아내야만 했다.
그나마 루시퍼나 벨제부브는 지닌 권능부터가 사기적이라 버틸 수 있었지만, 신자운이나 마라 파피야스, 그리고 아바돈은 점점 힘이 부치는 게 눈에 보였다.
이대로라면 문을 여는 것보다 빠르게 방어선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
어떻게 해야 될까.
문을 여는 것에 집중한 세한과 이드라는 움직일 수 없다.
린이 몸을 움찔 거리며 리브라를 움켜쥐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잘못하면 합류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우우웅!!
지수는 눈을 감고 ‘열쇠’에 집중했다.
‘마왕이 있는 곳이 바로 마계.’
루시퍼는 그렇게 말했다.
악마들은 마계에서 전력을 다할 수 있다고.
그건 열쇠의 힘이 아니라 마왕의 힘이다.
그렇다면, 열쇠의 힘을 이용해 그런 마왕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오?”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린 건 지수의 가장 곁에 있던 벨제부브였다.
힘이 유동에 민감한 그는 자신이 서 있는 대지가 마계에 있을 때보다 더욱 큰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데?”
벨제부브는 씩 웃으며 정면에 있는 붉은 외눈의 외신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서로 양손을 맞잡고 힘겨루기를 하던 형태였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우두둑!!
외신의 팔이 뒤틀렸다.
방금 전까지는 비등했던 힘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캬아아악!!”
루시퍼를 상대하던 슈브니구라스의 입에서 변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반신이 게브라의 불꽃에 녹아내린 탓에 큰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힘이, 더 강해졌다고?’
지속된 힘의 사용으로 루시퍼는 조금씩 지쳐갔고, 슈브니구라스는 그 틈을 노려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소모되었던 루시퍼의 힘이 회복됐다.
그뿐 아니라 더욱 강해졌다.
‘……이 힘은 대체?’
디엔드라 역시 상황이 급변하는 걸 느꼈다.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던 악마들의 방어선이 단번에 굳건해졌다.
원래부터 강했던 루시퍼와 벨제부브만이 아니라 신자운과 마라 파피야스, 그리고 아바돈도 외신과 동등한 힘을 내고 있었다.
“안 돼.”
질리는 없다.
갑자기 왜 강해졌는지는 모르지만 이제야 겨우 동수를 이루는 수준이었으니까.
“안 돼, 안 돼, 안 돼!”
그러나 문제는 동수를 이뤄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구축한 방어선을 부수고 문을 여는 걸 막아야 한다.
‘막을 수 없어.’
디엔드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힘의 균형이 평행선을 이루게 된 이상, 이제 문을 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아버지 아자토스여…….’
만약 그들이 본체로 싸울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또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신에 갇혀 전력을 다할 수 없었다.
아자토스처럼 큰 힘을 제약당한 건 아니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몸이라는 건 그것만으로 큰 족쇄다. 그 차이가 이 상황을 만들었다.
‘이번만큼은 당신이 틀렸습니다.’
콰아아아아!!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파고든 땅이 용해되며 세한의 몸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반경은 대략 세한을 중심으로 5미터.
무명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린 것이다.
늪에 빠진 것처럼 점차 몸이 빠르게 가라앉자 세한은 이제 이곳에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죽지마라!!”
세한은 주변에서 싸우고 있는 악마들을 향해 외쳤다.
이미 몸이 가슴까지 빠져들었기에 다른 말을 할 틈은 없었다.
곁에 있는 지수와 린에게 한번 시선을 마주친 세한은, 곧바로 물렁해진 지면 속으로 사라졌다.
‘아.’
방금 전까지 귓가에 시끄럽게 울려 퍼지던 폭음이 단번에 멎으며 순식간에 풍경이 달라졌다.
‘여긴…….’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세계.
세한은 고개를 움직여 린과 지수가 잘 따라왔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둘은 세한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 둘도 설마 입구가 이런 식으로 되어있을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모양이었다.
여유로운 건 오직 세한의 어깨에 매달린 이드라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외신들과 싸우던 게 꿈이었던 것처럼, 셋은 천천히 새하얀 물속에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들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지자 평범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저긴가.’
온통 새하얀 색이었기에 눈으로는 위치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자토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신격이 이정표가 되었다.
고요하게 흘러나오는 아자토스의 신격을 쫓자, 어느 순간 투명한 벽과 같은 게 만져졌다,
그다지 두텁지 않은 투명한 장벽.
세한은 이 너머에 아자토스가 있음을 깨달았다.
가장 위대한 신이었던 자가.
‘이제…….’
세한은 투명한 장벽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고.
‘단 한 번.’
그 한 번의 싸움으로 모든 게 결판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