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
302. 무명(無名)의 방(2)
흉흉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거대한 둔기를 쥔 검은 짐승이 마구잡이로 달려 나간다.
앞에 있는 것이 마물이든, 혹은 아우터갓이라 할지라도 전혀 상관없다는 듯.
검은 짐승은 울부짖으며 가장 앞에 있던 괴물을 향해 덤벼들었다.
가장 앞에 있던 아틀락 나챠라 불리는 거미신이었다.
하체는 끔찍한 괴물의 모습으로, 상체는 인간 여성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으지직!!
그러나 검은 질풍이 스쳐지나가자 말 그대로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나뒹굴었다.
어떻게 저항해 볼 수도 없는 압도적인 힘.
인류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도 파리처럼 짓뭉개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어디서 이런 것들이 튀어나온 거야?’
갑작스런 슈브니구라스의 요청에 급히 입구로 온 툴차는 앞에서 날뛰는 검은 짐승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둔기가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거대한 마물과 그레이트 올드원들이 부서져 날아갔다.
‘저게 다른 우주에서 온 생명체라고?’
툴차는 외신이다.
그것도 아자토스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는 외신 중 하나였다.
비록 아자토스의 전속 무희에 불과했지만, 엄연히 외신인 만큼 어지간한 신들과는 격이 달랐다.
다른 우주에서 온 존재들이라고 해봐야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하지만 그 생각은 눈앞의 광경에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쉬이이잉!! 콰콰콰콰쾅!!!
거센 파공음이 울리며 하늘에서 거대한 물체가 마구잡이로 떨어졌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었건만 갑자기 만들어진 날카로운 기둥이 운석처럼 떨어지며 사방을 초토화시켰다.
“이드라!”
툴차는 익숙한 신격에 시선을 돌렸지만, 그곳에 있는 건 이드라가 아니었다.
검은 날개를 펼치고 하늘위에 떠 있는 남성이 이드라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툴차는 지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아자토스는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으며, 지구에 다녀온 다른 외신들도 말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툴차는 무척 낯설었다.
‘이런 건 미리 말해줬어야지!’
아자토스의 명에 의해 다른 아우터갓처럼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한 툴차가 분개하며 발을 굴렀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들의 돌파에 그대로 뚫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앞으로 가게 둘 수는 없지.”
슈브니구라스의 말에 따르면 저들은 무명의 방을 향해 가고 있다고 했다.
만약 저들이 그곳에 도달하기라도 한다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아자토스가 크게 분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만 했다.
고오오오!!
그녀는 발을 움직이며 빙글빙글 회전했고, 그에 따라 심홍색 불꽃이 회전하며 타올랐다.
불꽃은 곧바로 불의 기둥이 되어 지상과 하늘을 잇는 거대한 재앙이 되었다.
“키에에에!!”
불의 폭풍에 휘말린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재로 변했지만 툴차의 춤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춤은 현재 지상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재로 만들기 전까지 끝나지 않으리라.
“──!!”
불꽃의 기둥을 향해 덤벼드는 검은 짐승의 모습이 툴차의 눈에 들어왔다.
‘재가 되고 싶었던 건가?’
툴차의 불꽃은 평범한 불꽃이 아니다.
그녀의 불꽃은 루시퍼가 사용하는 게브라와 비슷했다.
무엇이든 불살라 버리는 불길.
닿는 즉시 재로 만들어버리는 극양의 힘이 담겨 있었다.
콰아아아!
그렇기에 그 불꽃을 뚫고 누군가가 침입한다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설령 다른 아우터갓이라고 한들, 툴차의 불꽃을 견딜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렇게 맨몸으로 돌파한 자는 처음이었다.
‘불타지 않아?!’
자신의 권능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인가, 순간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툴차를 향해 뻗어지는 손은 불타고 있었다. 재가 되어 부스러졌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재생했다.
불타고, 재생하고, 불타고 재생하며.
툴차의 앞에 다가온 검은 짐승이 흉흉한 철퇴를 휘둘렀다.
“칵!!”
툴차의 몸이 단번에 두 동강나며 상체는 하늘로, 하체는 지면으로 나뒹굴었다.
하늘을 향해 치솟던 불꽃이 사라지며, 뜨거운 열기만이 대지를 녹였다.
‘재, 재생속도가 저게 말이 돼?’
하늘로 날아갔던 상반신이 뚝 떨어지며 툴차는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이미 자신의 몸을 찢어버린 상대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인간의 몸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쉽게……!!”
와자작.
전신에 불꽃을 일으키며 소리치던 툴차는 검은 짐승, 지수의 발아래에 짓밟혀 뭉개졌다.
‘괴물치고 말을 잘하네.’
툴차가 들었다면 굴욕감에 몸을 떨었겠지만 지수는 그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앞을 막아선 괴물중 하나인가 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동안 그녀가 싸워왔던 외신들보다 훨씬 약한 탓에 지수는 툴차가 외신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불쌍한 녀석이네.”
당연히 세한은 툴차에 대해 알고 있었던 터라 지수의 발에 뭉개진 불쌍한 아우터갓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툴차가 전투에 능한 외신이 아니라지만 길가의 벌레마냥 짓밟고 지나가 버리다니.
“어차피 죽지도 않았을 테니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보다 앞을 봐라!”
이드라가 작은 손을 흔들며 소리치자, 투명한 장막이 만들어지며 빙글빙글 회전했다.
톱날처럼 회전한 장막은 좌우에서 덮쳐오던 괴물들을 마구잡이로 갈아버렸다.
순간적으로 뻥 뚫린 정면을 바라보자, 이드라가 말했던 ‘입구’가 어렴풋이 보였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입구에 도달한다.
조금씩 다가갈수록 적들의 저항도 거세졌다.
아우터갓의 숫자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쪽을 관망하듯 지켜보던 이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비켜!!”
벨제부브가 앞에서 달려드는 하스터를 주먹으로 마구잡이로 후려쳤다.
처음에만 해도 바람에 찢겨지던 피부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하스터의 힘을 흡수한 모양인지, 도리어 하스터가 벨제부브에게 밀리고 있었다.
쉬이익!!
금색의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수많은 괴물의 무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아직 린은 본래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존재들은 상대할 수 있었다.
신자운과 마라 파피여스도 제 자리를 지키며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쓰러트렸다.
아무리 다른 이들에 비해서 약하다지만 엄연히 7대 악마였기에 제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었다.
“큭!!”
그런 광경들을 지켜보던 슈브니구라스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디엔드라의 말이 맞았다. 놈들은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외신이라는 자들이 대체 뭘 하는 거냐!”
가장 앞에서 질주하는 마왕이 길을 뚫었고, 세한이 그것을 보조하며 길을 넓혔다.
그리고 이어서 따라오는 악마들이 덤벼오는 마물이나 외신을 상대했으며, 뒤쫓는 무리들은 여신의 검이 심판을 가했다.
처음에는 비교적 느렸던 속도도 점점 빨라져, 입구에 도착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디엔드라!!”
“흥분하지 마라, 슈브니구라스. 당신처럼 강한 신까지 인간의 감정에 휘둘리게 되면 끝이야.”
슈브니구라스와 디엔드라는 현재 입구에 있었다.
저들이 이곳에 올 것이라 예상한 만큼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정도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아무리 놈들이 대단해도 이 정도라면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디엔드라의 가슴을 적셨다.
이만한 준비를 했는데, ‘설마’ 뚫리지는 않겠지.
그런 작은 의문이, 의심이 그의 생각을 좀 먹었다.
‘슈브니구라스의 기운이 느껴진다.’
디엔드라가 불안감에 휩싸여있을 때, 세한 역시 그들의 기척을 느꼈다.
분명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디엔드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아 슈브니구라스와 함께 있는 게 분명했다.
“……이곳에 없다는 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다른 아우터갓을 모아두고 말이야.”
이드라 역시 어느 정도 예상한 모양이다.
현재 우리를 습격하는 아우터갓들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마물들의 질도, 그레이트 올드원들도 대체로 그저그런 수준이었다.
툴차 같이 멋모르고 나온 아우터갓이나 하스터 같은 강자들도 간간히 섞여있었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생각보다 거센 우리의 저항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애초에 본체로 와도 모자란데 인간의 몸에 익숙하지 않은 놈들이 우리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쏟아져오는 괴물들 대부분이 단순한 시간벌기용이라는 뜻이다.
입구에 덫을 놓기 위한 시간을.
“되도록 이렇게 되지 않기만을 바랐지만 말이야.”
“디엔드라는 영악한 녀석이니 어쩔 수 없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입구에 도달하게 되더라도 쉽사리 돌파하기 힘들 것이다.
설령 입구를 돌파하더라도 상당한 힘을 소모하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아자토스와의 싸움이 어려워질 게 분명했다.
“괜찮습니다. 그대로 가십시오.”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루시퍼가 내 곁으로 날아왔다.
그는 여태 하스터를 비롯한 여럿의 아우터갓을 견제하고 있었지만, 크게 힘을 사용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다른 걸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입구에 들어가는 것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그의 검은 날개에 막대한 신격이 모이고 있었다.
그동안 적당히 싸우며 힘을 계속 축척시켜 왔던 모양이다.
즉, 루시퍼는 모든 걸 자신들에게 맡기고 강행돌파를 하란 소리다.
“……위험할 텐데?”
“하.”
세한의 말에 루시퍼는 피식 웃었다.
“김세한. 저는 오만의 악마입니다.”
기나긴 시간 동안 마계의 정점에 위치했던 악마.
모든 힘을 개방한 아자젤이 아닌 한 그를 이길 수 있는 악마는 없었다.
그것이 ‘오만’의 자격이었다.
수많은 이들에게 군림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지닌 자만이 오만의 좌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루시퍼는 가장 긴 시간 동안 오만의 좌에 있었던 악마다.
“가십시오.”
루시퍼는 더 말하지 않았다.
세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한 일이었지만 다른 동료들에게 뒤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입구를 뚫고 들어간다고 해도 아자토스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본말 전도였으니까.
“한지수! 린!”
세한은 둘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더 이상 날뛸 필요는 없었다. 둘은 세한이 부르자마자 빠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왜 부른 건지는 묻지 않았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짐작한 것이다.
13장의 검은 날개를 펼친 루시퍼가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걸.
“열한 번째, 다트(Daath).”
그의 중얼거림과 함께 세계가 일변했다.
폭발하는 신격이 세계의 색체를 변화시키며 모든 사상과 개념, 그리고 법칙을 파괴시켰다.
활짝 펼쳐진 그의 검은 날개가 불타오르며 루시퍼의 동공이 찬란한 오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지수는 저 모습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슈브니구라스와 루시퍼가 싸울 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력이 아니었던 모양이네.’
언제나 자신에게 충성하는 그였기에 잊고 있었지만, 그는 정말로 강한 악마였다.
비교적 단순한 성정이었지만 그의 단순함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케테르, 호크마, 비나.”
루시퍼가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짓에 따라 둥근 구체, 마치 열매와 같은 무언가가 떠올랐다.
“헤세드. 게브라, 티페리트.”
다음은 왼팔, 마찬가지로 세 개의 구체가 떠오르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저 열매들이 바로 루시퍼가 가진 권능.
세피로트 나무의 열매.
“네차흐, 호드, 예소드.”
오래전 천사들이 살았던 땅에 있었다는 세피로트의 나무.
루시퍼는 그것을 자신의 몸에 담았다.
그리고 그 힘을 사용해 오만한 천사들을 떨어트리고 자신도 마계에 투신했다.
“──말쿠트.”
최후의 세피라가 입에 담기는 동시에.
별이 흔들렸다.
아자토스의 옥좌가 떨리며 대지에 발을 내딛고 있던 이들의 몸이 떠올랐다.
콰아아앙!!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있다.
세한은 지금 보이는 광경이 딱 그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늘과 땅이 부서졌다.
만약 이곳에 아자토스의 옥좌가 아니었다면 별과 함께로 모든 것이 사라졌을 정도의 충격이다.
어째서 루시퍼가 지구에서 온전한 ‘다트’를 사용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오색의 빛이 세상을 물들인 순간.
인간의 육신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분쇄됐다.
세한은 전속력으로 입구를 향해 질주했다.
지수도, 린도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앞에 막는 것만 없다면 입구에 도달하는 건 찰나로 충분했다.
‘가라, 까마귀.’
루시퍼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양팔을 펼쳤다.
그의 등 뒤로 작은 태양과도 같은 구체가 타오르고 있었다.
다섯 번째, 게브라다.
열한 번째 다트는 다른 세피라들의 힘을 극도로 강화시켜 준다.
본디부터 태양의 열기를 품은 게브라였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작은 태양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은 태양이 남색의 하늘을 밝히며, 온 대지를 불살랐다.
신이었던 인간들이 재가 되어버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