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297화 (297/332)

# 297

297. 끝을 향한 준비(4)

내가 지수와 약혼했다는 사실은 금방 일파만파로 퍼져갔다.

특별히 내가 말하고 다닌 건 아니다.

하지만 로키에게 조언을 구한 상태인데다, 입이 싸디 싼 민아가 옆에 듣고 있었으니 소문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나도 어느 정도는 각오한 부분이었기에 감내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마다 흐믓한 얼굴로 바라보니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었다.

“오빠, 어때요? 예쁘죠?”

묘하게 부끄럽고 쑥스러운 나와 달리 지수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특히 지수는 길드로 돌아오자마자 잽싸게 이드라에게 달려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여줬다.

“참 성질머리가 고약한 계집애로다.”

그런 지수의 모습에 이드라는 툴툴 거렸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역시 조금은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손가락이 비어서 어떡하지? 춥겠어요.”

“이게 진짜…….”

지수도 지수대로 이드라가 계속 신경 쓰였던 거겠지.

반지를 받자마자 저렇게 놀리는 걸보면 그래도 지수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 같아 조금 뿌듯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지수가 좋아하는 걸보니 나도 나쁜 기분은 아니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마무리를 지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티격태격 싸우는 지수와 이드라를 보던 나는, 벽에 걸린 달력에 시선을 돌렸다.

‘이제 2주 정도 지났나…….’

지구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권에 돌입했다.

도시는 대부분 복구되었고, 르뤼에로 대피했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게임 시스템이 사라진 세계를 조금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건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게임 이전의 세계와는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이전과 닮아갈 테지.

그리고 그런 미래가 오려면, 아직 마무리 지을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한지수.”

“네?”

이드라는 지수에게 양팔을 잡힌 채 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나름 반격을 해보려했던 모양이지만 신체능력이 햄스터와 드래곤 정도로 차이 나는 둘의 신체능력상 이드라가 지수에게 반항하는 건 무리였다.

나는 그런 둘의 모습에 피식 웃은 후, 말을 이었다.

“악마들을 모아줄 수 있어?”

“예. 얼마든지 가능해요.”

그렇게 말한 지수는 또 무슨 일인가 싶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전에도 말했잖아.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라고.”

“……아자토스 말인가요.”

“그래.”

외우주로 도망친 외신의 왕.

놈을 죽여야지만 이 일이 끝날 것이다.

‘그리고 아자토스만이 아니라…… 아니. 그건 확실하지 않아.’

나는 인벤토리에 있는 시스템의 반쪽을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자토스를 죽이고 시스템을 파괴하면 진정으로 세계는 자유를 손에 넣게 되리라.

***

이드라의 말에 의하면 아자토스에게 부여된 필멸의 힘은 길면 몇 년, 짧으면 한 달 안에 사라진다고 했다. 물론, 한 달 안에 사라질 확률은 지극히 희박하다.

요그소토스조차 죽였던 1회차 이드라의 힘이니 아자토스라고 해도 쉽게 벗어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여유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제든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고 움직여야하는 만큼, 최단 기간을 예상하고 계획을 짤 필요가 있었다. 여유부리다가 아자토스가 필멸의 힘을 극복하게 된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는 정말 종말밖에 없었다.

이제 겨우 세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왕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약혼하셨다지요?”

지수에게 부탁하여 7대 악마들을 디어사이드 건물로 부르자, 가장 먼저 도착한 루시퍼가 그런 말을 해왔다.

“……왜 내게 존댓말을 하는 거지?”

“마왕님의 부군이 되실 분이니, 존칭을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허리를 깊게 숙이는 루시퍼에게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살다 오만의 악마에게 존칭을 들을 줄은 몰랐다.

참으로 ‘오만’이라는 이명이 어울리지 모습이다.

“다른 신들은 부르지 않은 건가?”

루시퍼 다음으로 길드에 도착한 건 신자운이었다.

녀석은 현재 우리가 있는 회의실에 다른 길드원이나 신이 없는 게 의아했던 모양이다.

“되도록 비밀로 일을 진행하려고. 어차피 신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아. 외우주에 가게 되면 권능도 약해질뿐더러, 눈에만 띄거든.”

나는 대놓고 정문으로 쳐들어갈 생각 따위는 없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아자토스만 처리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아자토스를 은밀하게 죽일 수 있을 턱이 없긴 하지만.’

하지만 적어도 녀석이 있는 장소에 돌입하기 전까지는 눈에 띌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 아자젤의 상태는 어때?”

“마왕 덕에 상태는 호전됐고, 지금은 말 그대로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아자토스에게 반격할 기회를 얻은 것 자체가 아자젤이 자신의 전력을 불태워가며 싸워 얻은 거니까.

비록 이번 싸움에 아자젤과 함께하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이미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신자운 녀석 성격상 아마 계속 자기가 돌보려 할 테지.’

무뚝뚝한 얼굴을 했지만 참 솔직한 녀석이다.

나도 이런 솔직함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나중에 돌잔치하면 불러라.”

“?”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자 신자운은 형용하기 힘든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그럼 다들 모였나.”

대략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회의실에 들어온 건, 총 일곱 명이었다.

오만의 악마 루시퍼.

폭식의 악마 벨제부브.

분노의 악마 신자운.

색욕의 악마 마라 파피야스.

질투의 악마 아바돈.

그리고 정의의 여신인 린과 마왕인 지수까지.

지수는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섰고, 나머지는 저마다 어색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한 곳에 앉아있는 게 영 뻘쭘한 인상이었다.

하기야 7대 악마씩이나 되는 이들이 이렇게 오순도순 앉을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내가 왜 불렀는지는 알겠지?”

“아자토스 때문이겠지.”

내 말에 벨제부브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그래서 우리를 부른 거 아닌가? 외신을 상대할 전력은 현재 이 우주에서 악마들밖에 없으니.”

“외우주에서 제대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악마뿐이니까.”

신은 자신의 신앙이 모였던 별에서 최고치의 보정을 받는다.

게임 지구에 유독 지구의 신들이 많았던 것도 그런 이유이며, 퍼블리셔와의 정면대결에서 망설임 없이 지구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반면 악마는 마계를 벗어나면 자신이 가진 힘을 전부 사용하지 못한다.

아니, 이제는 못했다고 해야겠지.

“루시퍼가 이전에 말했던 그대로라면 너희는 마왕의 곁이면 언제나 전력을 낼 수 있다고 했다. 확실하지?”

“그렇습니다. 마왕이 있는 곳이 바로 마계이기 때문이죠.”

그건 단순한 열쇠의 힘이 아닌, 마왕이 지닌 권능 그 자체다.

모든 힘은 지수에게 계승되었고, 그것은 이전에 아자토스와 싸울 때 증명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자젤이 전력을 낼 수 있었을 리 없으니까.

“그럼 이 정의의 여신은 괜찮나? 이쪽도 데려가면 빌빌 거리는 거 아니야?”

벨제부브는 힐끗 린을 보았다.

근육질의 거한이 자신을 바라보자 린은 조금 찔끔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쟤가 너보다 쌔니까 신경 쓰지 마라.”

“……뭐? 저 꼬마가?”

벨제부브는 내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확실히 이전에 외신을 상대할 때 조금 보기는 했다만 그 정도까지는…….”

“그만.”

벨제부브가 뭐라 말을 하려하자 루시퍼가 단칼에 끊어버렸다.

그는 스산한 얼굴로 벨제부브를 응시했다.

“왕의 어전이다. 건방진 말을 삼가라.”

“잘했어요, 루시퍼.”

지수는 그런 루시퍼에게 싱긋 웃으며 칭찬했고, 루시퍼는 송구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그 옆에 앉은 벨제부브는 진심으로 서럽다는 얼굴로 입을 꾹 닫았다.

“그럼 이렇게 전부 외우주로 간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냐?”

일련의 상황을 재밌다는 얼굴로 지켜보던 마라 파피야스가 말했다.

“그건 이제 정해야지.”

“솔직히 나나 이쪽의 두 명은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만.”

마라 파피야스는 자신의 곁에 있는 아바돈과 신자운을 가리켰다.

그들도 내심 공감하는지 마라 파피야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쓰러트리려는 건 아자토스지만, 그 전에 무슨 사태가 터질지 모르니 전부 가는 게 옳아. 그래도 일반적인 외신은 상대할 수 있잖아.”

“그야 그렇다만. 흠, 나는 전투가 전문이 아니라서 말이야.”

마라 파피야스는 색욕의 악마다.

아름답고 군중을 다루는 것에 능하지만 동급의 외신들에겐 아무래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지수가 마계를 순회할 때 냅다 도망가지 않았던가.

아바돈은 아자젤의 피를 받기는 했지만 아폴론의 그림자였고, 신자운은 분노의 악마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란히 앉아 있는 신자운과 아바돈을 보자니 꽤 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산에서 신자운이 고전할 때 아바돈이 와서 구해줬었지.’

혹시 몰라서 올림포스에 준비해 두라고 했었지만, 그래도 적절하게 도와줘서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부산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으리라.

‘그런 걸 생각하면 역시 다 데려가는 편이 좋겠지.’

당장 약한 아바돈도 최상급 신격을 지닌 존재를 처리할 정도는 된다.

마라 파피야스 본인은 도움이 안 된다고 하지만 외신들도 전부 강한 건 아니다.

뭣보다 외신들 중 강자라고 할 수 있는 슈브니구라스나 노스이디크, 그리고 디엔드라 같은 이들은 이전의 싸움의 영향 때문에 힘이 전부 회복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외우주로는 어떻게 이동할 생각인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아무리 저희라도 외우주로 가는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만.”

마왕인 지수가 두 눈을 새빨갛게 뜨고 있으니, 차마 갈 수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루시퍼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보다 건설적인 질문을 해왔다.

“그건…….”

“그건 신경 쓸 필요 없다.”

그 질문에 답한 건 내가 아니었다.

뒤늦게 회의실로 들어온 이드라가 지수의 옆에 서며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손바닥의 위에는 검은 부등변다면체, 일명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이걸 사용해 게이트를 열 생각이다. 아버지가 현재 있는 장소라면 내가 알고 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건 열쇠의 모형에 불과할 텐데?”

“그래, 그랬었지. 니알라토텝이 이 우주의 열쇠를 흉내내어 만든 모조열쇠. 모형에 불과했던 물건이지만 이젠 아니다.”

다른 이들이 세계의 복구에 주력하는 동안 이드라는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개조시켰다.

바로 내가 가진 시스템의 반쪽을 사용해서.

“비록 반으로 나뉘었지만, 전지전능의 힘이 담긴 핵이다. 이것이라면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또 하나의 열쇠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지.”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꿈의 마녀다. 그것이 된다고 망상할 의지만 있다면 가능하게 만들 수 있도다.”

이드라는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이전의 이드라라면 솔직히 무리인 이야기였을 거다.

그러나 나와 합신하면서 1회차 이드라가 지녔던 힘까지 완벽하게 해석한 그녀는 지닌바 힘이 한층 발전해 있었다.

“보다시피 이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사용하여 우리는 외우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 거다. 이드라의 말에 따르면 아자토스가 있는 장소 근처에 대략 네 명의 외신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군.”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넷 중에 요그소토스가 없다는 점이다.

다시 한번 1회차 이드라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그소토스는 모든 시간대에 단 하나만이 존재하니까.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그곳까지 도달하기 위한 보험이라는 건가.”

진지한 어조로 말하는 벨제부브에게 나는 가볍게 수긍했다.

그들에게는 굴욕적인 말일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자토스는 시스템의 핵과 열쇠의 반쪽을 지녔다. 녀석과 싸울 수 있는 건 마찬가지로 열쇠를 지닌 이뿐이야.”

열쇠가 없으면 그 힘에 저항조차 할 수 없다.

아자젤과 같이 무한의 가능성에 발을 내딛지 않는 한.

열쇠를 다룰 수 있는 건 마왕인 지수와, 이드라와 합신한 나.

그리고 메리수 특성을 지닌 린뿐이다.

“되도록 조용히 진입하면 베스트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단순히 최악의 사태를 예견하는 게 아니라 아자토스가 자신이 있는 장소에 어중이떠중이들을 뒀을 리 없다.

필멸의 저주를 받는 신의 마음은 지금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