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
295. 끝을 향한 준비(2)
갑작스런 지수의 제안에 나는 당혹스런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방금 전에 아자젤과 신자운의 돌잔치를 떠올리며 웃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웃고 있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지수와 결혼을 한다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잖아.
“음? 결혼 말이냐?”
적당히 지수를 구슬려 보낸 후, 내가 부른 건 이드라였다.
우선 나와 가장 깊은 감정교류를 보낸 인물 중 하나였고, 꼭 말해야 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드라의 반응은 내 예상보다 무척 담백했다.
과연 올 것이 왔군, 이런 얼굴이라고 할까.
“뭐냐, 그 얼굴은. 혹시나 내가 질투해 주길 바란 게냐?”
“특별히 그런 건 아니긴 하지만…….”
“아님 내 마음에 대한 걱정인지도 모르겠구나. 후후, 이쪽은 특별히 걱정할 필요 없다.”
이드라는 진심으로 아무래도 좋아 보였다.
그런 이드라의 반응이 나는 도리어 어색했다.
녀석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했고, 합신했을 당시 감정이 뒤섞인 덕에 이드라가 나를 성애적인 관점에서도 마음이 있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이런 그녀의 반응은 정말 예상외였다.
“인간의 도덕심은 촛불과도 같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지금은 인간의 도덕심을 가지고 있다지만 얼마나 그게 얼마나 간다고 생각하느냐? 수백 년이 지나게 되면 그런 것도 흐려질 수밖에 없을 게다.”
“갑자기 무서운 소리하지 마라.”
“먼 미래는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그렇게 말한 이드라는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장난을 치는 뉘앙스는 아닌지라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너는 결혼을 하는 거에 동의한다는 거지?”
“그대가 고리타분한 순서 같은 것에 신경이 쓰인다면 다른 방법도 없는 건 아니다.”
“뭔데?”
“내참, 인간이 외신에게 이런 걸 묻다니. 보통 이런 건 인간 쪽이 더 해박할 텐데 말이야.”
그렇게 말해도 난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이런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이 세계가 뒤집히기 전까지 사람들과 그다지 어울리지도 않고 게임이나 하던 아싸였는데, 이런 걸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그 아이는 단지 너와의 관계를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을 뿐이다. 그 마음을 달래주기만 하면 충분할 게다.”
“그래서 방법이 뭐냐니까.”
“약혼을 하면 된다.”
이드라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내가 앉아 있는 책상에 허리를 숙이고 턱을 괴며 말했다.
“제대로 마음을 전한 적도 없을 것 아니냐? 고백과 반지를 건네주면 딱 좋겠구나.”
“…….”
그 말에 나는 단번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았다.
반지와 고백이라니. 그걸 할 바엔 차라리 이미르와 한 번 더 싸우는 게 날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 그대와 나는 마음이 연결되어 생각을 읽고자 한다면 읽을 수 있다는 걸 알 테지?”
“그래서 서로 읽지 말기로 했잖아. 설마 지금…….”
“굳이 읽지 않아도 안다. 그런 걸 할 바엔 이미르와 한 번 더 싸우겠다는 얼굴이었으니.”
“……진짜 안 읽은 거 맞냐?”
“맹세코.”
진짜인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정확하게 짚어내는데.
아무튼 이드라가 말한 것처럼 이 난감한 상황을 타파하려면 약혼을 하는 게 가장 적절한 수단인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평화롭지만, 이것도 길지 않았으니까.
“……정말로 한 번 더 싸우게 될 수도 있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이미르…… 아니. 아자토스 말이야.”
아자토스를 언급하자 싱글싱글 웃고 있던 이드라의 미소가 굳었다.
역시 외신인 이드라로선 아자토스는 두렵고 또 두려운 존재인 모양이다.
“아버지는 확실히 포기하지 않았을 게다.”
“알아.”
“……1회차의 내가 만들어낸 필멸의 파편이 박힌 탓에 지금은 물러났지만 그 시간을 길지 않을 테지.”
“대략 어느 정도?”
“모른다. 1년은 가리라 생각한다만 더 짧을 수도 있어. 되도록 이번 달 안에 끝을 보는 게 좋으리라 생각한다.”
아자토스의 힘은 변수가 많다.
요그소토스를 쓰러트리고 니알라토텝 마저 죽였던 1회차 이드라의 힘이지만, 아자토스에 비하면 부족할 게 분명했다.
“어차피 아자젤이 없었으면 얻지 못했을 기회야. 이번에는 확실히 놈을 죽여야 해.”
“그러려면 외우주로 가야 한다만.”
“못 갈 것도 없잖아? 네가 있고, 마왕도 있어. 뭣보다 내게는 시스템의 반쪽이 있다.”
나는 허수공간에 넣어둔 시스템의 반쪽을 떠올렸다.
현재 우주에 존재하던 모든 게임은 멈춘 상태였다.
다시 말하지만 사라진 게 아니라 멈춘 거다. 완전히 자유로워진 세계는 이드라가 탈환했던 지구 하나 뿐이었다.
퍼블리셔에 속해있던 세계들은 아직도 시스템이 구동 중이었다.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하려면 아자토스가 가져간 시스템과 열쇠의 반쪽을 되찾아야 해.”
그래야만 완벽히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다.
시스템을 파괴하기 위해선 지수가 가진 열쇠와, 나머지 반씩 쪼개진 두 개의 열쇠를 하나로 합칠 필요가 있었다.
“외우주에는 그대 혼자 갈 건가?”
“미쳤어? 당연히 지수와 린도 데려가야지. 그럼 악마들도 몇 따라올 테고.”
신들은 솔직히 외우주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최상의 보정을 받는데다, 아무래도 우주를 아우르는 외신들과 한 별에 지배자인 신들은 격의 차이가 있다.
악마, 그것도 7대 악마 정도나 되어야 외신들을 상대할 수 있을 테지.
“그럼 필연적으로 지수의 도움이 필요하겠군.”
“맞아.”
“그럼 약혼을 서둘러야겠구나.”
“……그렇게 말하면 마치 내가 지수를 이용하려는 것 같잖아.”
“후후후.”
낮게 웃는 이드라에게 나는 뭐라 말을 못하고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정말 어쩐다냐.
***
“자, 모두 승리를 축하하며 건배!!”
“건배!!”
왁자지껄하게 외치는 소리를 뒤로하며 나는 술을 홀짝였다.
현재 서울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도시의 복구 때문에 미뤄뒀던 간단한 파티가 신들의 끼어들면서 거대한 연회로 변한 탓이다.
인간과 지구의 신들, 그리고 악마까지 뒤섞여 있는 탓에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제우스와 어깨동무하고 건배를 소리치는 루크의 모습은 초현실적일 지경이었다.
덕분에 린은 한없이 부끄러운 걸 보는 얼굴로 서 있었지만, 곧 다른 그리스 신들에 의해 정신없이 끌려 다녀야만 했다.
이러나저러나 린은 현재 그리스 신화 소속의 아스트라이아와 합신한 정의의 여신.
올림포스의 자랑이었으니 다른 신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도 당연했다.
“정말 아쉬워. 우리가 먼저 저 아이를 찜해뒀어야 하는데.”
그런 신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낯익은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시선을 돌리자 술잔을 든 어릿광대, 아니. 로키가 싱글싱글 웃으며 민아와 다가왔다.
“저로는 부족한 건가요? 솔직히 이번에 저 아니었으면 졌을 수도 있거든요?”
“오, 물론 아니야. 난 운이 좋아. 내 말은 너만이 아니라 다른 두 아이들도 미리 찜해두지 못한 게 아쉽다는 거지.”
발끈하는 민아의 모습에 로키는 그녀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로키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신이긴 했지만, 지금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닐 거다.
민아라면 확실히 어떤 플레이어보다도 뛰어났으니까.
린이나 지수가 너무 특출할 뿐이지.
“정의의 여신님은 바쁜 거 같고. 마왕님은 어디 계시나?”
“지수라면 지금 악마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아직도 존댓말이네. 솔직히 이젠 내가 존댓말해야 될 위치 아닌가? 까마귀는 이미 외신이나 마찬가지잖아.”
“반쪽짜리죠.”
이드라가 없다면 나는 기껏해야 반쪽짜리 외신에 불과했다.
“애초에 외신을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대단한 거야. 단순한 여신과 합신하는 것과는 격이 다르지. 언제까지나 자신을 낮출 필요는 없어.”
“……그건 차차 생각해 보죠. 그보다 괜찮습니까?”
“뭐가?”
“게임이 사라지면 그동안 지른 게 다 날아가는데.”
내가 알기로 로키가 게임에 과금한 포인트량은 어마무시한 수준이었다.
“별로 상관없지만. 내 생각에 게임은 아니더라도 그런 일정량의 선을 쳐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선이라니요?”
“옵저버 말이야. 지금 보이는 광경은 확실히 보기 좋다만, 신과 인간이 섞이면 트러블이 생길 수밖에 없지. 게임이 아니더라도 세계의 구분은 필요해. 인간계에 간섭하고 싶다면 전처럼은 아니어도 옵저버와 비슷한 방식을 택하는 게 좋을 거야.”
확실히 로키의 말은 옳았다.
이러나저러나 기나긴 세월을 산 신인 건 분명한 모양이다.
“저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만…….”
“시스템을 대체할 존재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거겠지.”
“예. 그렇죠.”
“그럴 일은 없어. 우주전체를 쥐락펴락할 만큼 너는 간이 크지 않거든.”
“하지만 새로운 ‘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겠지. 하지만 지금 제대로 룰을 정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거야.”
확실히 로키의 말이 옳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하하, 그래.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게 좋아. 파국이란 의외로 쉽게 일어나는 법이니.”
참 무서운 소리를 웃으면서 하는구나 싶었다.
“참 그리고 또 물어볼 게 있는데.”
“뭡니까?”
“너 마왕과 결혼한다며?”
순간 혀가 굳는다는 게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뭐라 말을 해야 되는데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든 술잔을 빠르게 들이킨 후, 더듬더듬 말했다.
“그……걸 누구에게 들었…….”
“저기서 마왕이 말하는 걸 엿들었지.”
“아, 맞아. 오빠. 지수 언니가 곧 결혼식할 수도 있다고 루시퍼한테 말하더라.”
“확정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마왕은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던데 괜찮겠어? 아, 하기야 그렇게 절절하게 구해냈으니 물어볼 필요도 없나?”
나는 손바닥으로 연신 얼굴을 훔치며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로키의 시선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망할 커뮤니티 때문에.’
시스템이 정지했음에도 커뮤니티는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건 린이 자신의 열쇠의 힘으로 퍼블리셔가 운영하던 커뮤니티의 제어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재 커뮤니티 영상 중에 최고 조회수를 기억하는 게 내가 지수를 구하는 부분이다.
시스템을 부수고, 반격의 시작을 알린 바로 그 순간.
모든 힘을 잃고 오직 인간의 힘으로 상태창을 부수며, 그곳에서 지수를 구하는 장면은 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나약한 존재가 초월적인 힘을 꺾는, 그런 광경.
당연히 나와 지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커뮤니티에서 큰 이슈였다.
대부분 내가 사랑하는 지수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 거라 떠들며 감동했다고 글을 남기기 바빴다.
내가 익명으로 열심히 여론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겉잡을 수없이 커져 있었다.
‘이미 둘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아마 로키도 나와 지수의 관계를 서로 죽고 못사는 연인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또 한 명.
지수 말고도 나와 엮이는 존재가 있었다.
“근데 그럼 이드라는 불쌍해서 어쩌니. 그쪽도 상당히 열정적이던데.”
“…….”
대체 이 인식을 어디부터 손봐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사실도 섞여 있어 완전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이러다가 이드라가 ‘인간의 도덕심은 촛불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아주 아수라장이 될 거다.
이럴 바엔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쏠리게 하는 게 빠를 것 같았다.
“결혼식은 아니고 약혼은 생각 중입니다.”
“호오, 과연.”
차분하게 말하자, 로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었다.
비교적 잔잔한 그녀의 반응에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조언이나 들어볼까?’
이드라에게 약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후,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끙끙 고민했다.
그놈의 약혼이 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봤지만 마땅한 계획이 떠오르지 않았다.
약혼식은 부담스럽고, 대충 반지를 건네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 타이밍을 알기 힘들었다.
나는 한참동안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로키. 하나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약혼 때문에?”
“…….”
요즘 들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존재가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태 이런 적이 없었던 터라,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