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294화 (294/332)

# 294

294. 끝을 향한 준비(1)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하얀 소녀의 모습에, 세한이 황급히 움직이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지수가 움직였다.

단걸음에 아자젤이 있는 장소까지 날아간 지수는,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지상으로 착지했다. 지수의 품에 안긴 아자젤의 얼굴은 한없이 평온했다.

‘죽지는 않았어.’

마왕인 지수는 현재 아자젤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강대한 권능을 마음껏 해방한 탓에 본인에게도 타격이 돌아온 것이다.

방금 전에 아자토스와 싸우던 광경을 보면 도리어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창백한 피부의 곳곳이 퍼석퍼석해져 금이 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지수였지만, 아까 아자젤이 한 말 때문인지 괜히 그녀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시퍼?”

계속해서 아자젤의 상태를 살피는 그녀에게 루시퍼가 언제 왔는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자젤이니 가만히 두면 어련히 알아서 회복할 겁니다. 그 아이, 그렇게 연약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아요.”

“확실히 꽤 오래 잠들지도 모르겠군요. 그 정도의 힘을 발휘했으니…….”

루시퍼는 평온한 얼굴로 잠든 아자젤을 보았다.

그녀가 아직 아이이던 시절부터 루시퍼는 그녀를 지켜봤다.

애초에 인간 세상에 있던 그녀를 마계로 데리고 온 게 루시퍼였다.

“평생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처음 보았던 아자젤은 계속 하늘만을 바라보던 아이였다.

폐가가 된 오두막집에서 홀로 남아 살아가던 작은 악마.

왜 그곳에 그녀가 있었는지는 루시퍼도 모른다.

천사와 악마의 혼혈인 아자젤이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며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때 보았던 아자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살아가는 이유조차 알지 못했기에 나태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태의 악마를 쓰러트렸지만, 그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타인을 위해, 힘을 사용하다니.

“루시퍼. 그보다 슈브니구라스는 어떻게 됐죠?”

생각에 잠겨 있던 루시퍼에게 지수가 물었다.

왕관의 힘을 사용해, 잠든 아자젤의 몸을 회복시키던 중 문득 루시퍼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슈브니구라스를 상대하던 루시퍼가 아니던가.

“그건 보다시피.”

루시퍼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는 일그러진 얼굴로 지상을 응시하는 소년이 있었다.

가장 위대한 신이었던, 외신의 왕이었던 자가.

그리고 그 곁에 슈브니구라스가 있었다.

마치 그를 지키는 것처럼.

‘아자토스……. 이제 어쩔 거냐.’

세한 역시 그런 아자토스를 지켜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만약 아자토스가 덤빈다면 난감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으니까.

“분노한 아버지가 이곳을 모두 쓸어버리려 할 거다.”

이드라가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방금까지 아자토스가 보였던 행적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니, 아무래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

“뭐?”

“아자젤이 큰 상처를 입었지만, 아자토스도 멀쩡한 건 아니거든.”

평소의 ‘무한한 힘을 지닌 외신’이었다면 상관없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필멸을 얻은 아주 강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방금 전에 아자젤에게 사용했던 힘은 그의 무한한 권능의 구현과도 같았고, 아자젤은 그 모든 걸 베어내며 아자토스의 가슴에 필멸의 조각을 박아 넣었다.

필멸의 조각은 그의 몸에 흡수되어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힘은 아주 느리게 회복되고 있었다.

본래의 힘을 되찾으려면 아주 긴 시간이 걸리리라.

이드라 역시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자토스의 힘을 누구나 잘 아는 이드라였기에 도리어 깨닫는 게 늦었던 것이다.

“지금이 아버지를 죽일 적기라는 게냐?”

“50대 50이지. 아자토스도 그 사실을 알 거야.”

지금 아자토스의 힘은 극도로 약해졌다.

그렇게 된 이상, 아자토스는 겸사겸사 얻어뒀던 시스템의 반쪽과 열쇠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아자토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개.

이판사판으로 이곳에 있는 모든 신과 악마를 상대하거나, 열쇠와 시스템의 힘을 사용해 자신의 힘을 봉인한 파편을 제거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판사판으로 덤빌 일은 결코 없을 거다.”

“왜?”

“슈브니구라스가 아자토스를 지키고 서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아자토스는 처음으로 죽음을 느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던 자신이 이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하게 된 거다.

설령 아자토스 자신이 이길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라도 놈은 먼저 덤비지 않으리라.

“큭!!”

그런 세한의 예상대로 아자토스는 차마 지상에 있는 증오스런 존재들에게 쉽사리 벌을 내리지 못했다. 현재 지구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다.

한 번에 청소하지 못한다면 그 수많은 신들과 악마들을 상대로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외신들을 부른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허나 아자토스의 자존심이 그것을 거부했다.

자신의 힘이 부족해서 타인의 힘을 빌리다니.

다른 이도 아닌 아자토스가.

“……돌아가자, 슈브니구라스.”

“예? 아버지, 저 미물들을 두고 돌아가신다는 이야기인가요?”

“나는 돌아가자고 말했다. 언제부터 네가 내게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었지?”

사나운 아자토스의 말에 슈브니구라스는 입을 닫았다.

‘신’인 아버지가 보일 반응이 아니었다. 지극히 감정적인 게 마치…….

‘인간……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슈브니구라스는 방금 아자젤의 몸에 박힌 파편이 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자토스의 몸에서 일어난 이변을 조금은 알아차렸다.

언제나 아자토스에게서 느껴지던 절대자의 위압이 흐려진 것이다.

“문을 열어라, 슈브니구라스.”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슈브니구라스는 허공을 향해 손짓해 검은 문을 열었다.

외계로 통하는 문이 열리자, 대지를 빼곡하게 채웠던 시체들이 검은 물감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바로 아자젤에게 죽은 수많은 외계의 존재들과 외신의 잔해다.

그것들은 검은 물줄기가 되어 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슈브니구라스가 친히 자신의 동포들을 본래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아자토스는 심히 못마땅했지만, 지금은 슈브니구라스의 힘이 필요했다.

‘……돌아올 거다.’

아자토스는 지상에 있는 존재를 살짝 일견한 다음 문의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며 이빨을 까드득 깨물었다.

‘반드시.’

외우주에서 자신의 몸을 잠식한 수상한 힘을 제거만 한다면 바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별과, 우주까지도 모두 먼지로 만들어 버리리라.

파아앗!!

검은 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아자토스와 외신들이 모습을 감췄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이들은 저마다 조금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계속 살폈다.

혹시 다시 그 괴물이 나타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하늘은 평온하기만 했다.

방금 전까지의 광경이 모두 환상이었던 것처럼.

“……끝났다.”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살아남은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제 끝났어! 살았다고!”

“우리가 이겼다!!”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울려 퍼지며 만신창이인 이들이 저마다 껴안고 울고 웃었다.

이제 시스템도 퍼블리셔도 남아있지 않았다.

게임이었던 지구는 이제 없었다.

***

전투는 이겼지만 피해는 상당했다.

특히 대규모 전투가 계속해서 벌어졌던 서울은 쑥대밭이 되어 건물들이 남아나지 않아, 사실상 폐허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이대로는 르뤼에로 대피시켰던 사람들이 돌아오더라도 문제가 되리라 생각됐지만, 의외로 그 일을 해결해 준 건 신들이었다.

“인류의 재건을 돕는 것 또한 우리의 일이었지. 흠, 아주 오래전 일이로구나.”

제우스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스 신화에 대해 조금만 안다면 그런 제우스의 말이 기가 찰 노릇이었겠지만, 세한은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도와준다는데 핀잔을 줘서 뭘 하겠는가?

‘덕분에 다른 신들도 이래저래 복구에 도움을 줄 거 같네.’

올림포스가 움직이니 지구의 다른 신들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인간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들의 심리는 ‘올림포스 같은 놈들도 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쏘냐?’라는 마인드였다.

인간이 아닌 신들의 권능이 가미되니 부서진 도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복구되고 있었다.

특히 가장 많은 활약을 하는 건, 다름 아닌 지수였다.

“오빠, 강남지역은 복구 끝났어요.”

“제대로 사진대로 복구했어?”

“네.”

지수의 머리 위에는 검은 왕관이 번쩍이고 있었다.

마계의 열쇠.

그것에 내포된 힘은 이미르나 린이 가지고 있던 열쇠의 반쪽과는 궤를 달리했다.

이곳이 마계가 아님에도 건물과 같은 건 가볍게 손짓하는 것만으로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이렇게 되자, 린은 상대적으로 뻘쭘해진 모습이었다.

열쇠를 세한에게 돌려받았지만,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저는 특별히 활약을 못한 거 같아요…….”

“외신들을 잡을 때 도움을 줬잖아.”

“그래도…….”

다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온 린은 울적한 얼굴로 인형을 껴안고 앉아 있었다.

계속 잠만 자다가 늦게 일어났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애초에 난, 아직 어린 네가 이런 싸움에 되도록 참여하지 않았으면 한다만.”

“그럴 수 없어요.”

린은 정의의 여신이다.

인류의 정의를 수호하는 여신. 그러니 가만히 있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곧 또 싸울 일이 생길 텐데.”

“네?”

“아냐, 이건 나중에 말해줄게.”

세한은 린의 머리를 토닥이며 씩 웃었다.

지금은 좀 더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어도 충분했다.

어차피 린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테니까.

자신의 세계로 떠난 아자토스를 죽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는 걸.

***

“하아, 이제야 겨우 쉴 수 있겠네요.”

워낙 강한 육체와 정신력을 지녀 피로를 느낄 리가 없음에도 지수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평범한 인간이던 시절의 버릇이 남아있는 건지도 모른다.

“마왕님, 아이스 커피입니다.”

“나가요.”

“네.”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눕는 지수의 뒤로 루시퍼가 나타났다.

언제 만들어뒀는지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내미는 그의 모습에 지수는 짤막하게 답했다.

말하기 무섭게 순식간에 사라지는 루시퍼의 모습이 지수는 여간 황당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표정 변화가 그다지 없는 지수가 이럴 정도면 역시 저 악마는 보통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거예요, 저건?”

“너야말로 왜 당연하다는 것처럼 내 방에 들어와?”

“오랜만이잖아요. 지금은 그 여자도 없는 것 같고.”

참고로 그 여자란 이드라를 말한다.

슬슬 좀 친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지수는 정말 타인에겐 무관심했다.

예외로 둔다면 아자젤 정도가 그나마 지수가 살갑게 대해주는 인물이었다.

“아자젤은?”

“아직 자는 중이에요. 루시퍼의 말에 따르면 꽤 오래 자야 되는 모양이에요.”

“오래라니, 얼마나?”

“짧으면 백 년 정도라고 하던데.”

“……백 년?”

그것도 짧으면 이라니.

어마어마한 시간에 나도 모르게 사레가 들릴 뻔했다.

“……하긴 그런 힘을 사용했으니 이상하지도 않네.”

“네. 그래도 열쇠의 힘을 사용한다면 좀 더 빨라지긴 할 거예요.”

“그럼 다행이지. 난 신자운에게 눈치를 보고 싶지는 않거든.”

그래, 어차피 수명도 넉넉하겠다. 백 년쯤이야 기다릴 수도 있겠지.

지고지순한 성격으로 보이니 알아서 잘 하리라 믿는다.

“저도 둘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나도야.”

광기의 마왕에서 봤던 돌잔치를 백 년 후에나 볼 수 있으려나.

그보다 어떡한다. 아자젤이 싸우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들으니 뼈아픈 일이다.

그녀만한 강자는 어디 가서 구할 수도 없으니까.

“그보다 세한 오빠. 슬슬 날짜를 정해야 되지 않아요?”

“……뭘?”

갑작스런 지수의 말에 나는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날짜를 정하다니. 최근에 누구와 만나기로 했던가?

유엔과 아서와도 최근에 만났고, 까먹고 퍼블리셔에 내버려뒀던 민아도 데려왔고…….

“결혼식이요.”

“결혼식은 아직 준비를…… 뭐?”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지수의 볼이 발그스름해졌다.

“그때 저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구하셨으니 이제 마음 정하신 거 아닌가요? 그럼 남은 건 하나잖아요?”

“그건, 뭐, 그렇긴…… 한데.”

이드라도 소중한 사람이긴 했지만, 좀 더 이성으로서의 사랑을 따진다면 지수 쪽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간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외면했던 감정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갑자기 결혼이라니?

내가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지수를 바라보자 그녀는 정말 한없이 기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됐죠.”

지수는 싱긋 웃었다.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는 지수의 눈동자는 오랜만에 보는 새빨간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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