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
293. 한계돌파(3)
아자젤은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치는 고통을 느껴본 적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고, 한계라는 건 자신의 능력으로 언제든 넘을 수 있는 것이었다.
벽이 자신을 막아선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지 아자젤은 몰랐다.
‘만약.’
공포를 알기 전의 그녀였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아자젤은 공포란 감정이 필요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공포는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 뿐이며, 필요 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계약자를 비롯해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아자젤, 너는 왜 지구에 온 거지?”
한동안 마계에 머물고 있을 때, 신자운은 아자젤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침대에 누워 있던 아자젤은 그런 그에게 살며시 시선을 보냈다.
“그건 왜?”
“나태의 악마씩이나 되는 네가 굳이 지구에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게으른 아자젤은 무척 게으르다.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지구에 올 리가 없었다.
“그냥 변덕.”
하지만 아자젤은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변덕이라고?”
“갑자기 생각나서 한번 와봤을 뿐이야.”
신자운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자 아자젤은 꽤나 옛 기억을 떠올리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 인간 세상에서 살았던 적이 있거든. 그래서 한번 생각난 김에 지구에 들렸지.”
“네가 인간 세상에 살았다고?”
“그래. 물론 지구는 아니야. 다른 별이지만. 지구와 아주 비슷해.”
이미 사라진 별이다.
그곳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퍼블리셔에 의해 짓밟혀 멸망했다.
“지구는 그곳과 상당히 비슷했어. 그래서 한번 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거야.”
“그런가.”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꽤 인상 깊은 기억이었나 보군.”
피식 웃는 그의 말에 아자젤은 뒹굴거리던 몸을 멈췄다.
문득 그랬던가? 라는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워낙 오래된 일이라 아자젤도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그런 흐릿한 기억만으로 움직일 정도면 확실히 마음에 남은 건지도 모른다.
「이곳에 숨어 있어야 해, 아자젤.」
“…….”
어렴풋이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워낙 오래되어 그 말의 주인이 누군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그 목소리의 주인 때문에 자신이 지구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인간이었을 테지.
분명, 그랬던 것 같다.
“뭐어. 이건 지금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고. 마침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하나있어.”
한 가지 일을 오래 생각하지 않는 그녀는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억지로 상기하는 걸 그만뒀다.
“너는 여태까지 악마가 될 생각이 없었으면서, 왜 갑자기 악마가 되려 한 거니?”
여태 궁금했지만 참고 있었던 질문이다.
인간이란 복잡한 생물이라, 별것 아닌 말에도 심각하게 반응하곤 했다.
그러니 아자젤로선 나름 심사숙고한 뒤 꺼낸 말이었다.
마침 신자운의 질문에도 답해준 차이니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그게 왜 궁금한 거지?”
“그야,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강해져야 한다는 녀석이 악마의 힘을 받아들였잖아.”
“으음.”
신자운은 조금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마치 말하기가 상당히 꺼려지는 것 같은 모습이다.
“왜 그러니? 갑자기 심각한 얼굴이 되어선.”
“특별히 심각한 건 아니다. 단지 비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
그의 시선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다.
평소에는 얼굴이 반쪽이 가면으로 가려져 표정을 읽기 힘든 그였지만 지금은 난감한 감정이 훤히 보였다.
신자운은 잠시 아자젤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등해지고 싶었다.”
“누구랑?”
“너와.”
“……?”
아자젤은 순간 신자운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말똥말똥 떴다.
“……왜?”
“나도 모른다. 아마 정이라도 들었겠지.”
그는 피식 웃으며 아자젤이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혹은,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건지도.”
“…….”
말문이 막힌다, 라는 말이 뭔지 아자젤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기본적으로 감정에 둔감한 그녀이지만 ‘그런 쪽’에는 제법 밝았다.
최근 느낌적인 느낌으로 그런 것과 관련된 존재를 길렀던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마 마계의 열쇠와 관련된 존재이겠지.
“아무튼 그래서 무서워진 거다. 이대로 계속한다고 해서 너의 옆에 설 수 있을지. 인간의 수명조차 극복하지 못한 채 죽는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더군. 그래서 그때 너의 제안에 수긍한 거다.”
그가 분노의 악마가 되길 바란 김세한과, 그걸 제안했던 아자젤의 말을.
“아무튼 그랬던 것뿐이다. ……왜 그러지?”
“……됐어.”
차마 아자젤은 신자운을 볼 수 없었다.
남의 시선을 피하는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참 별 쓸데없는 이유네.”
아자젤은 그녀답지 않게 날카로운 말을 내뱉으며 몸을 돌려 누웠다.
처음으로 느껴본,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무시하며.
***
공포라는 건, 무언가 소중한 것이 있을 때 생긴다.
그건 자기 자신이거나, 혹은 타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물건일 수도 있으며 관념이나 꿈과 같은 걸 수도 있다.
아자젤은 여태 그런 걸 가져본 적 없었다.
지수를 통해 느꼈던 미지의 공포가, 그때 신자운과 대화하며 명확해졌다.
아마, 자신은 잃고 싶지 않은 게 생긴 모양이다.
악마로서, 그것도 나태의 악마로서 실격일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인 그의 곁에 있기엔 썩 나쁘지 않은 건지도 모르지.
“웃어?”
아자젤의 입가에 살며시 머금어진 미소를 보며 아자토스는 의아해졌다.
이 상황의 어디에서 웃을 게 있단 말인가.
‘웃음이란 이럴 때 나오는 게 아닐 텐데.’
웃는 건 보통 기쁠 때라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기쁠 구석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흥, 어차피 아무래도 좋아.”
아자토스는 다시 ‘인간의 아이’에 걸맞은 말투를 중얼거리며 주먹을 꽉 움켜줬다.
그러자 상당한 크기로 부풀어 올랐던 검은 구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게 폭발할 때도 웃을 수 있을까?”
그가 인간의 모습이 된 건, 인간의 감정과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금 아자젤을 통해 느낀 감정은 대부분 한없이 불쾌했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제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것도 질렸다.
이미르의 부탁만 해결한 후, 외우주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
팽창하며 꿈틀거리는 구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그것을 보며 아자젤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할 수 있나?
자신의 힘과 저것을 가늠했다.
답은 금방 나왔다.
불가능하다.
저것에 담긴 힘은 감히 눈으로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럼, 사라져라. 불쾌한 것.”
꽉 쥐어졌던 아자토스의 주먹이 활짝 펴졌다.
막대한 힘이 응축되어있던 구체를 폭파시키기 위한 도화선이 당겨졌다.
구체가 점차 찢어지며 찬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존재하는 모든 외신과, 악마의 힘을 넘은 아자토스의 힘.
그 권능이 담긴 결정체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아자젤의 눈에는 아주 느릿하게 보였다.
‘응?’
순백의 쌍검을 쥐고, 아자젤의 손이 움직였다.
아자토스는 그 광경을 또렷하게 보았다.
분명 상당한 힘을 지니게 되었지만 저 폭발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지니지 못했다.
그런데도 저 악마는 그대로 자신의 권능을 향해 돌진했다.
순백의 빛을 머금은 두 자루의 검을, 폭발하기 시작하는 구체를 향해 찔렀다.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했다.
고작 검 두 자루로, 저것에 담긴 힘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자토스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아, 인간의 웃음은 꼭 기쁠 때만 나오는 건 아니구나.
기긱.
입가의 웃음이 굳어졌다.
백색의 검이 진동하며 구체의 폭발을 억제하고 있었다.
새로운 감정을 곱씹던 아자토스는 가슴속에 차오르는 또 다른 감정에 얼굴을 찌푸렸다.
기기기긱!!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아자토스의 가슴속에서 맴돌았다.
구체를 꿰뚫으며 순백의 빛이 비어져 나왔다.
백색의 검에서 치솟은 빛이다.
그 빛은 하나는 위로, 다른 하나는 아래로 움직이며 아자토스가 만들어낸 구체를 단번에 양단했다.
촤아아아악!!
“베어냈다고?”
저것에 담긴 힘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아자토스의 권능이 담겨 있는 무적의 힘.
지금 저 악마는 단 두 자루의 검으로 그것을 갈라버렸다.
“……!!”
아자토스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구체를 베어낸 아자젤이 어느새 자신의 코앞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구체를 베어낸 그녀의 모습은 한층 달라져 있었다.
전신이 백열하여, 마치 새하얀 불꽃에 휘감겨 있는 것 같았다.
아자젤의 머리칼이 하얀 불꽃처럼 타올랐다.
한계를 넘어, 무한의 영역에 발을 디디고.
무쌍의 힘을 손에 넣은 악마.
분명 일시적인 걸 테지.
어디로 봐도 ‘저것’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아자토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일시적인 반짝임이, 자신에게 도달할 가능성을 지녔다는 걸.
지워야 한다.
가슴속에 치밀어 오른 알 수 없는 감정, 인간의 감정이 아자토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한낱 악마가 순간이라도 자신에게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보다 강한 힘. 압도적인 힘으로 저걸 눈앞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무한한 자신의 힘이라면 그 정도는 간단할 터였다.
백색의 유성이 되어,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아자젤을 향해 아자토스는 손을 뻗었다.
우주를 리셋하거나 지구를 멸망시키는 건 이제 뒷일이다.
우선 눈앞에 저것을 향해 지닌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지워버리기 위해서.
모든 외신의 왕.
전지전능한 가장 위대한 신의 힘이 아자젤을 향해 투사됐다.
그러나 하나.
아자토스가 착각하는 게 있었다.
지금 그는, 외신 아자토스가 아닌 인간의 감정을 지닌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무한한 힘이, 무한에 ‘가까운’ 힘이 되었다는 걸.
꽉.
자신을 향해 투사되는 검붉은 광채를 보며 아자젤은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을 버렸다.
그리고 한 자루의 검을 양손으로 잡고 수직으로 내리그으며 몸을 회전시켰다.
톱니처럼 회전하는 백색의 빛이 검붉은 광채를 가르며 전진했다.
무한에 가까운 힘과, 한계를 모르는 힘이 부딪쳐 끝없는 상승곡선을 그렸다.
만약, 아자토스가 본인의 능력을 사용해 좀 더 다른 방법으로 상대했다면 아자젤은 제대로 싸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힘과 힘의 대결이 되어버린 이상, 이야기는 달랐다.
힘의 상승곡선이 멈춘 쪽이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뭐야.”
아자토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계속해서 생소한 감정들이 느껴졌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에 비하면 다른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포? 그런 게 아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감이 아자토스의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런 그의 귓가에, 자그마한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가장 위대한 신이여.”
모든 것이 불타고 남은 재와 같이.
새하얀 악마는 더 이상 불꽃처럼 타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육신은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래성과 같이.
그녀는 살아 있는 잿더미였다.
콱!
그럼에도 그녀의 양손은 작은 쇳조각을 아자토스의 가슴에 박아 넣고 있었다.
불멸의 존재에게, 필멸을 부여하는 말뚝의 파편을.
세한이 지닌 말뚝의 일부를 잘라, 챙겨두었던 그것이다.
파편은 아자토스의 몸에 녹아들 듯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 광경을 흔들리는 눈으로 보는 아자토스에게 아자젤은 늘 그렇듯, 싱긋 웃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관에 갇힌 기분이 어떠한가?”
지금 그녀는 관의 뚜껑을 덮었다.
필멸의 무게에 짓눌려 결코 열 수 없도록.
“너……!!”
아자토스는 아자젤을 향해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자토스의 손이 아자젤에게 닿기 전에, 이미 그녀의 몸은 지상으로 떨어졌다.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그녀를, 아자토스는 그저 황망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안 돼.’
떨어지는 아자젤을 향해 공격한다면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아자토스는 그럴 수 없었다.
그보다 지금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이변에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단순히 인간을 흉내했을 뿐인 아자토스의 육신이,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보다는 강할지라도, 이건 인간의 육신이다.
고통을 느끼고 죽음이 존재하는 인간의 육신.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거기다 더 이상 전지(全知)도, 전능(全能)도 아니었다.
외신의 왕이라 불리는 그에게 한계가 생겼다.
지금의 그는 강한 힘을 지니고, 끝없는 오만함을 가진.
그런, 인간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