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290화 (290/332)

# 290

290. 외신(外神)의 왕(2)

아자토스의 손 위에 있는 시스템의 절반.

나머지 절반은 현재 세한의 허수공간에 있었지만 저것이 아자토스에게 있는 한 시스템을 완전히 멸할 수 없었다.

쿠구구궁!!

세한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가 무너지자, 그 안에 있던 거대한 이미르의 육신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족히 2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몸이 조금씩 무너지며 잘게 부서져 유성처럼 지상으로 떨어졌다.

“윽!!”

더불어 시스템을 쓰러트리느라 상당히 무리했던 세한도 공중에서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아자토스는 그런 세한을 즐거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굳이 자신이 직접 손을 델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분명 세한이 시스템의 나머지 절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텐데도 불구하고.

‘언제든 빼앗을 수 있다는 건가? 아니면…….’

이미르에게 부탁을 받았다고 했던가.

어쩐지 불안한 예감을 느끼며, 세한은 자신의 몸이 점차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아, 그렇지 이것도 내가 받아갈게.”

무거워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떨어지는 세한을 향해 아자토스가 씩 웃었다.

무너져 내리는 이미르의 몸에서 회수한 모양인지, 아자토스의 머리 위에는 금색의 왕관이 있었다.

이미르가 가지고 있던 절반의 열쇠다.

시스템에 이어, 저것까지 이미르가 아자토스에게 회수를 맡겼던 게 분명했다.

‘안 돼.’

하늘 위에 고고하게 떠있는 아자토스를 보며 세한은 손을 뻗었다.

물론 그런다고 그의 손에 아자토스가 닿는 일은 없었다.

느릿하게 떨어지던 세한의 몸은 점차 가속하며 유성처럼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세한은 이드라에게 몸을 제어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이드라는 세계의 틈에 빠져나온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아자토스를 보았기 때문인지 정신을 잃고 세한의 옷깃에 매달려 있었다.

“세한 오빠!!”

지상에 충돌하기 직전, 그런 세한을 지수가 와락 껴안으며 착지했다.

덕분에 땅에 처박히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었지만,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윽, 고, 고맙다. 지수야.”

“아니에요. 그보다 거인왕은 어떻게 된 건가요?”

“이미르는…….”

세한은 자신을 품에 안고 있는 지수에게 쓰게 웃으며 여태까지의 일을 말했다.

이미르를 쓰러트리고 시스템의 핵에 도달하기까지의 이야기를 하며 세한은 현재 지구의 상황을 파악했다.

‘아주 쑥대밭이 됐구나.’

이미르와 환상 속에서 싸우는 동안 서울은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 탓인지 멀쩡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겉모습만 보자면 ‘고독한 세계’ 엔딩보다도 작살이 난 것 같았다.

그중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건 외신과 7대 악마가 싸우면서 생긴 거겠지.

“외신은 하나를 제외하고 전부 억제할 수 있었어요.”

“셋 중에?”

“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지.

지수는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 끝에는 산산조각이 난 육편과, 흉성의 학살자에 반쯤 뭉개진 인간의 머리가 있었다.

“죽이지는 못했지만, 열쇠의 힘을 이용해서 구속해 뒀으니 더 이상 못 덤빌걸요.”

“……대단하네.”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뭉개져 있는 저 외신은 노스 이디크. 모든 틴달로스의 군주다.

전투력만 따지면 아우터갓 중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놈을 지수는 제압한 것이다.

“흥,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세한이 떨어지는 걸 보고 다가왔는지 벨제부브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벨제부브의 옆에는 린이 서있었다.

“디엔드라라는 외신도 지수 언니가 봉인했어요.”

“쳇.”

함께 온 린의 말이 그는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디엔드라와 한창 싸우는 중에 린이 끼어든 탓이었다.

물론 코앞에 지수가 있는 터라 그 이상 뭐라 떠들지는 못했다.

‘그럼 세 외신 중 남은 건 슈브 니구라스…… 아마 루시퍼가 상대하고 있겠지.’

세한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자토스에 이어 세 외신까지 함께 덤벼오면 정말 답도 없었으니까.

“그럼 오빠. 저건.”

지수는 나를 꽉 끌어안은 채, 하늘 위에 떠 있는 아자토스를 보았다.

인간의 시력으로는 작은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위치였지만, 이곳에서 저 정도도 볼 수 없는 이는 없었다.

나도, 지수도, 린도. 그리고 벨제부브도.

아마 이곳에 없는 루시퍼도 아자토스의 등장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우리는 입을 굳게 닫은 채 아자토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거, 거인왕이 쓰러졌다!”

“우리가 이겼어! 우리가 이긴 거야!”

하지만 아자토스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지구의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환호를 내질렀다.

갑자기 나타난 이미르의 몸이 부서지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퍼블리셔를 이끄는 거인왕의 죽음, 그건 퍼블리셔의 몰락을 뜻했다.

지구의 플레이어들과 달리 퍼블리셔의 편에 서서 싸웠던 이들은 허탈함을 얼굴에 감추지 못했다.

“이길 수 있을까요?”

“아니.”

조용히 묻는 지수의 말에 세한은 고개를 저었다.

좋게 말해도 이쪽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세한은 이미르, 그리고 시스템과 연달아 싸우며 신격이 고갈된 상태였다.

이드라와 합신한 탓에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게 전부였다.

여기서 싸운다거나 하는 건 불가능했다.

‘사실 지수도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닐 거야.’

지수는 여태까지 세계의 틈 속에 있었다.

마왕의 힘을 얻으며 복귀했지만,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단지 세한에게 내색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나도 저건 무리다.”

벨제부브도 썩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맛있는 식사라고 덤벼들었을 그였지만 아무래도 아자토스쯤 되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이미르가 했다는 부탁이 뭘까요?”

“시스템을 회수하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이상은 몰라.”

굳어 있는 우리와 달리 주변은 축제분위기였다.

기쁨의 함성이 울리며 저마다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퍼블리셔를 쓰러트리고 ‘게임’에서 해방됐다는 기쁨.

여태까지 억눌러왔던 해방의 함성이 울렸다.

하지만 그 함성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년의 모습을 하나둘 보았기 때문이다.

“저건, 뭐야?”

천진한 소년의 얼굴을 한 존재.

플레이어들은 그것이 단지 껍데기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세한 역시 아자토스를 보며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에게 ‘형’이라고 말했던 아자토스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녀석은 ‘그 모습에 맞는 흉내’를 냈다고 했다.

말하자면 아자토스에게 모든 건 놀이에 불과했다.

“뭐야, 갑자기 조용해졌네?”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내려오던 아자토스는 조용해진 지상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다지 큰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서울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천진한 소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인간도 있고, 신도 있고. 거인도 있다니. 설마 이런 진귀한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그리고 퍼블리셔를 상대로 승리한 거 축하해.”

아자토스는 계속해서 천진한 소년을 연기했다.

여태까지 우주를 지배하던 퍼블리셔의 족쇄를 끊어버린 ‘인간’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런 구역질나는 행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아자토스를 지적하지 못했다.

“근데 이걸 안타까워서 어쩌지? 내가 하필 이미르에게 부탁을 받았거든.”

“이, 이미르 님이?! 여, 역시 이미르 님이야. 우린 살았어!!”

아자토스의 말을 들은 거인들이 환호했다.

거인왕의 몸이 무너지며 재로 변할 때만 해도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비장의 수를 남겨두셨을 줄이야.

“살아? 왜?”

“……?”

“내가 뭘 부탁받은 줄 알고.”

아자토스는 싱긋 웃으며 오른손 위에 있던 시스템의 반쪽을 왼손으로 훑었다.

그러자 세계의 틈에 연결되어 있던 전지전능의 반쪽이 아자토스의 몸에 녹아들 듯 흡수됐다.

원래부터 전지전능의 힘을 지닌 아자토스였기에 시스템의 절반을 흡수한다고 특별히 뭔가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단지 ‘외신’인 그가,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는 게 중요했다.

“내가 부탁받은 건 하나야.”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거인들을 향해 아자토스는 친절하게 이미르에게 받은 ‘부탁’을 이야기했다.

어차피 곧 사라질 존재들이니 말해줘도 문제없었다.

“리셋.”

“그, 그게 무슨…….”

“이미르는 자신이 죽음으로서 퍼블리셔가 무너지리라 판단했다.”

물론 이미르도 세한이 시스템의 핵까지 도달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르는 무척 신중한 성격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예견하여 최후의 수를 남겨둔 것이다.

“이미르가 죽게 되면 더 이상 이 세계는 유토피아로 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거지. 우주의 섭리를 거역하는 존재들이 나타난 이상, 그걸 본 존재들이 있는 이상. 다시 이전과 같이 돌아가지 않으리라 녀석은 생각했다.”

새로운 흐름은, 유한한 우주를 파멸로 몰아가리라 생각한 이미르는 아자토스에게 부탁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해달라고.”

딱!

아자토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미르의 앞에 아주 자그마한 구체가 만들어졌다.

“시스템과 열쇠를 모두 회수해주기를 바랐지만, 솔직히 귀찮아서 말이야. 이것도 인간의 감정인 건가? 흠, 신기하네.”

작은 구체는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저 작은 흑색의 구체에 담겨 있는 힘을 세한은 바로 알아차렸다.

“진짜로, 지워버릴 셈이야.”

저건 시스템의 힘을 이용한 게 아니다.

순수하게 아자토스 본인의 힘이다. 저 구체가 팽창하고 한계에 이르게 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리라.

“이 우주 자체를 지워버린다는 건가? 그런 게 가능해?”

“……아버지라면 가능하다.”

황당하다는 어조로 중얼거리는 벨제부브의 말에 답한 건 이드라였다.

방금 전까지 정신을 잃고 있었던 이드라는 꾸물거리며 세한의 어깨에 기어 올라왔다.

“이드라, 괜찮아?”

“으, 으음. 아직 어지럽다만 상황이 이런데 계속 잠들어 있겠느냐.”

“당신이 저거에 부탁하면 되지 않아요? 아버지라면서요.”

기운 없이 이야기하는 이드라에게 지수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호칭일 뿐, 인간들이 말하는 ‘아버지’라는 뜻이 아니다. 이제 막 인간의 몸에 의태하여 ‘감정’에 심취한 아버지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그럼 답이 없다는 건가?”

“……소멸을 각오한다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과, 이곳에 있는 두 개의 열쇠.

그걸 사용한다면 저 구체를 소멸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남은 힘으론 단지 막는 게 끝일 것 같다만.”

힘없이 웃는 이드라의 말에 세한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야 단순한 개죽음일 뿐이었다.

저걸 한번 막아낸다고 해도 아자토스는 다시 같은 걸 반복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해봐야…….”

“그만두렴, 까마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세한의 어깨를 누군가가 짚어 말렸다.

어깨에 닿은 건 작은 여성의 손이었다.

얼핏 보이는 새하얀 드레스.

세한이 알기로 이런 옷을 입는 자는 단 하나뿐이었다.

“아자젤?! 너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냐?!”

벨제부브가 세한의 등 뒤에 선 여성을 향해 역정을 냈다.

여태 외신과 뭐 빠지게 굴렀는데 이제야 나타나니 그럴 만도 했다.

“어머, 화났어?”

“하!”

하얀 양산을 접으며 싱긋 웃는 아자젤은 언제나 그렇듯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웠다.

바로 머리 위의 상공에 세상을 모조리 지워버릴 수 있는 폭탄이 있음에도.

“따지는 건 나중으로 해줘. 난 마왕님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뭐?”

그 기이한 행동에 벨제부브는 반문했지만 아자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세한을 품에 안고 있는 지수를 향해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

“뭔가요.”

“명을 내려주시지요.”

새하얀 소녀의 모습을 한 악마.

아자젤은 지수에게 머리를 숙였다.

“저는 게으르고 또 게으른 나태의 악마. 그런 저에게 명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적어도 저에겐.”

아자젤은 천천히 시선을 올려 지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지수는 그 눈동자에 담겨 있는 두려움을 느꼈다.

여태 언제나 여유롭던 그녀의 눈에 담겨 있는 공포.

하지만 그건 아자토스를 향한 게 아니었다.

“제가 마왕이기 때문인가요?”

“그것도 하나의 이유겠죠. 마왕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제게 특별한 존재니까요.”

“……왜죠?”

여태까지 아자젤이 자신의 피를 나눠준 이는 극소수였다.

그리고 극소수 중에서도 살아남은 건 단둘이었다.

질투의 악마 아바돈과 눈앞의 마왕 한지수.

아자젤이 피를 나눠주는 존재는 반드시 하나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강해져야만 하는 갈망을 지닌 자.

“당신이 저를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

“…….”

지수는 아자젤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자젤은 지수의 악마로서의 어버이였다.

‘사랑’에 민감한 그녀는 아자젤의 마음을 어렴풋이 읽어낼 수 있었다.

아자젤의 눈에 담긴, 공포의 이유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당신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우리 그렇게 길게 만나지도 않았잖아요?”

“저도 놀라는 중이랍니다.”

부드럽게 웃는 아자젤에게서 시선을 뗀 지수는 잠시 하늘을 응시했다.

“아자젤.”

“예, 폐하.”

“저걸 치워주세요.”

언제나 그렇듯 지수의 목소리는 지극히 무미건조했다.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맡겨주시길.”

아자젤은 꿇었던 무릎을 폈다. 그리곤 세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시 말뚝을 빌려 주겠니, 까마귀?”

“설마 이걸 사용하려…….”

썩둑.

갑작스런 아자젤의 말에 세한은 허수공간에서 이드라의 말뚝을 꺼내다 말을 멈췄다.

무언가가 스쳐지나가며 말뚝의 가장자리를 깎아내듯 베었기 때문이다.

“이거면 충분해.”

대략 단검만한 크기로 떨어진 말뚝의 날카로운 조각을 집어든 아자젤은 그걸 품 안에 갈무리했다. 난데없이 잘려나간 말뚝의 일부에 세한은 황망한 얼굴이 되었다.

여태 흠집한번 난적 없던 말뚝을 대체 뭐로 잘라낸 건지 볼 수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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