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289. 외신(外神)의 왕(1)
세계의 틈에 시스템이 연결되기 시작하자, 세한은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가 부서지는 걸 느꼈다.
단순한 신격, 그 이상의 힘.
그가 만들어낼 수 있는 건 환상에 불과했지만, 시스템은 그것과 같은 일을 실제로 일으킬 수 있었다.
모든 것에 간섭하며, 모든 걸 인지하는 전지전능의 힘.
단순한 편린을 손에 쥔 것에 불과한 세한과 달리 시스템은 그것을 완벽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기이이잉!!
엔딩 고독한 세계를 상징하는 붉은 하늘이 부서지며 작은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다.
수십, 수백, 수천.
무수한 균열이 생겨나며 자색의 빛이 뭉친다.
“큭!!”
세한의 외침과 동시에 보라색 광선이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떨어져 내린 빛은 지상을 녹이고 파괴하며 대지를 부수기 시작했다.
단순히 방벽을 쳐서 막을 위력이 아니었다.
세한은 열쇠의 힘을 집중시킨 거대한 검의 아래에 몸을 숨겼고, 빛줄기는 거대한 검을 마구잡이로 강타했다. 당장은 무사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계속 공격을 받으면 검과 함께 통째로 녹아내리리라.
“부탁한다, 이드라!”
“어려운 건 항상 나한테 시키는 구나!”
시스템이 직접 세계의 틈에 접속할 수 있는 것처럼 세한 또한 세계의 틈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을 두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린에게 건네받은 열쇠.
또 하나는 그 열쇠를 모방하여 만든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
파파파파!!
마치 켜져 있던 전구가 깨지는 것처럼 하늘을 가득 채우던 구멍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의 힘이 하늘에 닿으며 시스템의 힘을 차단하는 것이다.
[인스톨 51퍼센트]
“세한……!!”
그와 동시에 시스템에게 나타나던 로딩바가 절반을 넘었다.
시스템의 본체가 전지전능의 힘을 절반 이상 손에 넣었다는 뜻.
위기.
동시에 기회.
과연 신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이 상황에서 신을 찾다니.’
세한은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싸우고 있는 것이 전지전능을 손에 넣은 신이다.
단지 기원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 뿐.
과연 지금 자신은 누구에게 기도를 한 것인가.
“차라리 너에게 기도를 하는 게 낫겠어.”
“음? 갑자기 무슨 소리냐?”
뜬금없이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세한의 행동에 이드라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의 어깨의 바로 위에서 날아가는 작은 꼬마 마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제법 여유로웠다.
저런 점은 인간에 한없이 가까워졌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아마 태생부터 그런 성격인 거겠지.
덕분에 세한도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제 단번에 끝낸다.”
퍼센티지는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부터 타임어택.
세계의 틈이 시스템에 80퍼센트 이상 인스톨되기 전에 끝을 낸다.
고고고!!
세한은 팔을 움직였다.
그에 따라 그의 머리 위에 떠있던 거대한 검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거대한 거인이 검을 손에 쥔 것처럼.
‘목표는…….’
이미르의 육신, 이마에 박혀 있는 자색의 보석.
바로 저곳에 시스템의 근본이 담겨 있었다.
세계의 틈과 연결되었으니 저 보석을 깨부수면 시스템의 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틀을 벗어난 인간, 김세한. 당신을 이 세계에서 삭제합니다.」
그 말은 아까부터 들었다.
기계처럼 반복적인 말을 내뱉는 시스템을 향해 세한이 검은 날개를 펼치며 날아갔고, 동시에 시스템의 전력을 다한 공격이 쏟아졌다.
콰콰콰콰!!
시스템의 이마에 박힌 보석에서 자색의 광선이 쏘아지며 환상의 세계를 부순다.
그뿐 아니라 날아가는 세한을 따라 무수한 구멍이 만들어지며 사각에서 마구 잡이로 광선이 쏟아졌다.
한 발만 맞아도 말 그대로 ‘삭제’시켜 버리는 힘이 담긴 광선이다.
모든 힘을 검에 집중한 세한은 저것에 휘말리는 순간 저항할 새도 없이 증발하리라.
[인스톨 57퍼센트]
세한의 손짓에 따라 거대한 검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날아오는 광선들을 마구 잡이로 튕겨낸다.
튕겨나간 광선들이 세한이 만든 세상을 부수며 검은 공간을 노출 시킨다.
[인스톨 63퍼센트]
시스템의 주먹이 허공을 두드린다.
그러자 유리창처럼 환상이 깨어지며 도리어 시스템에게 침식된다.
세한이 만들어낸 세계는, 이제 도리어 그를 집어삼키기 위해 요동쳤다.
[인스톨 69퍼센트]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도무지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다.
세한의 힘은 시스템의 공격을 받을수록 줄어들지만, 시스템의 힘은 점점 커진다.
시스템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세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항해 봤자 전부 부질없는 짓에 불과했으니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금씩 자신에게 접근하는 게 전부였다.
거대한 검을 사용해 전능의 힘을 베어 가르며 다가오는 게 끝이었다.
[인스톨 73퍼센트]
하지만.
[인스톨 75퍼센트]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인스톨 76퍼센트]
세한은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느리지만 결코 뒤로 밀리지 않고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인스톨 77퍼센트]
왜? 라는 의문을 시스템이 가졌을 때는 어느새 세한이 지척에 다가온 순간이었다.
언제 이렇게 다가왔지?
시스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외신의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한들, 인간이.
고작 인간이 전능의 힘에 저항하며 이 앞까지 도달하다니.
[인스톨 78퍼센트]
‘신’의 앞에서 검이 치켜 올려졌다.
거대한 검이 부서져 내리는 하늘을 꿰뚫으며 수직으로 치솟았다.
시스템은 자신의 내부에 소용돌이치는 의문을 무시했다.
지척에 다가오면 뭐가 어쨌단 말인가.
오히려 잘됐다. 세한이 시스템에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은 저 검에 깃든 열쇠의 힘.
세계의 틈에 거의 연결된 지금이라면 그 힘까지 통째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으아아아아!!”
우우우웅!!
온 힘을 쥐어짜 휘두르는 세한의 기합성과 함께 거대한 검이 수직으로 낙하했다.
시스템의 몸을 반으로 가를 것처럼.
[인스톨 79퍼센트]
시스템은 현재까지 얻은 전능의 힘.
그것을 사용해 세계의 뜻에 어긋나는 존재를 삭제하기 위한 힘을 내뿜었다.
그 힘이 향한 방향은 어디까지나 열쇠의 힘이 집중된 거대한 검.
저것만 사라진다면 더 이상 세한이 시스템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무기는 없었다.
열쇠를 잃어버린 외신 따위는 시스템에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콰아아아아아!!
「삭제.」
시스템의 양팔에 ‘세계의 틈’에서 얻은 전능의 힘이 집중되며 검을 향해 쏘아졌다.
자색으로 휩싸인 빛의 격류. 그것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검에 적중했고, 거대한 검을 단숨에 일소시켰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이라는 오리하르콘으로 코팅했음에도 검이 부서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3초 정도였다.
그래, 고작 3초.
시스템이 연산한 것보다 10배는 빠른 시간이었다.
“야.”
자색의 휘광을 꿰뚫으며 작은 인간이 나타났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입고 있음에도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인간’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시스템의 미간과 고작 몇 미터 남은 위치에서.
“이제 끝내자.”
세한의 오른손에는 한 자루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제법 화려한 형태를 한 검이다. 시스템은 저 작은 검에 방금 전까지 거대한 검에 깃들어 있던 열쇠의 힘이 담겨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애초에 세한은 거대한 검으로 시스템을 죽일 생각이 아니었다.
그 검은 어디까지나 미끼에 불과했다.
단 3초.
마지막에 부족했을지도 모를 3초의 시간을 벌기 위한 미끼.
「……!!」
시스템은 처음으로 가슴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동공이 흔들리고 심장을 옥죄는 것 같은 불쾌한 느낌.
이상하다. 어차피 저 검으로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스템인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저런 작은 검으로, 신격조차 남아있지 않은 세한이 뭘 하겠는가?
열쇠의 힘을 사용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분명 그럴 터다.
세한의 손에 쥔 검에서 새하얀 백광이 타오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비성검 프라가라흐.
그 검에는 린의 권능이 깃들어있었다.
바로 심판검 백야(白夜)가.
“너도 감정이 있었나?”
모든 걸 심판하는 백색의 불꽃이 타오르며 점점 크기를 늘린다.
세한의 남은 신격과, 열쇠의 힘. 그리고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의 힘까지 깃들며 백색의 불꽃은 한층 거칠게 타오른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스템의 동공은 전과 달리 확연한 ‘감정’이 느껴졌다.
“과연.”
[인스톨 79.9퍼센트]
80퍼센트가 되기 직전. 1초만 늦었다면 시스템은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존재가 됐으리라.
“……너도 신은 아니었군.”
콰직.
백색의 검이 자색의 보석을 꿰뚫었다.
거인왕의 모든 것, 강림한 시스템의 힘. 그리고 세계의 틈과 연결된 라인까지 비집고 가른다.
콰지지직!!
「───!!」
시스템의 입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괴성이 터졌다.
설마 진 건가? 세계의 법칙인 시스템이? 세계의 법칙을 손에 쥐고 전지전능에 가까운 힘을 지닌 자신이?
‘시스템의 핵은 어디지?’
보석을 부수는 순간 나오는 어마어마한 압력에 세한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단순히 허공에 구멍이 뚫린 것뿐인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상태창을 부수고 만들어냈던 작은 구멍과 달리 지금 세한의 앞에는 인간 몇 명을 삼킬 만한 거대한 균열이 만들어져 있었다. 시스템이 연결시킨 세계의 틈이다.
이 안쪽에 시스템의 핵이 있었다.
세계의 틈과 연결되며 강제로 불려온 신이라 불리던 존재가.
“저기다!!”
이드라가 손을 뻗으며 검은 공간의 끝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길에 따라 작은 길이 형성되며 핵의 위치를 나타냈다.
“땡큐!”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세한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검은 공간 내로 뛰어들었다.
당장 보석을 부숴 시스템을 그로기 상태에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세계의 틈과 연결된 이상 금방 상태를 회복할 것이다.
그 전에 시스템의 핵을 부숴야만 했다.
‘큭!’
지수를 구할 때는 한쪽 팔만을 넣었다.
그때도 끔찍한 고통을 느꼈지만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들어가는 순간 쇼크사를 할 만큼 어마어마한 고통이 세한을 덮쳤다.
‘할 수 있어.’
그러나 세한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드라가 표시한 길을 쫓아, 핵을 향해.
자신은 분명 린이나 지수처럼 어마어마한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
지금 그가 지닌 힘도 이드라와 각종 기연이 합쳐져 이루어진 우연의 산물에 가까웠다.
태생부터 그가 지녔던 힘은 지극히 미약했다.
단 하나만을 제외하고.
‘정신력.’
이드라가 처음 세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그것만이 세한이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힘이었다.
그의 정신을 부술 수 있는 건 오작 하나뿐이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
광기의 마왕이 그랬던 것처럼.
그 외에 세한의 정신을 부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세한은 백염이 타오르는 프라가라흐를 손에 쥐고 핵의 앞에 도달했다.
‘고작, 구슬인가.’
인간의 머리만 한 구슬.
이 작은 게 우주를 좌지우지하던 ‘시스템’의 핵이었다.
이미르는 과연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물론 이제는 알 수 없는 의문이다.
콰창!!
세한은 눈앞의 구슬을 향해 망설이지 않고 프라가라흐를 찔러 넣었다.
심판의 검에 꿰뚫린 구슬은 단번에 갈라지며 반으로 쪼개졌다.
본래라면 바로 ‘말뚝’을 사용해 부쉈겠지만, 구슬에 둘러진 장벽을 우선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반으로 쪼개진 핵을 말뚝으로 파괴하기만 하면…….
“이야, 이거 놀랍네.”
“……?!”
시스템의 핵이 파괴시킨 순간, 세한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드라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드라는 지금 세한의 어깨 위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경악하고 있었다.
황급히 몸을 돌리자, 세한의 앞에는 악동과도 같은 미소를 지은 소년이 서 있었다.
“설마 정말로 여기까지 도달할 줄이야. 아무리 시스템이 완벽해지기 전이라고 해도 정말 놀라워. 형.”
세한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이 공간 내에서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고통은 둘째 치고 ‘소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 인간은 이곳에서 말을 할 수 없나?”
“아버지여,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거기다 그 말투는…….”
“이 나이대의 인간은 이렇게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야. 어때? 이렇게 인간과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이라 되도록 맞춰주려고 하는데.”
이드라는 말없이 저 가벼워 보이는 소년을 응시했다.
세한의 옷깃을 꽉 쥔 작은 손이 그녀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시스템에게조차 여유를 보이던 이드라가.
“아무튼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물었나?”
반대로 소년은 지극히 여유로웠다.
“거인왕과의 약속 때문이야.”
그렇게 말한 소년은 부드럽게 웃으며 천천히 오른손을 위로 올렸다.
그런 그의 행동에 세한은 본능적으로 방금 반으로 쪼갠 시스템의 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차아아앙!!
“윽!!”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시야가 번쩍이더니 세한의 몸은 어디론가 추락하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세계의 틈은 아니었다.
익숙한 공기, 푸르른 하늘. 세한은 번쩍 눈을 뜨며 곧바로 날개를 펼치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대체 언제…….’
지금 세한이 있는 장소는 지구였다.
무언가 일어난다고 느낀 순간, 세한이 구축했던 세계가 단번에 부서지고 세계의 틈 밖으로 튕겨져 날아간 것이다.
“호오, 대단하네, 형. 내가 노리는 게 핵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리다니.”
겨우 자세를 바로잡은 세한의 앞에 소년이 떠 있었다.
그의 오른손 위에는 방금 전까지 세계의 틈에 있었던 시스템의 핵.
그 절반이 공중에 떠있었다.
“거기다 나를 상대로 절반이나 가져갈 줄이야. 칭찬해 줄게.”
그뿐 아니라 그 힘이 조금씩 소년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저런 게 가능한 존재는 세한이 알기로 단 하나뿐이었다.
“이미르가 부탁한 건 전부 회수하는 거였지만, 절반으로도 충분하려나?”
모든 외신들의 지배자.
아자토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