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287. 인간의 검(3)
1회차.
세한은 거인왕 이미르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밖에 듣지 못했다.
퍼블리셔를 지배하는 정점. 세계의 의지, 시스템의 대리자.
비록 세한은 1회차에 퍼블리셔가 있는 초상계의 근처에도 가본 적 없었지만, 갈 수 없었기에 더욱 갈망했고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죄다 긁어모았다.
붉은 하늘 너머, 검은 구멍의 안쪽.
초상계에 존재한다는 퍼블리셔에 도달하기 위해.
「그건 불가능해.」
당시 세한이 아는 이중에 가장 강한 초월자였던 혈마는 그렇게 말했다.
불가능하다. 초상계에 도달하여 이미르의 가슴에 칼을 꽂는 건 불가능하다고.
「이미르는 불사의 존재. 거기에 시스템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시스템이 직접 탄생시킨 종족인 거인들.
그리고 그들의 왕인 이미르는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설령 죽이려고 한다 해도 죽일 수 없다. 녀석을 죽인다는 건 시스템을 죽인다는 거니까.」
신과 인간의 합신에 대해 들은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이미르라면 아마 시스템과 그런 비슷한 걸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세한이 그러하듯, 혈마는 이 세계의 ‘신’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를 시스템이라 생각했다.
그럼 지금 신이라 지칭된 존재들이 플레이어와 합신할 수 있다고 한다면, 시스템은 그와 비슷한 걸 과연 못할 것인가.
시스템의 입장에서, 이미르는 그의 아바타나 마찬가지인데.
‘당신의 말이 옳았어. 혈마.’
세한은 육안으로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이미르의 육신에 긴장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퍼블리셔와 승부수를 띄우고 이미르를 죽인다.
도박에 가까웠지만 결국 세한은 전부 해냈다.
그리고 상황을 유리하게 가져오는 것에 성공했다.
그 결과, 이미르는 시간을 지체해 봐야 자신이 패배한다는 걸 깨닫고 최후의 수를 띄웠다.
바로 시스템과의 ‘합신(合神)’.
가설에 불과했던 것이 지금 현실이 되었다.
“왜, 두려운 게냐?”
그런 세한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어깨 위의 이드라가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조금.”
“이제 한 걸음만 가면 된다만.”
“그래서 무서운 거다.”
한 걸음을 남겨둔 채 패하게 될 까봐.
“그리고…….”
“그리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세한은 말을 줄였다.
어차피 그것도 저것을 쓰러트려야 답이 나올 것이다.
「외신 김세한을 삭제합니다. 삭제해야 합니다.」
시스템의 알림이 울려 퍼지며 거대한 이미르의 육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거인왕’의 이름으로 저것을 부를 수도 없었다.
시스템에게 모든 걸 내어준 육신을 이미르라 불러야 하는가?
“삭제는 네가 되어야겠지.”
「섭리를 어지럽히는, 우주의 질서를 망가트리려는 악. 김세한.」
“멋대로 남을 악이라 정하지 마라.”
놀랍게도 혼잣말처럼 울려 퍼지던 알림은 세한의 말을 들은 것처럼 ‘인간의 대화’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지성체가 발전하게 되면 자원의 고갈로 이어지고, 이것은 우주의 불균형을 야기합니다.」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지?”
「우주는 유한합니다. 이 우주를 무한에 가깝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자원의 소모를 억제하고, 그 과정에서 생명체들에게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순환시켜 그것을 자원으로 변환시킵니다.」
자원 소모의 억제란 문명이 발전된 별을 게임으로 지정하고 멸망의 시나리오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스템은 거기서 퀘스트를 부여하며 거기서 발생하는 수많은 인과를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
그것이 바로 포인트다.
「지성체의 탄생은 조건이 갖춰지는 한 무한합니다. 무한한 것을 이용하여 유한한 우주를 유지하는 건 당연합니다.」
시스템은 모든 걸 영원히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향으로 결정한다.
이미르가 만들어낸 유토피아.
그건 시스템의 뜻이기도 했다.
“지랄.”
세한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멋대로 남의 끝을 정하지 마라.”
「무한정으로 늘어나는 지성체는 우주의 수명을 앞당깁니다. 멸망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니까 지랄하지 말라고.”
세한은 새하얀 백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미르’의 눈이 아닌, 녀석의 이마에 박혀 있는 자색의 보석을 보았다. 검은 문신이 연결되어 있는 자색의 보석.
바로 저곳에 시스템의 근원이 들어와 있다.
“어차피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우리도 분명 있어. 하지만 그걸 너 같은 새끼가 정할 이유는 없지. 그리고 그건 우주도 마찬가지다. 유한하다면 결국 그게 끝이 있는 거지.”
생명에서 발생하는 인과를 이용해 무한하게 우주를 유지하려는 시스템의 뜻은 결국 모순된다는 것이다.
“그걸 네가 뭐라고 멋대로 늘려?”
「우주의 유지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 그렇게 생각만 하라고. 우리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이 우주에서 탄생한 존재인 이상 지성체 역시 책임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말이 계속 제자리에서 맴도는 기분이었다.
세한은 모순된 신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묻자, 그럼 너는 어때?”
「?」
“너는 무한하냐? 아니면 유한하냐?”
「우주가 존재하는 한 무한합니다.」
하지만 우주는 유한하다.
무한에 한없이 가깝지만 유한하다. 그렇다면, 결국 저 대답도 모순된 말이었다.
“아니.”
세한은 천천히, 거대한 이미르의 육신을 손에 넣은 시스템을 바라보며 말했다.
“틀렸어.”
시스템은 분명 무엇보다 전지전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건 가장 가까울 뿐, 전지전능하다는 건 아니다.
그 작은 차이가, 지금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시스템은 기원의 대상으로서의 신이 되지 못한다.
촤르르륵!!
세한의 손이 허공을 훑자, 세계가 일변했다.
붉은 하늘, 그리고 하늘에 뚫린 구멍.
세한의 기억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1회차 엔딩 ‘고독한 세계’였다.
「적의를 감지. 요격에 들어갑니다.」
‘대화’의 종결을 알리며 일변한 세계 속에서 거대한 이미르의 다리가 움직였다.
만약 이곳이 평범한 세계였다면 그것만으로 땅이 뒤집히고 서울에 있던 모든 건 쥐포가 되어사라졌으리라.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이 세계는 모두 세한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으니까.
“승부는 한순간에 내야 한다! 저걸 내버려 뒀다가는…….”
“계속 가둬두기 힘들겠지.”
세한도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전력으로 모든 걸 쏟아부어 단번에 끝을 낼 생각이었다.
여태 아껴둔 모든 신격을 아낌없이 사용할 때였다.
“잡일은 부탁할게.”
“맡겨두거라.”
이드라의 대답과 함께 세한은 거대한 육신을 움직이는 시스템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고오오오오!!
붉은 하늘에 구멍이 뚫린다.
뚫린 구멍에서는 거대한 운석이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벨제부브에게 떨어트렸던 운석. 그것이 하나도 아닌 수십 개가 시스템을 향해 떨어졌다.
「삭제합니다.」
하나만 떨어져도 빙하기를 불러올 만한 운석들이 떨어져내 렸지만 시스템은 지극히 담담했다. 애초에 감정이 존재하지 않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기이잉!!
자색의 보석에 빛이 집중되며 운석들을 향해 빛이 쏘아졌다.
보라색 빛줄기는 붉은 하늘을 수놓으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건 정확히 운석들이 떨어지던 장소였다.
콰콰콰쾅!!
시스템이 쏘아낸 빛줄기에 적중당한 운석들이 부서지고, 혹은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부서진 파편이 시스템의 몸을 두드렸지만, 당연히 시스템은 지극히 멀쩡했다.
도리어 시스템은 재차 후속 공격을 가하려던 세한을 보았고, 그와 동시에 세한의 몸이 하늘을 향해 튕겨지 듯 날아갔다.
‘중력을 바꿔버렸어?!’
이 세계가 환상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지구 밖으로 튕겨져 날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다 시스템이 세한에게 가한 건 단순한 중력의 반전만이 아니었다.
공기마저 소실되어 입 밖으로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세한은 몸에 느껴지는 압력을 견디며 반전됐던 중력과 소실된 공기를 원상태로 회복시켰다.
본래대로 돌아온 중력에 하늘로 날아가던 세한의 몸이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지상을 향해 떨어지며 세한은 자신의 주변에 닥치는 대로 무기를 생성하여 시스템을 향해 쏘았다.
마치 비처럼 쏟아지는 공격에도 시스템의 몸에 둘러진 장벽은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단순한 검과 창, 총과 대포. 심지어 수십 발의 핵폭탄이 떨어져 내렸다.
연달아 치솟아 오르는 버섯구름과, 막대한 열량. 그리고 후폭풍이 일어났지만 시스템은 원래 있던 그곳에 서 있었다.
‘그래도 장벽이 조금 약해졌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쏟아낸 덕에 시스템의 몸을 두르던 방어벽이 약해진 게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눈치챈 이드라가 말했다.
“곧 복구될 거다.”
“얼마나 걸리지?”
“1분.”
아무리 외신의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이곳이 세한이 만든 세계라고 해도 개인이다.
우주 전체에 영향력을 지니는 시스템에 비하면 실로 미약하다.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스템’ 그 자체를 이야기했을 때다.
지금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이미르의 육신을 대신 움직이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근원은 분명하게 저 보라색 보석과 연결되어있었다.
당연히 한 번에 시스템이 사용 가능한 힘도 이미르의 육신과 저 보석이 견디는 한도 내.
방어벽을 회복하는데 ‘1분이나’ 걸리는 게 그 증거다.
세한은 이를 악물고 이미르의 거대한 육신 주변을 날아다니며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다.
직접 무기를 휘두르는 건 물론, 공간을 넘나들며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가했다.
운석도, 핵분열도, 용암의 바다에서도 시스템은 모든 걸 견뎌냈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도 남의 몸이야. 분명 틈이 생긴다.’
세한은 점차 고갈되기 시작한 자신의 신격을 느꼈다.
신격이 사라진 세한은 평범한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분명 이드라와 합신한 것도 풀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그 전에 끝을 봐야 했다.
「삭제, 삭제, 삭제」
무미건조한 알림이 울려 퍼지며 세한이 가하는 공격들이 전부 무효화되고 사라졌다.
삭제되는 건 세한이 가하는 공격만이 아니었다.
세한의 환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조차 붕괴시켰다. 세한은 진심으로 이곳이 지구가 아님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여기가 아니었다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삭제’라는 알림 한 번에 지워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아가 별의 멸망도 몇 마디의 알림이 들린 것만으로 결정되었겠지.
세한은 부서지는 세계를 억지로 창조시켰다.
붉은 하늘을, 황폐한 대지를.
‘고독한 세계’는 세한에게 있어 가장 인상 깊은 기억 중 하나이기에 몇 번이 부서져도 금방 복구시킬 수 있었다.
생각보다 거센 세한의 저항에 시스템은 보다 확실하게 세한을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을 가져오기로 했다.
「외신 김세한을 삭제시키기 위해 ‘세계의 틈’을 인스톨합니다.」
세계의 틈.
지수가 갇혀 있던 장소.
시스템이 지닌 전능의 힘이 숨겨진 근원.
그 말이 들린 순간 세한은 눈이 번쩍 떠졌다.
이곳은 자신의 세계이기에 명확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스템에게 연결되는 새로운 무언가를.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뻗어오는 전능의 힘을.
동시에 깨달았다.
그것이 시스템에게 인스톨되는 지금.
찰나와도 같이 짧은 이 순간이.
바로 자신이 기다리던 틈이라는 걸.
“──이드라!!”
세한의 외침과 함께 이드라가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뒀던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세차게 회전했다.
마치 ‘광기의 마왕’에서 마계로 향하는 문을 열었을 때와 같이.
이드라는 지금 어딘가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시스템은 저 통로가 ‘지구’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만약 이미르였다면 그런 세한의 행동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왜 기껏 시스템과 지구를 분리하고, 이제와 지구로 향하는 통로를 열었단 말인가?
만약 저런 짓을 한다면 시스템이 곧바로 지구로 복귀하려고 할 텐데.
그 당연한 의문을 시스템은 가지지 않았다.
시스템에게 감정이란 없었으니까.
도리어 열려버린 통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지구에는 시스템인 자신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게 전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구와의 재연결 확인, 열린 통로를 통해 지구로 복귀──」
하지만 그런 시스템의 알림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여태까지 상처하나 입지 못했던 2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육신.
「──」
그 가슴팍을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온 무언가가 꿰뚫었으니까.
심지어 그것은, 수천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