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286. 인간의 검(2)
죽음을 부여하는 말뚝.
오직 불멸자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
꿈과 환상을 다루는 외신, 꿈의 마녀 이드라가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비장의 수.
이미르의 머릿속엔 그것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겨눠진 순간, 그런 정보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니알라토템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던 중 알게 된 저것은 이미르에게 있어서도 최중요 경계대상 중 하나였다.
거인 중에 ‘불멸자’의 영역에 이른 건 오직 이미르뿐.
다른 외신들이 그러하듯 이미르에게도 죽음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닌, 시스템의 대리자가 되며 강제적으로 죽음이란 개념을 삭제시킨 것이다.
카가가각!!
“칫!”
세한은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며 튕기는 말뚝에 혀를 찼다.
역시 이미르는 이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뚝을 막을 수 있도록 그의 몸에 항시 두터운 장벽이 전개되고 있었다.
일반적인 장벽이 아닌, 시스템의 ‘방화벽’과 같이.
“내가 그걸 모를 거라 생각했나?”
모를 리가 있나, 단지 한번 실험해 봤을 뿐이다.
하지만 역시나 말뚝은 이미르의 장벽을 뚫지 못했다.
세계의 법칙을 깨부술 정도의 힘이 아니라면, 저 장벽을 부술 수 없으리라.
쉬이이익!!
이미르의 손짓에 따라 검은 사슬들이 허공을 향해 솟구쳤다.
그뿐이 아니라 이미르의 주변에는 자색의 불꽃이 퍼지며 비처럼 불의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 미친놈이!”
이 주변에는 자신만 있는 게 아니라 퍼블리셔의 병력들과 지구의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공격에 세한은 욕설이 절로 튀어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해보자 이거냐?’
물량에는 물량.
세한은 양손을 좌우로 펼쳤다. 그러자 허공에 수많은 허수공간이 열리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불의 세례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짝!
불의 세례가 멈추자 세한은 양손을 박수를 치며 마주쳤다.
그러자 허수공간이 주르륵 사라지며 이미르의 코앞에 거대한 구멍이 나타났다.
딱!
그리고 그 구멍을 향해 세한이 손가락을 튕기자, 기다렸다는 듯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콰콰쾅!!
그 불꽃은 방금 이미르가 사용했던 자색의 불꽃이 한데 뭉친 것이었다.
불꽃이 이미르의 몸을 강타하자 그 충격에 이미르의 몸이 휘청였지만, 워낙 거대한 이미르의 몸인지라 말 그대로 조금 흔들리는 게 끝이었다.
“큭!!”
하지만 이미르에게는 그 자체가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었다.
“인간 주제에 지나치게 과분한 힘을 손에 넣었구나!”
그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건 열쇠를 이용한 현실조작.
거기에 이미르의 막대한 신격과 마력이 합쳐지면 전능에 가까운 신을 발휘하게 된다.
그야말로 천지창조에 가까운 힘.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며 손짓 한 번이면 지상과 하늘을 잇는 거대한 토네이도가 생겨난다.
거기에 시스템의 간섭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패널티를 가한다면 이 우주에 어떤 존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여태까지는 그랬다.
‘어째서 안 되는 거지?’
그러나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받아쳤다.
세계의 법칙을 조정하는 열쇠의 힘. 현실조작이라는 전능에 가까운 힘도, 놈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세한은 환상을 이용해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어찌 보면 현실조작과 비슷하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힘이 부쳤다.
녀석의 상상이 닿는 한,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할 신격과 마력이 있는 한 세한의 조작할 수 있는 환상에 한계란 없었다.
피피피핑!!
하늘을 가르며 자색의 빛줄기가 쏟아지고, 이미르의 손짓에 치솟은 산과도 같은 대지가 인간을 벌레처럼 뭉개려 했지만, 그때마다 세한의 힘이 그것에 맞서 상쇄시켰다.
빛줄기는 허수공간에 삼켜졌고, 대지는 평평해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도, 모든 걸 날려버릴 폭풍도.
‘쓰러트릴 수 없다.’
이미르는 조금씩 자신이 초조해지는 걸 느꼈다.
거대해진 육신으로 이 작은 별을 짓밟아 부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열쇠의 힘을 사용해도 상대가 같은 열쇠를 지닌 이상 한계가 있었다.
시스템의 권한도 하필 놈이 외우주의 신과 하나가 되는 바람에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그럼 무엇으로 저걸 쓰러트려야 하지?
생전 처음, 이미르는 생각해본 적 없었던 의문을 품었다.
그가 가진 권한.
그가 가진 힘.
누구나 머리를 조아릴 것들 앞에서도 상대는 쓰러지지 않았다.
“적당히…….”
이미르는 처음으로 ‘울분’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신중하게 상황을 이끌고 왔음에도 모조리 뒤집혀 버린 현재.
자신의 계획을 뒤집은 자가 눈앞에 있음에도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
그토록 믿었던 시스템의 권한도 상대에게 닿지 못한다는 분함이 이미르의 가슴속에 불꽃처럼 일어났다.
“적당히 하란 말이다──!!”
분명 상대와 자신의 힘은 길항한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동수를 이룬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플레이어 김세한에게 패널티를 가합니다]
[플레이어 김세한에게 패널티를 가합니다]
[플레이어 김세한에게 패널티를 가합니다]
콰직!
[플레이어 김세한에게 패널티를 가……]
콰지직!!
[플… 세…]
세한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금색의 왕관이 빛나며 허공을 가득 채우던 알림창이 하나씩 부서진다. 시스템의 권한마저 극복해가는 그의 모습에 이미르는 돌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시스템은 그에게 패널티를 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이제 하나뿐.
낭비할 시간 따위는 남지 않았다.
이젠 자신도 필사의 각오로 덤벼야 할 때였다.
“시스템이여!!”
이미르 이마의 보석에서 자색의 광채가 뿜어지며, 세한을 뒤쫓던 검은 사슬들이 그의 몸에 감긴다.
“거인왕 이미르가 명한다.”
신중한 그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이상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세한과 동수를 이루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패하게 된다.
믿었던 외신들도 지금 악마들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그뿐인가? 정의의 여신이 가세하며 도리어 압도당하기 시작했다.
‘아자토스……!’
그 빌어먹을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싸우라는 명만 내리지 않았어도.
그는 지금 상황을 그저 즐겁게 보고 있을 것이다.
다른 외신들이 패하든 말든 그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으니까.
설령 그들이 죽을 위기에 처하더라도 아자토스는 지켜보리라.
그가 움직이는 건 자신과 약속한 마지막 때뿐.
‘그래, 정말로 마지막…….’
만약, 정말로 만약 퍼블리셔가 패하게 됐을 때를 가정하여 만들어준 최후이자 최악의 수.
이미르는 정말 되도록 그것을 사용할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설령, 자신의 모든 걸 잃게 될지라도.
“나를, 삼켜라.”
검은 사슬이 그의 몸을 우드득 죄었다.
몸에 파고든 사슬은 마치 문신처럼 변하며,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가 이마의 보석까지 뻗어갔다.
자신이 가진 열쇠의 힘, 거인왕 이미르로서 이룬 모든 걸 걸고 반드시 세한을 죽인다.
이곳에 있는 이들만 쓰러트린다면 퍼블리셔는 어떻게든 재건할 수 있으리라.
이마 중앙의 박힌 보라색 보석의 주위로 검은 사슬의 문양이 그려지며 이미르의 귓가에 무수한 알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근간에 접촉합니다.]
[세계의 틈에 접속합니다.]
[동기화 중]
마치 플레이어와 같이.
알림이 들리는 동시에 이미르의 눈동자가 백색으로 물들며 사라졌다.
[우주의 섭리를 거부한 이들을 삭제합니다.]
이성도, 감성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의지.
그 본질에 접촉하며 ‘이미르’라는 존재의 의식을 집어삼켰다.
이제 남은 건, 오직 세계의 의지.
시스템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인형이다.
고고고고!!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땅이 흔들리는 게 아니다.
세상 자체가 흔들거리며 진동이 일어났다.
그것을 가장 먼저 느낀 건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으로 이미르의 몸을 억제하던 이드라였다.
“으극!!”
짧은 비명과 함께 이드라의 머리 위로 샤이팅 트라페조헤드론이 떨어졌다.
“조심해라! 녀석이 시스템과 완벽히 한 몸이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모른다. 애초에 본 적 없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시스템이 탄생시킨 종족이니 못할 것도 없겠지.”
인간과 신도 하나가 되는 마당에 애초에 시스템에서 파생된 거인이 못할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콰콰콰콰콰!!
천 미터에 이르렀던 거대한 이미르의 육신이 한층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뒀다가는 녀석의 발에 서울 전체가 깔아뭉개지는 건 물론, 한발자국 내딛는 것만으로 한반도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드라, 혹시 저놈을 환상 속에 가둘 수 있나?”
“……못하면?”
“좆되는 거지.”
“얄미운 말만 하는구나.”
이드라는 세한의 귀를 쭉 잡아당기며 눈을 새치름하게 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세한은 피식 웃었다.
“사실상 두 개의 열쇠가 있으니 못할 것도 없다고 보는데?”
“그대가 할 일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나도 네가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말하지 않았어.”
꿈과 환상의 여신 이드라, 그녀는 말했다.
꿈과 환상이라면 어디까지나 닿는 법이라고.
이드라는 그런 세한의 말뜻을 이해한 듯 입을 굳게 닫았다.
그리곤 난감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해보는 수밖에 없군. 하지만 각오해라, 그대의 힘을 잔뜩 끌어낼 테니까.”
재차 허공으로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떠올랐다.
웅웅웅!
니알라토텝이 만들어낸 모조열쇠. 이곳의 열쇠를 모방했지만 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그것과, 린에게 넘겨받은 열쇠의 반쪽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미르의 몸이 배로 커졌다.
덕분에 지상에서 싸우던 이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저 발에 짓눌려 압사해 버릴 게 분명했으니까.
현재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싸우고 있는 건 지수를 비롯해 악마와 외신들뿐이었다.
“서둘러!!”
“쉽게 말하지 말라니까!”
비명과 같은 이드라의 외침과 함께 세한의 머리 위의 왕관의 빛이 진해졌다.
세한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안에 들어찬 두 가지 권위를.
“세한!!”
기다렸다는 듯, 이드라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세한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중지와 엄지를 교차시키고.
딱!
가볍게 튕겼다.
콰아아아아아!!
시야를 가득 물들이는 백색의 섬광.
바다와 같이 느껴졌던 신격의 양이 확연히 줄어드는 게 느껴지며 세한의 의식이 순간 아찔해졌다.
‘성공, 했나?’
밝은 섬광을 코앞에서 본 탓에 시야가 조금 흐릿해졌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이자 세한은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가 서울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미르는?”
제대로 안으로 끌고 들어온 건가?
만약 실패했다면 서울은 당연하고 한국이 아작났으리라.
“으, 으음. 제대로 끌고 들어온 것 같구나.”
귓가에 당황한 이드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시선은 위를 향해 있었다.
마치 깎아지듯 높은 절벽을 보는 것처럼.
“오우…….”
순간 세한은 지구에 강림했던 이드라의 환상을 떠올렸다.
별을 한 줌에 쥘 만큼 거대해진 이드라. 물론 지금 이드라는 그보다는 당연히 작았지만 족히 수천 미터는 될 법한 크기였다.
“저거, 몇 미터나 될까.”
“대략 20킬로미터구나.”
단번에 눈대중으로 크기를 어림짐작한 이드라의 말에 세한은 말을 잃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거의 오존층에 닿겠는데?’
너무 까마득한 크기라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문제는 저것도 전부 커진 게 아니라는 거다.
“지금 잠시 멈췄지만 내버려 두면 별보다도 커질 거다.”
“정말 정도라는 게 없네.”
“그러게 말이다.”
[환경변화를 인식했습니다. 이 장소는 지구 외 차원. 외신의 간섭으로 판단됩니다.]
시스템의 알림이 울려 퍼졌다.
귓가에는 단순한 ‘신호’처럼 들렸지만 세한의 귀에는 정확히 언어로서 전달되고 있었다.
[거인왕 이미르의 본체에 간섭한 ‘외신’을 확인.]
백색으로 물든 이미르의 눈이 세한을 향했다.
워낙 거대한 몸인지라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위압감을 주었다.
[현 우주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판단됩니다. 거인왕 이미르의 요청에 따라 상대를 배제합니다.]
그것은 몇 번이나 들은 퀘스트의 알림과도 같았다.
마치 어떤 몬스터나 보스를 죽이라는 것처럼.
‘……슬슬 유엔에게 쪽지를 보내야겠군.’
초조해진 이미르가 시스템의 힘을 빌리리라는 건 예측했던 바였다.
설마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지만 결판을 내야 한다는 점은 같았다.
오직 우주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흑과 백.
이제 시스템을 쓰러트리기까지는 단 한 걸음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