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285. 인간의 검(1)
“티, 팀장님 당장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건물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디어사이드 길드의 사원들이 소리쳤다. 이대로 있다가는 무너지는 건물과 함께 압사당할 게 분명했다.
“……어디로?”
“그, 그건.”
김경수 팀장의 말에 젊은 사원은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죽을 뿐이다.
창밖을 보면 이미 평범한 건물들은 죄다 부서져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 디어사이드의 건물은 세한이 막대한 포인트를 들여 개조해 둔 덕에 여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하, 하하. 마치 재난 영화에서나 보던 것 같네요.”
억지로 웃으며 말하는 다른 사원의 말에 대부분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죽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겨우 복구됐던 서울의 정경은 이미 죄다 무너지고 파괴되어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아니, 전쟁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황폐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고고고고!!
“으으으! 죽기 싫어!”
“살, 살고 싶어.”
다들 플레이어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왜 디어사이드에 입사했을까 후회하는 이들도 있었다.
만약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다른 일반인들처럼 르뤼에로 대피해 있었을 텐데.
“어차피 우리가 지면 전부 죽는다.”
그런 사원들을 향해 김경수 팀장이 말했다.
그도 아직 젊은 한창 때의 나이다.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의 책임자.
세한도, 이드라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까지 흔들린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터질 수도 있었다. 어찌됐든 현재 이 지구를 퍼블리셔에게서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건 운영실이 계속 지구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니까.
콰콰쾅!!
“아, 안 돼!”
거대한 거인이 발을 굴렀다.
분명 저자가 퍼블리셔의 우두머리인 이미르겠지.
자색의 불꽃에 휩싸인 거인이 땅을 짓밟자 대지가 마치 헤일처럼 치솟으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죽는, 건가?’
거미줄처럼 갈라지는 대지가 디어사이드의 건물이 있는 장소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더불어 갈라진 틈에서는 자색의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워낙 현실감이 없는 일이라 김경수 팀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런 괴물들에게 인간이란 정말 벌레와도 같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이젠 괜찮아요.”
그때 김경수 팀장의 귓가에 다정한 음성이 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왜, 왜 그러십니까?”
“이봐, 방금 못 들었어?”
“예? 뭐를……?”
겁에 질린 다른 사원들은 정말로 자신이 들은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나도 명이 꽤…… 질기네.”
“무슨 소립니까?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이미 자색의 빛이 디어사이드 건물을 뒤덮고 있었다.
길드의 방벽이 보호해 주고 있었지만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건물은 더욱 세차게 흔들렸고, 이미 서 있는 사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마다 몸을 둥글게 말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
멍하니 김경수 팀장은 중얼거렸다.
방금 자신이 들었던 목소리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이젠 괜찮아.”
“팀장님?”
사원은 김경수 팀장이 실성한 건가 싶어 눈을 찌푸렸다.
콰지지직!!
“으아아악!!”
방벽이 부서지자 사원들은 눈을 질끈 감고 충격에 대비했다.
부디 고통 없이 한 번에 죽기를, 그렇게 바라며 몸을 웅크렸다.
“……?”
그러나 어째서인지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방금 전까지의 진동이 거짓말처럼 멈춰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어났다.”
어리둥절한 사원들과 달리 김경수 팀장은 감격한 얼굴로 계속해서 창밖을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충격으로 부서지고 있었던 창문은 무언가에 베인 것처럼 수직으로 갈라져 있었다.
“정의의 여신이.”
그들의 눈앞에는 금색으로 이루어진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들을 지켜주던 장벽이 아닌, 정의의 여신이 만든 새로운 장막이.
***
‘진동이 멈췄다?’
이미르는 땅속에 침투해 뻗어나가던 자신의 신격이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 자신이 사용한 건 평범한 신격이 아니다.
열쇠의 힘을 사용한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시스템의 힘을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세한이라고 해도 열쇠의 힘이 적용된 이미르의 신격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설마……?”
이미르는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하필이면 딱 지금 깨어났다고?
“네가 알람을 그렇게 크게 틀었는데 당연하잖아.”
그런 이미르를 보며 세한이 이죽거렸다.
세한 역시 붕괴되던 대지가 진정된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이미르의 눈에 보였다.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금색의 빛을.
그리고 그 금색의 빛을 쫓아 떨어지는 하나의 유성을.
황도 12궁, 천칭좌 리브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뿐이다.
콰아아아아!!
세한의 옆을 무언가가 스쳐지나간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르의 몸이 떠올랐다.
천 미터가 넘게 거대해진 그 거대한 육신이 붕 떠오르며 크게 밀려났다.
무언가가 그의 가슴 정중앙에 격돌했기 때문이다.
“큭!!”
장벽이 몸을 보호하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충격에 이미르는 혀를 내둘렀다.
‘더 강해졌다.’
반고를 죽이고 그 힘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건가?
이미르의 앞에는 금색의 날개를 펼친 정의의 여신이 있었다.
손에는 천칭검 리브라를 들고, 머리에는 금색의 왕관을 쓴 여신.
오직 인류의 정의를 수호하는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또 일시적으로 몸을 성장시켰구나.”
“네. 조금 늦어서 죄송해요.”
반고를 죽일 때 일시적으로 성장했던 린의 몸은 후에 다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 린의 모습은 10대 후반 정도.
분명 그때처럼 일시적으로 몸을 성장시킨 게 분명했다.
보다 전투에 적합하도록.
“아니, 딱 좋아.”
세한은 씩 웃으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이미르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쪽에는 열쇠의 반쪽이 추가되었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사용하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린의 합류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다.
“린, 왕관을 잠깐만 내게 넘겨줄 수 있어?”
“네?”
“저건 내가 맡으면 되지만, 너는 저들을 도와줬으면 하거든.”
세한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이쪽에서는 제대로 보기 힘들지만 린의 시간이라면 충분히 볼 수 있으리라.
“악마? 왜 악마가 이곳에 있죠? 자, 잠깐만요. 저건 지수 언니예요?”
계속 잠들어있던 린은 악마가 왜 이곳에 있는지.
그리고 지수의 머리 위에 있는 검은 왕관이 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불어 그런 그들과 싸우고 있는 ‘외신’들도.
린은 혼란스러웠지만, 대략적인 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싸우고 있는 양상만 보더라도 누가 아군인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왕관을 넘겨드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인간은 열쇠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거지?”
“……예.”
“괜찮아. 지금 내 몸은 외신의 육신이라서. 그리고 열쇠는 내가 아닌 이 녀석이 다룰 거라 전혀 상관없다.”
“이 녀석?”
린은 여기에 또 누가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다가 세한의 어깨 위에서 손을 흔드는 작은 여신을 발견했다.
그녀가 이드라라는 걸 린은 바로 알아차렸다.
“합……신하신 건가요?”
“그래.”
“…….”
정말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다. 린은 잠시 작은 이드라와 세한을 번갈아 본 뒤에, 천천히 자신의 왕관으로 손을 뻗었다.
“알겠어요.”
──파앗!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린의 머리 위에 있던 금색의 왕관이 세한의 손으로 옮겨줬다.
“땡큐. 쓰고 나면 돌려줄게.”
“아뇨, 꼭 돌려주시지 않으셔도…….”
“아니, 이건 나보다 네가 사용하는 게 맞아.”
단지 지금 상황에선 힘의 분배가 필요할 뿐이다.
‘아자젤이 없는 이상, 린이 간섭해야 할 테지.’
어째서 아자젤이 움직이지 않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 적절하게 맞춰지고 있는 악마와 외신의 균형은 린이 간섭하며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 열쇠의 힘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세한은 이미르의 권한에 맞서기 위해선 열쇠가 필요했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은 이미르의 몸이 커지는 걸 억제하는 데 사용한 상태였으니까.
“그럼 저는 저쪽으로 가면 되는 건가요? 아저씨 혼자서 괜찮으세요?”
“괜찮고말고. 이것까지 있잖아.”
세한의 손에서 흡수된 금색의 빛은, 천천히 그의 몸을 타고 흘러 머리 위에서 금색의 왕관을 만들었다. 린의 머리 위에 있던 열쇠의 반쪽이다.
“그럼 부탁할게.”
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색의 빛으로 휩싸인 린은, 단숨에 세한에게서 멀어져 우선 지수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미 그쪽은 지수가 압도하고 있었던 터라 금방 정리가 되리라.
“그럼…….”
세한은 다시 이미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조용히 기다려 주나 싶었더니, 시스템에게 권한을 요청하고 있었냐?”
“남은 열쇠의 반쪽을 얻게 될 기회를 얻었으니 말이야.”
자색의 불꽃에 휩싸인 이미르는 천천히 허공을 그러쥐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허공이 부스러지며 새까만 공간이 생겨났다.
‘저건.’
단순히 공간을 어그러트린 게 아니다.
저 검은 구멍은 세한에게도 익숙했다. 바로 세계의 틈.
우주의 근원, 시스템으로 연결된 구멍이다.
세한이 직접 손을 넣어 지수를 구했던 장소.
“같은 열쇠의 반쪽을 사용한다고 해도 너와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거인은 시스템이 세상을 관리하기 위해 탄생시킨 존재.
아무리 열쇠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인들의 왕인 이미르가 지닌 권한에는 미치지 못했다.
만약 스스로의 존재마저 건다면, 이미르는 시스템과 반쯤 하나가 되는 것도 가능했다.
바로 지금처럼.
[당신은 이제부터 플레이어입니다.]
“……?!”
이제는 들릴 일없는 알람이 들리며 세한의 몸이 급격히 무거워지는 걸 깨달았다.
시스템을 간섭해 이미르가 억지로 세한을 플레이어로 바꾸려는 것이다.
당연히 세한은 외신에 도달한 상태였기에 플레이어가 되지는 않았지만, 시스템은 억지로 세한을 ‘플레이어’로 분류시켰다.
[퀘스트를 실패하여 막대한 패널티가 당신에게 가해집니다!]
“뭐?”
퀘스트를 실패하다니?
애초에 퀘스트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이 또한 시스템의 힘이리라.
콰차차창!!
퀘스트가 실패했다는 말과 동시에 주변의 공간이 부서지며 시커먼 사슬들이 튀어나왔다.
[퀘스트를 실패하여 플레이어 김세한은 사망합니다.]
“누구 멋대로!”
설마 권한을 상승시켜 여기까지 할 수 있을 줄이야.
뭔가 더 있으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 린에게서 열쇠를 받는 게 정답이었다고 세한은 생각했다.
아니었다면 시스템의 힘에 저항하는 게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촤르르르륵!!
‘닿으면 단순히 잡히는 걸로 끝나지는 않겠지.’
방금 들린 메시지는 무려 사망이다.
까딱하면 바로 죽는다.
“계속해서 그대의 몸을 플레이어로 바꾸려고 시스템이 간섭 중이다. 완벽히 벗어날 때까지는 몸이 무거워질 게다!”
이드라의 외침이 들렸지만 대답할 정신은 없었다.
사방팔방 날아드는 검은 사슬을 피하기도 바빴으니까.
‘이 사슬이 영향을 주는 건 나뿐인가.’
날아다니는 사슬들을 쳐내자 지상으로 떨어지며 몇 명이나 되는 별자리나 플레이어의 몸에 닿았다. 하지만 사슬은 그들의 몸을 연기처럼 통과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주변의 반응을 보면 영향을 주는 건 둘째 치고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마 세한에게 지정된 퀘스트 패널티이기 때문이다.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세한은 지상을 향해 손을 뻗어 당겼다.
그러자 지면이 융단처럼 당겨지며 이미르가 균형을 잃었다.
물론, 이미르는 그 정도로 넘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세한에게 날아들던 사슬들의 움직임이 크게 흔들렸다.
세한은 그 틈을 노려 이미르를 향해 가까이 날아갔다.
“잔재주는 그만 좀 부려라!”
그렇게 외친 세한의 주변에 검은 허수공간들이 주르륵 열렸다.
허공에 열린 공간들에서는 두터운 포대가 늘어서며 빛을 머금었다.
바로, 페트로이아에서 직접 공수해 온 전함의 포대다.
가장 발전된 별인 페트로이아의 전함은 인간이 아닌 신들의 기술까지 들어가 있었다.
당연히 저 포대의 위력은 신들에게 타격을 가할 만큼 절륜한 위력을 자랑했다.
그야, 신들간의 전투에 대비하여 만든 물건들이었으니까.
콰콰콰쾅!!
시퍼런 빛이 뿜어지며 이미르의 몸에 적중했다.
치직, 치지직.
‘방벽 한번 더럽게 단단하네.’
린의 검격에도 버텼던 이미르의 장벽이다.
전함의 포격에도 흠집하나 나지 않았다.
“내가 가진 능력이 시스템을 부리는 것뿐이라 생각하나?”
포격으로 생긴 뿌연 연기의 틈으로 이미르의 주먹이 세한을 향해 뻗어졌다.
크게 발을 내디디며 뻗어진 주먹은 반고의 움직임을 무척 닮아 있었다.
거대한 발이 진각을 내딛자 폭탄이라도 터진 것과 같은 폭음이 일어났다.
콰콰쾅!!
이미르의 주먹에 적중당한 세한의 몸이 대각선을 가르며 지상에 떨어졌다.
포탄처럼 떨어진 세한의 몸은 땅을 반으로 가르며 수백 미터를 넘게 굴러서야 멈췄다.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세한을 향해 검은 사슬들이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덮쳤다.
“……?”
너무 손쉽게 사슬들에게 삼켜진 세한의 모습에 이미르의 눈이 찌푸려졌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이미르가 손을 들어 사슬들을 다시 구멍 속으로 집어넣자, 방금 전까지 세한이 있던 장소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도 가진 능력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말이야.”
바로 옆에서 세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자, 그의 얼굴 바로 옆에 세한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이미르는 그제야 방금 자신에게 얻어맞고 날아간 게 세한이 만든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거기다…….”
바로, 은색으로 빛나는 파일벙커를.
“맞으면 죽는 걸 가진 건 너뿐이 아니거든.”
1회차의 이드라가 시공을 넘어 세한에게 전해준 죽음을 부여하는 말뚝.
그것이 이미르를 향해 사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