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
283. 결전(2)
퍼블리셔와 지구.
본디 싸움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어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미르의 외침과 함께 시작된 싸움은 지금 동등하게 맞부딪치고 있었다.
아니, 도리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신격을 지닌 별자리들과 거인들.
그들은 평범한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분명 강대한 존재였지만, 상대가 악마나 신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건 사기잖아’
이리 자리에 속한 루프스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발톱을 휘두르고 있었다.
금방 끝날 것 같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역전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땅의 빛을 다시 밝히게 될 줄이야!!”
하하하! 유쾌한 외침이 하늘에서 울리며 불꽃으로 휩싸인 전차가 하늘을 가른다.
그 전차를 막기 위해 마수들과 하늘을 날 수 있는 이들이 막으려 했지만 속수 무책이었다.
‘아, 아폴론!’
방화벽이 해제되며 수많은 신들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아폴론은 이 서울의 땅에 내려선 신 중 하나였다.
최상급 신격을 지닌 신.
그를 정면에서 막을 수 있는 신은 현재 퍼블리셔 측 세력 중에 외신과 소수의 거인뿐이었다.
“비키렴.”
“……?!”
하늘을 누비는 태양전차를 바라보던 루프스의 귀에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돌아보기도 전에 루프스의 시야가 빙그르르 회전했다.
‘어.’
루프스의 시야에 어째서인지 지상에 쓰러지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
‘중급 신격을 지닌 나를 일격에…….’
머리가 날아간 루프스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죽인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전쟁터에는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소녀였다.
하얀 양산을 쓰고 있는 모습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빨리 비켰어야지.”
방금 루프스의 머리를 날려버린 건 무기를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아주 가볍게 손을 휘둘렀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루프스의 목숨을 앗아가기엔 충분했다.
“아자젤.”
루프스를 처리하고 느긋하게 걸어가는 아자젤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 서 있는 건 탄탄한 근육질의 악마, 벨제부브였다.
“슬슬 움직일 것 같으니 루시퍼가 오라더군.”
“움직여? 아아…….”
아자젤은 아까 보았던 ‘그걸’ 떠올렸다.
계속해서 이쪽을 지켜보는 하나의 시선.
모든 걸 아래로 내려다보는 절대자의 눈을 아자젤은 선명하게 느꼈다.
‘과연, 그런가.’
아자젤은 픽 웃었다.
외신이 무려 셋이나 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자젤 님은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나요?]
자신에게 건방진 질문을 하던 소녀가 떠올랐다.
‘그래, 이걸 염두에 둔 거였구나, 민수아.’
그런 역할을 자신이 맡으리라 생각한 건가?
나태의 악마인 자신이?
‘이전이라면…… 확실히 거절했을 거야.’
성가신 건 질색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공포라는 감정을 알아버린 지금의 아자젤은 전과 달랐다.
그때 한지수, 지금의 마왕에게서 느꼈던 공포는 아자젤에게 꽤나 큰 자극이 되었다.
“난 가지 않아, 벨제부브.”
“뭐? 그럼 우리 셋이서 상대하라고? 뭐, 나야 좋다만.”
벨제부브는 현재 마왕과 루시퍼가 막아서고 있는 세 외신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거대한 고깃덩어리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것들은 지금 인간의 형상을 한 채 고고하게 서있었다.
오만한 얼굴로 기다려 준다는 듯이.
“내게 시건방진 말을 한 애가 있거든.”
“……그게 왜?”
“그 아이의 말을 지켜주려면 나도 조금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
“네가? 노력을?”
노력이란 아자젤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모든 걸 가지고 있던 그녀가 노력이라니.
린 테일러가 그러하듯 아자젤에게 노력이란 건 의미 없는 것이었다.
‘장난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단순히 귀찮아서 거절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흥, 알겠다. 넌 늘 제멋대로였으니 루시퍼도 이해하겠지. 다만 저걸 제대로 막지 않으면 마왕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외신 셋, 그 중에서도 슈브 니구라스라고 불리는 외신은 급이 달랐다.
아무리 루시퍼가 강하고 마왕도 있다지만 쉽게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아. 곧 대리자가 올 것 같으니까.”
“대리자?”
외신을 상대하려면 7대 악마 중에서도 상위 셋을 제외하면 외신을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 숫자도 딱 맞잖아? 그럼 부탁할게.”
아자젤은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대화를 할 생각 따위는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벨제부브는 짧게 혀를 찼다.
“넌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년이다.”
당연히 아자젤은 대답하지 않았다.
***
‘악마라고 했던가.’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한 아우터갓.
슈브 니구라스는 지금 자신을 막아서고 있는 두 악마를 허공에서 내려다보았다.
방금 가볍게 손을 섞었지만 아무리 봐도 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설마 외신과 비슷한 힘을 보유한 존재가 둘이나 있을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슈브 니구라스의 말에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로 변한 디엔드라가 답했다.
여태 지구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그저 관광하는 기분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그런 마음은 악마라는 존재들이 나타나며 조금 달라졌다.
“이드라도 참 알 수 없는 녀석이야.”
“원래부터 인간을 좋아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습니까?”
스스로 인간이 되길 자처하고, 이제는 인간과 하나가 되기를 망설이지 않는 이드라의 기행은 그들에게 있어 이해불가의 영역이었다.
“아무튼 더 이상 아자토스께서 놀지 말라고 했으니 서둘러야겠구나.”
“알겠습니다.”
“저는 마침 먹이도 줘야했던 터라, 타이밍이 딱 좋군요.”
슈브 니구라스의 말에 노스 이디크와 디엔드라가 수긍했다.
아자토스의 명이 내려진 이상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퍼블리셔가 패배하면 자신들의 우주에도 영향이 오게 될 것이다.
“자, 나의 아이들아 오랜만에 포식할 시간이다.”
슈브 니구라스의 말을 반겼던 이디크는 양손을 좌우로 펼쳤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작은 종기 같은 게 부풀어 오르며 열매처럼 지상으로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종기들은 꿈틀거리며 커지더니 기괴한 괴물로 변했다.
그 괴물들은 분열되더니 급격하게 숫자가 불어났다.
갑자기 나타난 수십 마리의 괴물들을 보며 지수는 눈을 찡그렸다.
“뭐죠? 저건?”
“틴달로스의 사냥개라고 합니다. 노스 이디크…… 놈이 부리는 아우터갓의 애완동물 같은 겁니다.”
지수의 질문에 루시퍼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문제는 틴달로스의 사냥개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두 외신들도 각각 괴물들을 소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중에는 그레이트 올드원도 섞여 있었다.
가뜩이나 위협적인 그레이트 올드원의 수가 늘어나자 지수는 눈을 찡그렸다.
“더 이상 대치해 봐야 손해겠네요.”
“동감합니다.”
지수는 흉성의 학살자를 꽉 움켜쥐었다.
루시퍼 역시 검은 날개를 활짝 피며 천천히 공중에 떠올랐다.
‘아자젤은 오지 않는 건가.’
날아오른 루시퍼의 눈에 홀로 돌아오는 벨제부브의 모습이 보였다.
마왕의 명을 거절한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는 거겠지.
‘조금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겠어.’
루시퍼는 심호흡하며 그가 지닌 힘, 세피라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검은 날개에 빛이 모이며 백색으로 변하자 외신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다.
“다섯 번째, 게브라.”
모든 걸 불태우는 신의 심판이 뿜어지며 슈브 니구라스를 향해 날아갔다.
태양과 동등한 막대한 열량에 슈브 니구라스는 자신의 아이들을 소환하던 걸 멈추고 급히 손을 들어 막으려 했다.
‘이건……!!’
하지만 게브라가 손에 닿기 전 슈브 니구라스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저 불길은 ‘태운다’라는 개념이 담겨 있었다. 닿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불태우리라.
아무리 불사의 육신이라도 저런 것에 맞는다면 성가실 게 분명했다.
“귀찮은 짓을.”
비단 그건 슈브 니구라스만이 아니었다.
게브라의 불길을 피해 세 외신은 조금씩 떨어진 장소에 내려섰다.
그건 루시퍼가 노린 수이기도 했다.
한곳에 뭉쳐 있는 게 아닌 서로를 떨어트리는 것.
“제가 슈브 니구라스를 맡겠습니다. 노스 이디크는 마왕님이, 그리고 디엔드라는 벨제부브가 맡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알겠어요.”
지수는 굳이 루시퍼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루시퍼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외신에 대한 지식도 상당했다.
그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무엇보다 지수는 무언가를 할 때 깊게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탁.
지수는 루시퍼가 말한 이디크를 향해 움직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마치 지수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서 있었다.
“재밌는 짓을 하는군. 마치 제각각 싸우면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 이거 참, 우리도 얕보인 모양이야.”
노스 이디크는 외신 중에서도 가장 전투적인 능력을 지닌 외신 중 하나다.
그는 모든 틴달로스 군주를 지배하는 자.
전투능력만 따지면 슈브 니구라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뛰어난 점도 있을 정도.
그 요그 소토스조차 이디크를 무시하지 못했다.
“보아하니 저 녀석의 말을 듣고 나를 상대하러 온 모양인데 꽝을 뽑았구나. 이제 막 마왕이 된 아이인 것 같은데 운이 없어. 아니면 저놈에게 밉보이기라도 한 건가?”
지수는 그런 그의 말을 잠자코 듣다가 눈을 찡그렸다.
“당신은 제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긴 하네요.”
“호오? 그건 무슨 뜻이지.”
“말이 너무 많아요.”
붉은 지수의 눈동자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왕관에서 흘러나오는 신격이 전신으로 퍼지며 전신에 붉은 문양이 세겨진다.
흉성의 학살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그녀의 발이 대지를 박찼다.
콰쾅!!
대지가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지수의 몸이 단숨에 이디크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성격이 급한 아이군.”
이디크는 지척에 다가온 흉악한 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틴달로스의 사냥개를 부리는 이디크는 당연히 틴달로스가 가진 힘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디크는 모든 시간과 공간 측을 뒤틀며 어디로든 넘나들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단순한 물리 공격쯤은 가볍게 뒤틀어 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응?’
이디크는 간단하게 지수의 둔기가 움직이는 방향에 공간을 틀었다.
순간적으로 뒤틀린 공간 측에 휘말려 무기와 그것을 휘두른 팔을 파괴할 생각으로.
그런데 지수의 둔기는 비틀린 공간을 가볍게 통과해 버렸다.
마치, 그런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이디크가 인식하기도 전에 둔기는 그의 허리를 후려쳤다.
쾅쾅쾅쾅쾅!!!
야구방망이에 얻어맞은 공처럼, 이디크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몇 개의 건물을 단번에 관통하며 땅에 처박힌 이디크는 아릿한 고통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인간의 몸을 흉내했기 때문일까.
이디크는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며 욕설을 내뱉었다.
“건방진 것이!!”
“뭐가요?”
“……!”
이디크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자 그의 코앞에 붉은 눈동자가 있었다.
바짝 다가온 그녀의 적안에는 이디크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쳤다.
그와 동시에 위로 치켜 올라간 둔기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이디크는 황급히 양손을 뻗었다.
‘이번엔 다를 거다.’
우선 시간을 움직여 지수의 몸을 자신과 떨어트린 뒤, 공간의 틈으로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이디크의 힘은 전능에 가까웠고, 그가 날려버리고자 마음만 먹으면 별을 통째로 공간의 틈 속에 가둬버릴 수 있었다.
그런 그의 힘을 한낱 악마가 저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슥.
하지만, 지수의 몸은 뒤틀린 시간 축에 휘말리지도, 공간의 틈으로 날아가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지수는 저지불가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루시퍼와 싸우며 한 단계 발전됐고, 왕관의 힘을 손에 넣어 외신의 영역에 이른 후에는 그것 자체가 지수의 능력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지수를 멈출 수 있는 건 순수한 물리력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이디크는 지금 깨달았다.
“뭐 이딴 게 다 있…….”
인간이 왜 욕설을 내뱉는지 이디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깨달음과 동시에 둔기가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콰콰콰쾅!!!
이미 순수한 물리력으로 초월자의 영역에 이른 지수다.
그 위력은 둔기를 대지에 닿기 직전에 멈췄음에도 여파만으로 서울 전체를 흔들거리게 만들 정도였다.